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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민 20:16-29)
<길>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민수기에서 진행되는 상황을 이루어 짐작해볼 때 굉장히 마음이 안 좋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우울하게도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왜냐하면 지금 가나안을 출애굽 이후 40년 만에 눈앞에 보는 자리에까지 오게 됩니다.
이제 가나안 진군을 앞두고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재들이 연달아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먼저 20장 앞 부분에 보면 미리암이 죽게 됩니다. 그렇죠? 미리암이 죽게 되는데 한 여자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도적인 아마 이스라엘 그 광야 250만명 그룹 중에서 여성 회장이 아니였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여성 지도자인 미리암이 죽게 되고, 그리고 물이 없어서 불평했다가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의 현장에서 그만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얻게 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못 들어간다는 거. 우리가 존경하는 어떤 우리의 지도자가 같이 갈 수 없다는 거.
예를 들면 이런 것일 수 있을 거예요. 요번에 우리 수련회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작은 선교회의 모임의 그룹이 한 70명 정도가 수련회를 가는데 만약 무슨 일이 있어서 목사가 못 가게 됐다. 특별히 목사를 인격적으로 존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목사가 그 수련회를 일이 있어서 못 가게 되어버렸다.
그러면 아마 수련회 자체를 제고했을지 몰라요. 꼭 목사를 좋아해서는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도자라는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라는 겁니다.
근데 가나안 땅을 모세가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지금 광야 40년을 함께 했던 그 모세가 못 들어간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섭섭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또 아론이 죽습니다. 아론이 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30일 동안 애곡했다고 그래요. 창세기 50장에 보면 야곱이 죽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정말 조상 아닙니까? 이름 자체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되었는데 그 야곱이 죽었을 때 7일간 애도했다고 그래요.
근데 아론이 정말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락을 같이 했던 그 아론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정말 때때로 불편하고 광야생활이 힘이 들때마다 모세와 아론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들을 죽일 듯이 달려들기도 하고 그랬지마는 정말 40년간의 고락을 같이 한 그 정 그리고 그 사랑, 이게 30일 동안 애곡을 했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거예요. 제 마음이 슬퍼지려고 그래요. 그런 지도자를 잃었다는 것이에요.
정말 그러지 않겠습니까? 매일 아침 홈채플에 참여하는 분들은 태목사를 한번도 못 만났어도 갑자기 태목사가 죽었다. 조금도 슬픔이 없겠어요? 매일 아침 그래도 인터넷을 통해서지만 얼굴을 보고 있던 사람인데 근데 이게 지금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같이 지내던 사람이었다는 거예요. 마음이 얼마나 슬프겠어요.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데 아무리 복지라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믿음이 별로 없던 것 같던데 그 믿음의 마음의 상태를 볼 때 낯선 땅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복지라는 이름을 붙여놔도 낯선 땅인데 이 낯선 곳을 가는데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던 그 지도자가 같이 가지 못하고 또 아론은 죽고 그런 형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중간부분부터 읽었습니다만 이제 가데스에서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려고 할 때 바로 사해 남단에 있었던 에돔 땅, 야곱과 에서가 형제로 태어나지 않습니까? 쌍둥이 형제로? 근데 그 에서의 후손인 에돔, 붉다는 뜻의 에돔이 바로 위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에돔을 지나가면 너무너무 가까운 지름길 아닙니까? 그 지름길로 지나가기 위해서 모세가 사신을 보내 담판을 벌이는데 그 담판이 실패를 하고 에돔 왕이 사람들과 군대를 이끌고 나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또 먼 길을 돌아가게 된 거예요. 바로 지름길로 통과할 수 있는데.
우리 강동육주(江東六州)를 요나라로부터 세치 혀를 놀려서 뺏어온 서희 같은 그런 놀라운 신하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내서 강동육주를 회복하고 요나라의 침범을 막고 요나라를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인데 근데 이런 담판에서 성공하기는 커녕 이 담판을 통해서 오히려 에돔 왕이 적대세력으로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악재가 계속 겹치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 모든 상황을 도대체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설정한 것이 ‘길’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자, 미리암이 죽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서 이제 떠나갈 것입니다. 아론은 죽었습니다.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길,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섭리하시면서 이끌어가시는 그 길이 아브라함 때부터 벌써 500년 전이 되지 않습니까? 500여 년 전 아브라함에게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길이 지금 계속해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길을 한나님이 선택한 사람들, 하나님이 선택한 지도자들이 자기 인생에서 길을 올라섰다가 어느 구간 특정한 구간을 걸어가다가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길을 벗어나게 되는 거 이게 죽음인 것이에요.
우리는 보통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런 시각에서 바라봅니다.
내 인생. 내가 1958년에 태어나서 이제 50년을 살았다. 그러므로 앞으로 몇 년 더 살다가 죽을 것이다. 내 인생의 출발과 끝을 보면서 하나로 완결된 나의 인생을 봅니다. 내 인생 길을 보게 됩니다.
근데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큰 하나의 길이 있고 그 길에 모두가 다 올라 섰다가 어느 특정 구간을 예를 들어 1958년부터 제가 이천 몇 십년 이렇게 너무 오래 잡았나요? 몇 십 년이면? 하여간 일정한 기간을 걸이가다가 그 길에서 벗어나. 이게 죽는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길은 계속해서 뻗어갑니다.
벌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까? 20세 이상의 성인 남녀가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사건을 계기로 해서 다 죽어갑니다. 그러니까 20살 아래에 있던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은 그 많은 어른들의 죽음을 광야에서 다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미리암이 죽고 아론이 죽고 모세가 자기들 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가나안 복지를 향한 역사는 아브라함 때부터 계속해서 500년간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진행되고 있는 500년 동안에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신앙의 사람들이 그 길에 올라서서 걷다가는 죽고 걷다가는 죽고 했던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이끌어가시는 길을 나는 그 길에 올라서서 잠깐 걷다가 끝나고 마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고 그렇지 않는 길이 어떤 길이냐?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내서 가는 길을 가는 것이에요. 내가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 그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 이제 가데스 바네아에서 호르 산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가장 짧은 단거리 코스가 에돔 땅을 가운데로 지르는 겁니다.
근데 이상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가 이제 끝이 나고 이 에돔 땅을 가로질러 가기 위해 담판을 벌이는데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에요.
모세가 그냥 백성들의 장로들과 의논하고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 내일 읽을 장을 보면 또 백성들이 에돔 땅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아라바 길을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너무나 좋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얻기 위하여 에돔 땅을 가로지르는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 위해서 그 길을 스스로 내기 위해서 모세와 장로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합을 해서 그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시게 됩니다.
결국 인생은 이 두 가지 유형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을 올라서서 일정기간 걷다가 내려오든지 그게 죽는 거지요?
아니면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이 아니라 내 길을 내가 원하는 길을 요 길이 좋은 길이다, 요 길이 짧은 길이다, 요 길이 최고의 길이다 라고 정한 길을 가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모습, 그러다가 결국 불뱀에 물려죽는 그런 결과, 결국 불행에 물려죽고 우리 심령의 기쁨과 생명력이 불행에 물려죽고 불평에 물려죽고 원망에 물려주고 하는 이유가 다 뭡니까?
내가 길을 내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을 가지 못하고 내가 길을 내는 거예요. 내가 길을 내려고 하다보니까 다 죽어가는 겁니다.
결국은 미리암도 모세도 아론도 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걷는데 그 길을 걷는 중에도 우리가 끊임없이 모세가 하나님께 나무람을 당하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해요. 가나안으로 끌고 가시는 그 길에서 그만 일찍이 내려오게 됩니다.
이게 다 뭐예요?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의 길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두 가지 길의 유형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이 두가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비유적으로 여러분 첫 번째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 박목월 시의 나그네라고 하는 그 시 아시잖아요? 너무너무 멋진 시 아닙니까?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길은 한 줄기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한 줄기의 길이 있어요. 거기에 내가 참여할 뿐인 것이지요.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남쪽으로 삼백 리가 뻗어있어요. 이건 추상적인 거예요. 꼭 삼백 리 자로 재서 그 수치의 길을 걸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외로운 외길을 나그네가 혼자 걸어간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외길을 걸어가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이 시가 참 아름다운 것은 신앙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좀 합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이 되느냐?
자, 외줄기 남도 삼백 리 끝없이 걸어가야 되는 그 길을 혼자 걸어가야 되는 나그네의 고독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고독한 나그네 고독해보이는 나그네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이게 무슨 얘기에요?
술이 익는다는 것은 인공적인 것이에요. 인간적인 것이고 인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타는 저녁 놀. 이건 자연적인 거예요. 술이 익는다는 인위적인 행동도 또 노을이 지면서 붉게 하늘이 타는 듯이 물드는 그 현상도 모두가 다 열을 내는 작용 아닙니까? 열을 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의 발동 인간적인 모든 의욕이 자연에 부합하고 자연과 조화되어져 가는, 자연의 저녁노을이 타가는 그 모습과 인공적으로 술을 발효시켜서 열을 내고 있는 그 모습이 합치되어지는 그 마음이 이 외롭게 보이는 나그네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외롭게 보이지마는 이 나그네는 외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자연과 벗 삼아 자연과 일치된 마음으로 외로워보이지만 외롭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남도 삼백 리 외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신앙적으로 좀 해석을 한다고 하면 어떤 뜻이 되겠습니까?
그냥 하나님이 정해놓으시고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그 길을 내가 혼자 가는 거예요. 아내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남편하고 가는 것도 아니에요.
왜? 남편이 그 길에서 내려서는 죽음의 순간이 다르고 아내가 그 길에서 내려서는 죽음의 순간이 다른 것입니다.
외로워 보입니다. 혼자 가는 길입니다. 자식이 평생 같이 갈 것 같아도 천만의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타는 저녁노을과 같이 자연 대신에 하나님을 그 자리에 집어넣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저녁노을이 타는 것이 술익는 마을로 연상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생에 대한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세상 그 마을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내 삶의 환경과 내 삶의 순간을 지나갈 때마다 하나님과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으로 위로를 삼고 하나님으로 기쁨을 삼아가면서 하나님과 조화되고 일치되어서 이생의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어떻게? 구름에 달 가듯이.
무슨 말입니까?
환경에서 달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우리는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돈이라는 달을 잡으려고 하고, 일류대학이라는 달을 잡으려고 하고, 인정과 명예 이런 달을 잡으려고 하고, 성공이라는 달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오직 술 익는 마을과 저녁노을이 붉게 타는 것이 일치하듯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해서 보여지는 수많은 달들. 성공이라는 달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저 달을 잡아라.”그리고 좋은 대학이라는 달, 돈이라는 달, 사업의 성공이라는 달, 이런 달들이 수없이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가운데 구름에 달 가듯이 그 달을 스쳐지나가면서 아무 것도 잡으려 하지 않고 지나가는 동안에 하나님과 일치되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런 삶, 이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듯 구름에 달 가듯이 갈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를 다 기억하고 살아가면서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 세상의 달들에 대해서 구름처럼 지나갈 수 있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과 저녁노을이 불 타듯이 자연으로 표현되고 있는 그 하나님과 자연과 일치하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자연=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이 시에서 자연이라는 자리에 하나님을 넣었을 때 그 하나님의 생각이 불타오를 때 똑같은 정감으로 하나님과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신앙인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을 우리가 올라타고 내려오라 할 때까지 가는 겁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가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수많은 달들을 구름이 스쳐지나가듯이 스쳐지나갑니다. 마음으로 잡지 않습니다. 외로워 보이지만 그 마음은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일치되어서 하나님을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돔으로 길을 내려고 했던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자신의 인생의 길을 내려는 인위적인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어떤 얘기가 될까요?
어제 우연히 점심을 먹고 앉아 있는데 집사람이 TV를 틀었어요. 근데 드라마 재방송이 나와요. 근데 제가 제목은 말했지요? 강남엄마 따라잡기. 한번도 안 봤어요.
근데 그 장면을 집사람하고 같이 보게 되었는데 어떤 장면이 나왔느냐 하면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해서 1학년을 다니는 아이가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살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과학고등학교를 들어갔으니까 수재 아닙니까? 근데 그 수재 아이가 과학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없어요. 그림 공부를 하겠다는 거예요. 미술에 전념하겠다고 엄마를 조르고 아빠를 조르는데 아빠는 승낙하는데 엄마가 용납이 됩니까?
과학고등학교가 도대체 대한민국 안에서 어떻게 인정받고 있는 고등학교입니까? 그 고등학교를 그만 두겠다니 인정할 수가 없고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을 강요합니다. “넌 안돼. 넌 죽어.” 이랬다는 거예요. 저는 못 봤는데 집사람의 설명에 따르면.
그래서 그 아이가 결국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떨어집니다. 이때 엄마가 하는 말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거예요. 정말 눈물 나더만요. 제가 눈물을 워낙에 드라마를 볼 때 많이 흘리기도 합니다마는 그 장면 앞도 끝도 안보고 있던 그 한 장면을 보는데 자살한 그 아이의 죽음 앞에서 그 엄마가 울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 시간을 다시 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면 미술공부하겠다는 그 아이를 왜 미술공부를 안 시켰느냐 이거에요.
내가 그 아이의 인생 길을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내가 그 아이의 인생 길을 만들려고 너는 과학고등학교라는 길을 통과해야 돼.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고 있는 이 과학고등학교라는 이 달을 잡아야 돼. 이 길을 가야 돼.
강요하고 강요하다 결국 자식이 죽고 맙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생들이 살아가는 길을 내는 방식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오늘도 우리의 삶, 이제 아침 홈채플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삶이 펼쳐지고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에요.
어떻게 그 길을 따라가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시면서 ‘주님, 내가 이 세상에서 죽은 자입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달들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동안만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가나안 복지를 향한 그 길을 우리는 갈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길은 한 길 밖에 없어요.
주어진 환경 그 속에서 하나님의 길이 나 있어요.
그 길을 찾아 올라서서 걷는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구름에 달 가듯이 이 세상이 좋아하는 모든 달들을 스쳐지나갈 수 있는 마음 상태라야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외줄기의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게 되고 그 길을 걸어가는 우리를 볼 때 고독하다고 볼지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은 내 마음은 술이 익어가면 열을 내고 있고, 내 환경은 하나님의 길은 저녁노을이 타듯이 하나님의 섭리가 타고 있는 그 길과 일치가 되어서 하나님을 갖고 살아간느 복된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외줄기 일 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이 인생의 길들을 이끌고 가시는 동안 우리는 올라탔다가 잠깐 걷다 내려오는 자들입니다.
이 길을 바르게 걷는 자들만이 불뱀에 물리지 않을 것입니다. (2007.08.22)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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