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박우당(牛堂) 도전(都典)
1917년(정사) 11월 30일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탄강하시다.
존휘 : 한경(漢慶), 존호 : 우당(牛堂) 이시다.
1917년은 도주님께서 23세로 득도를 하신 해이다.
1946년(병술) 4월 태극도에 입도하시다.
1954년경부터는 도주님의 명으로 자주 공부를 시종하셨으며,
1955년 포감으로 임명 받으신 후에는 주로 본부에서 도주님을 지근에서 모시다.
1956년경에는 수도인을 대표하는 자리에 오르셨는데 도주님의 명으로 1956년 발간된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에서 ‘도인대표 박경호[朴景浩: 도전님의 원명(原名)]’명의로 기록되었다.
1957년에는 도주님으로부터 ‘우당(牛堂)’이라는 호를 받으시는데 우(牛)는 축(丑)으로 12월이니 도를 뜻하고, 당(堂)은 집을 뜻한다.
1958년(무술) 총도전 으로 임명되시면서 3월 6일 도주님으로부터 유명으로 종통을 계승하시었다.
나는 도주님의 유명(遺命)을 직접 받아 종통을 계승하였느니라.(도전님훈시80.7.22)
1967년 4월 14일 조정산 도주님을 '조성옥황상제하감지위'로 신위를 모시다.
1968년 7월 19일(음력 6월 24일) 종통계승 10년째 되는 해 도전님께서는 상제님 화천치성을 마치신 후 아침 일찍 감천도장을 나오셔서 아미동 고개를 넘어 해운대로 가셨다가 서울에 올라오시다.
도전님께서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태극도 말엽에 한 3년간 파당이 생겨서 아무리 수습을 하려고 해도 안 되었다.
결국은 나 혼자 나왔다.
그때의 최고 간부들, 포장, 호장들 나에게 참 잘했었다.
그러나 마음이 돌아가니 안 돌아오더라.
그런데 보니 내가 떠날 때 감천도장의 지형지세는 뱃머리가 바다 쪽으로 나오게 돌아간 모양이 되었고, 축대는 마치 뒤에서 파도치는 형상과 같았다. 그래서 내가 부산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고, 「내가 떠나니 신명들도 아미동 산 고개를 넘어 다 떠나가더라.」하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을 우리는 ‘도전님께서 이궁하셨다’라고 말한다.
도전님께서는 서울에 새로운 도장을 정하시고 이후 감천도장에는 한 번도 가지 않으셨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이 도장(道場)이다」(1989.4.13도전님훈시).라고 말씀하셨다.
「도주님께서도 한 번 바꾸신 곳은 두 번 다시 잘 안 가셨으며 그때 도수에 사용하였으면 충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셨다.
1968년 10월 중순 경기도 수리산에 있는 수리사에서 공부를 하셨다.
1969년 4월 공부를 마치신후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고 서울 성동구 중곡동에 종단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고 1971년 5월 24일 중곡도장 영대 봉안하셨으며, 1972년(임자) 1월 1일 대순진리회 본부 현판식을 여시고 1972년(임자) 2월 7일 도헌 제정하시었다.
1977년 도전님께서는 종무원장님과 혼인의식을 치루시어 상제님께서 펼치신 고수부 공사를 완성하시고 2월 21일 이 장소를 무료예식장으로 개관하셨다.
1981년 12월 4일 중곡도장 본전 증축완공, 영대·봉강전 진영봉안
1984년 1월 5일 학교법인 대진학원 설립(현 학교법인 대진대학교)
1986년 10월 24일 여주수도장 수련실시 (180명 3박4일)
1986년 10월 25일 여주수도장 준공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
1986년 10월 25일 여주 수강원 수강실시 (5개반 50명 2박3일)
1987년 10월 18일 재단법인 대순진리회 설립 인가(이사장 경석규)
1989년 4월 14일 학교법인 대진대학교 이사장으로 도전님 취임
1989년 6월 24일 제주수련도장 준공
1989년 9월 7일 제주수련도장 연수 실시 (120명 5박 6일)
1990년 여주수도장 현 본전 준공
1995년 12월 4일 도전님 모습을 감추심
1995년 12월 13일 금강산토성수련도장 준공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인흥리)
수리사 49일 공부
1968년 10월 중순 경기도 군포시 속달로에 있는 수리사에 방(요사채)을 얻으시어 공부를 하셨으며 1969년 1월 말~2월초쯤 추운 겨울 방 한 칸에 화로 하나 놓고 문을 걸어 잠그신 채 공부를 시작하여 3월 중순쯤 49일 공부를 마치셨다.
도전님께서 공부를 하실 때는 임원들뿐만 아니라 누구도 요사채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리사 공부를 마치시고 “내가 그때 6개월 동안 잠을 안 잤다. 한참 잠을 안 자다가 자려니까 이상하다”고 말씀하셨다.
도전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수리사를 자주 왕래하셨는데, 그때 하신 말씀이 “공부할 때는 몰랐는데 공부 마치고 나중에 보니 여기가 반월면 속달리 수리사이더라”고 하셨다.
반월(半月)은 ‘반달’로서 『채지가』의 「달노래」에 “보름달은 온달이요, 나흘 달은 반달일세. 섣달이라 초나흗날 반달보고 절을 하세”처럼 12월 4일 탄강하신 도주님과 연관된다.
속달리(速達里) 수리사(修理寺)는 ‘이치를 닦아서 빨리 이룬다’는 의미로 도전님께서 서울에 새로운 도수를 펼치고자 하심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수리사 주지는 청운스님이라는 대처승으로 수리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처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가 도전님께서 공부하실 때 밖에서 주문 소리를 듣고는 과연 도통하신 분의 주성(呪聲)으로 큰 기운이 도전님 공부처로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청운스님도 도전님처럼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공부 중 보살이 나타나 “너는 공부하지 말고 저기서 공부하시는 분을 도와드리는 것이 이번 생에서 너의 할 일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후 스님은 도전님을 정성껏 모셨으며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청운 스님 어머니는 수리사 경내의 감나무에 감이 무성하게 열렸을 때, 그 감이 홍시가 되면 도전님께 먼저 올리고 그 다음 대웅전에 올렸다고 한다.
도전께서 공부를 하시면서 창생과 신명의 원(冤)을 대속하여 해원하시니 이로 인해 큰 고초(苦楚)를 겪으며 괴로워하셨다.
도전께서 공부를 마치신 후 말씀하시기를,
『이 공사가 나를 위한 일이었다면 못하였을 것이니라.
오직 창생과 신명을 구하는 일이기에 공부를 마칠 수 있었도다』고 말씀하셨다.
* 현재 수리사의 주소는 군포시 속달로이지만, 당시에는 화성군 반월면(半月面) 속 달리(速達理)였다.
수리산(修理山)은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수리사(修理寺)로 인해 수리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견불산(見佛山.부처를본다)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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