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6:1-17:83, 요셉 지파가 받은 기업
22.5.18, 박홍섭 목사
오늘 함께 읽은 16장 17장은 요셉 자손 중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된 기업을 말합니다. 16:1-4에서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제비를 뽑아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고 총론을 말하고 나서, 5-10은 에브라임 자손이 얻은 기업, 17:1-13은 므낫세 지파가 받은 기업을 다룹니다. 그림으로 보면 그 경계가 대략 이렇습니다. 지도를 보면 에브라임이 받은 땅의 아래편 남쪽에는 베냐민 지파와 단 지파의 땅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 끝으로는 지중해, 그리고 위편 북쪽으로는 므낫세 지파가 받은 땅이 잇사갈과 스불론과 아셀 지파의 남쪽 경계와 맞물려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지파처럼 하나의 지파로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각각 한 지파씩 받아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는 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땅도 유다 지파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의 땅을 받습니다.
특별히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성막이 있던 실로와 제단을 쌓았던 세겜 등 중앙 산지의 실로 엄청난 영적 의미가 있는 지역을 기업으로 분배받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이 작게 받는다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17:14을 보십시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니” 적다고 불평합니다.
여기에 대해 여호수아는 네가 여호와께 복을 받았다면 그 힘으로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15). 그러자 요셉 자손은 그 산지는 넉넉하지도 않고 골짜기에 사는 가나안 족속이 철 병거를 가지고 있어서 정복하기 힘들다고 또 불평합니다. 여호수아의 대처는 단호합니다. 17-18이죠. 너의 말대로 네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큰 민족이 되었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주셨으니 두말하지 말고 그 산지도 개척해서 너희들의 분깃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왜 우리에게는 기업을 적게 주냐고 불평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주신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는 않습니다(16:10, 17:12-13). 16:10을 보십시오.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 17:12-13입니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지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사실 이는 요셉 자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몇 번이나 확인했듯이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첫머리에서도 확인됩니다. 13:13이죠.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 15:63의 유다 자손도 동일한 잘못을 범합니다.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다” 여호수아만 아니라 뒤의 사사기도 똑같이 시작됩니다. 삿 1:19, 21, 27-33을 보십시오. 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을까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힘이 없을 때는 없는 대로, 있을 때는 있는 대로 그들을 현실적으로 활용하겠다는 편의주의와 실용주의적 생각 때문입니다. 굳이 그들을 다 쫓아내기보다 적당하게 남겨두어서 일을 시키면 더 좋지 않냐는 불신앙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은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생각과 이스라엘의 생각이 너무나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은 죄인이어서 몰아내지 않으면 반드시 악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그들을 몰아내는 일에 마음을 쏟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보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일이 더 중요했고 우선하는 순위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이 있으면 그 땅에서 집도 짓고 농사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고 일도 시킬 수 있으니 아주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면 기를 쓰고 그 땅에 남아 있으려 하는 그들을 굳이 쫓아내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편이 훨씬 유익하고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편의주의와 실용주의적인 사고가 하나님의 나라에는 큰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어 나중에는 필연적으로 그들과 섞이면서 그들의 우상까지 같이 섬기는 세속화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있으면 힘들게 믿음의 길을 개척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떠먹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왜 우리에게는 더 주지 않냐는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이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4) 제비를 뽑아서 가장 적절하게 가족의 수대로 기업을 주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불평이며, 므낫세 지파에 속한 슬로보핫의 딸들에게도 기업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불신앙이기도 합니다. 앞서 이 산지를 내게 달라는 갈렙의 믿음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오늘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과 우리 주변의 세상의 가치관을 다 쫓아내지 않고 적당하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편하고 쉬운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죄 성이 다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편하고 좋을지 몰라도 결국 성화 되는 성도가 아니라 세속적인 성도가 됩니다. 그 특징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불평과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나의 기업과 은혜를 하찮게 여기면서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늘 분주합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주냐고 불평하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면 사람들이 오지 않고, 왔다가도 종교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떠나버리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가 어떻게 합니까? 적당하게 사람들의 기대와 요구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고 추구하면서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성경의 원리가 아닌 인간적인 생각들에 지배되는 세속화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가나안에 들여보내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철저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열방을 향한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지 가나안 원주민들과 그들의 세속적인 가치관과 문화와 우상을 몰아내는 일이며 여기에 헌신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너무 극단적으로 믿지 말고 적당하게 가나안 사람들을 이용해서 농사 기술도 배우고 그 땅의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여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먹을 것 다 먹고 챙길 것 다 챙기고 누릴 것 다 누리고 세상에서 할 일 다 하는 식의 생각으로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는데 온 힘을 기울이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려주신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가나안땅의 열매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해주실 때 가장 먼저 유다 지파부터 주시고 그다음에 에브라임 지파에게 주셨습니다. 그만큼 유다 지파와 에브라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나중에 유다는 남쪽의 중심이고, 에브라임은 북쪽의 중심이 됩니다. 남쪽을 남 유다라 하고 북쪽을 북이스라엘, 혹은 에브라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역할과 맡은 사명을 가볍게 여기면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보면 앞으로 북이스라엘의 타락이 예상되지 않습니까? 남 유다를 대적하면서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로보암입니다. 이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족속입니다(왕상 11:16). 그는 유다 지파를 대적하였고 유다에 세운 성막에 백성들을 가지 못하도록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우상숭배를 조장한 악의 대명사가 됩니다.
시편 기자는 에브라임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시 78:9입니다.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10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하나님께서 병기와 활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쟁의 날에 싸우지 않고 물러나 유다 지파를 떠나 북 왕국을 이루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걸었던 믿음의 길 때문에 야곱의 모든 가족들이 흉년과 기근에서 구원을 얻었고 그의 두 아들은 각각 한 지파의 몫으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것도 어떤 다른 지파의 한 몫보다 더 크게 분배받았습니다. 은혜입니다. 그런데도 불평하고 원망하며 마침내 우상숭배의 주역이 되는 그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를 보십시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업으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이 땅에 잘 적응하는 사람 이전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자녀들로 키우고 있는지요?
오늘 내 삶에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보이는 불평과 원망의 모습은 없는지요? 조금 늦게 하고 힘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개척하려는 마음보다 쉽고 편하게 믿으려는 편의주의와 현실주의 실용주의 신앙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너무 쉽게 타협하고 무너지는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는 저녁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