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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모님의 생애와 섭리1(참아버님의 탄생과 섭리노정 출발)라는 책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2. 참아버님 탄생과 그 배경
1) 하늘이 준비한 혈족 남평 문씨
제3이스라엘 선민(選民)으로 택함 받은 한민족 가운데 270여 개 성씨(姓氏)가 있는데 그 중 섭리적 장손(長孫) 혈족은 바로 남평(南平) 문씨(文氏) 가문이다.(35)
남평 문씨의 시조(始祖)는 무성공(武成公) 문다성(427-578) 선생이다.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소재 장자연(長者淵) 인근의 큰 암석 위의 석함(石函)에서 탄강하셨다. 그 석함에는 붉은 색의 ‘글월 문(文)’자가 새겨져 있었다.(35) 무성공은 백제의 공세를 받아 위축된 나주 영산강 유역 마한(馬韓) 지역 출신이다.(36) 혼란기에 마한의 쇠퇴한 왕족 또는 그 후예가 신라의 왕실에 혈맹관계로 귀화했다고 보여진다. 무성공과 그 후예들의 역사는 신라사(新羅史)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삼국통일 후 귀환(歸還)하여 영산강 일원을 토착기반으로 한 무성공의 문중은 고려 중기에 이르러 중앙에 출사(出仕)해 비로소 중흥기를 맞게 된다.(37)
참아버님께서는 ‘남평(南平)’이란 의미적으로 ‘남쪽나라 맨 끄트머리, 하나님이 발 디딜 수 있는 평지’라고 말씀하셨다. 또 ‘조상을 살펴보니까 문씨네는 사생아로부터 출발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36)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무성공의 문암(文巖) 탄강사건도, 사생아(私生兒)로 탄생한 예수님처럼 그 배후에 섭리적인 혈통복귀의 뜻이 게재돼 있다고 추론된다.(38)
남평의 장자연 못가 암석 위의 석함에 놓인 무성공의 탄강과 신라왕실 입성은 모세의 기적적 구출과 바로왕실 입양에 나타난 섭리와도 그 성격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38)
『원리강론』모세 노정에 의하면, 십계명이 새겨진 두 석판과 그 뿌리된 반석은 장차 말씀의 완성실체로 오실 예수님과 성신, 그리고 그 뿌리인 하나님을 상징했다. 그런데 모세가 석판을 깨뜨리고 반석을 2타하는 실수를 범해 그것들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예수님은 광야 40일 금식 중 사탄의 시험을 받으시면서 그 돌을 찾고자 하셨다. 무성공 탄강설화에 나타난 문암(文巖)과 붉은 색의 ‘글월 문(文)’자가 새겨진 석함(石函)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돌들로 상징된 말씀의 완성실체요 하늘 혈통의 근원자가 장차 재림섭리시대에 문씨 혈족에 오신다는 예시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39)
2) 충의와 덕행의 뿌리 혈맥
충숙공 문극겸 선생은 한때 부당한 정사에 대해 녹봉을 받지 않아 세상이 그 청렴함에 탄복했다고 한다. 세 차례 과거를 주관해 선발한 선비 중에 명사가 많았으니 어진 재상으로 칭송받았다. 또한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이해와 사대부의 잘잘못을 막힘없이 왕에게 고(告)했는데, 그로 인해 관직을 떠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대학자 김종직은 충숙공을 추모하며 “뒤얽힌 뿌리는 의당 크게 무성할 것이요 태양은 서서히 나타나 밝혀지리라. 천만세에 큰 복이 있게 되었으니 임의 공명은 마땅히 새겨질 것이로다.”라고 안타까워했다.(40)
충선공 문익점 선생은 조선 건국에 저항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의 도리를 사수했다. 이런 전통은 이조 5백년간 외형상 쇠운의 시대라 할 만한 은둔의 문씨 문중사(史) 속에 올곧게 계승돼 왔다. 또한 목면(木棉)을 전래시켜 의복문화에 혁명적 기여를 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에서 22대 정조 때까지는 14회에 이르는 왕들의 전교를 통해 충선공의 덕망과 공적을 치하했다. 그 자손에 대해서는 문ㆍ문관에 특채하고, 일반 군역을 면책하며, 노비는 속량을 받게 해 나라에서 특전을 억만세에 변동하지 않도록 거듭 당부했다.(40)
참아버님께서도 이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문씨는 충신이 많기 때문에 문씨 종족은 절대 노비로 쓰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 문헌이 있다는 것이다. 문씨는 이조시대에 노비로 안 썼다는 것이다. ‘섭리적으로 보면 그 말도 묘하게 일리가 있는 말이구만’ 하고 생각하고 들었다.”라고 하셨다.(41)
남평 문씨는 고려조에는 문벌(門閥)로 정사에 참여했다가, 조선 초기에는 ‘불사이군’의 충절로 은거한 분이 많았다. 중기에도 고려조에 비하면 극소수가 출사했으며, 말기에는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많이 참여했다.(41)
참아버님께서도 “남평 문씨는 전통적으로 양심적이며 절개가 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무서운 고집을 가진 문중”이라고 하셨다. 이런 충의의 전통은 하나님의 섭리사 가운데 선의 중심 혈족을 찾아 세우는 데 있어 귀중한 조건이 됐다.(41)
대대로 계승돼 온 참아버님 집안의 가훈(家訓)은 “팔도강산에서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후히 대접해 보내라.”는 가르침이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고 머물 곳 없는 사람에게 쉬어갈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전통이 전승돼 온 것이다.(42)
3) 근세가계 개요
참아버님의 증조부인 문정흘 선생은 근면 성실하였으며, 깊은 자애심과 저축정신으로 하늘의 축복을 받아 당대에 수천 석 하는 부농이 돼 가업을 일으키셨다. 평생 짚신을 즐겨 삼아 장에 내다 팔았고, 늙어서는 오리를 많이 사서 놓아 주시면서 “후대에 내 자손 잘되게 해주십사” 하고 빌기를 자주 하셨다고 한다. 거지와 손님 대접의 가풍을 확고히 하셨으며, 사랑방에다 한문 선생을 초대하고 불우한 청년들에게 무료 교육을 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주위로부터 ‘선옥(善玉)’이란 호를 얻으셨고, 택함 받은 집, 복 받을 집으로 평판을 얻으셨다. 특히 후손 가운데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유언하셨다고 한다.(43-44)
조부 문치국 선생은 『삼국지』같은 책도 한번 듣고 단숨에 되풀이해 내실 만큼 기억력이 뛰어나셨으며, 사람 보는 통찰력도 출중하셨다. 손자인 어린 시절 참아버님에 대해 “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인즉 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돕도록 하라.”고 이르셨다 한다. 선생은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하셨으며, 높은 덕으로 늘 선행을 쌓으셨다. 선대의 가르침을 따라 거지와 손님 대접의 온정을 지성껏 베푸시어, ‘아무 동네 문씨 할아버지 집 가보라’는 평판을 얻은 분이었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집안에 서당을 열고 인근 사람들에게 공부를 시켜주시기도 했다.(44-45)
4) 종조부 문윤국 선생
기독교 목사이자 한학자로서 애국지사이신 선생은 1919년 평북노회 조선독립운동 발기인으로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전국 13도 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셨다. 3ㆍ1운동 때, 정주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오산학교와 시민들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죽창으로 세 곳을 찔리고 붙잡혀 옥고를 치르셨다. 선생은 최초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시고 최남선 씨 등과 독립선언문을 기안한 핵심인사이셨으나 평북지방 운동 책임을 위해 시무교회의 장로인 이명룡 씨를 대신 보내고 사퇴하셨다.(48)
1921년엔 고향 일가와 교회신도 등을 설득해 당시 돈 7만원을 마련, 만주 김숙제 목사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송금하셨다. (중략) 1958년 음력 정초에 장열리 맞은편 산곡 북평5리 노루목의 외딴 거처에서 조국통일을 기원하며 영면하셨다.(48-49)
1948년 경, 선생이 한때 공산당으로 오인 받아 조사받는 과정에서 거취가 경무대에 알려졌다. 일찍이 선생과 깊은 교분을 갖고 있던 이승만 박사는 정선군수, 서장 등을 통해 헬기를 세 번이나 보내 입각을 강권했다. 측근인사 전상요 씨나 함태영 씨 등도 권유해 왔다. 그러나 선생은 고사하고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내셨다. 그만큼 하늘은 참아버님 친족 중에 장차 국가적 섭리출발을 위한 결정적 인물을 예비하셨다. 그렇지만 선생은 청빈과 은둔의 삶을 고수하심으로써 아쉽게도 연결기회를 갖지는 못했다.(49-50)
정부에서 독립운동 자료를 발굴 확인한 후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다. 또 1990년 12월 26일에는 독립유공훈장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셨다. 2000년엔 애제자 신만승 씨가 오랫동안 소중히 보존해 온 선생의 한시들을 해석하고 정리해, 역사편찬위원회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제하의 유고집을 발간하기도 했다.(50)
5) 충부님과 충모님과 대형님
선친이신 문경유 충부(忠父)님은 본래 체격이 건장하고 힘도 좋으셨다. 그러나 모친께서 바깥일을 못하게 하셔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는 등 집안일을 주로 하면서 공부하시는 선비적인 풍모이셨다. 기억력과 암기력이 좋으셨으며, 학구적 자질은 대학자로 대성할 만큼 출중하셨다고 한다. 특히 관상이나 손금을 잘 보셨는데, 늘 ‘선명한 날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내 손금에는 세계에서 최고의 아들을 낳는다고 씌어 있다.’고 하셨다.(50-51)
부부 간에 다툼을 모르셨으며, 자녀들을 체벌하신 적이 없었다. 법 없이도 사실 만큼 성품이 어질고 선량하셨으며, 인정이 많기로 소문나 그 덕을 입은 이들이 많았다. 남에게 싫은 소리 안 하기로 유명했고 약속을 이행하는 데 철저하셨다. 늘 ‘참이라는 것은 작은 꾀의 지배를 받지 않고 대의의 중심에 의해 지배받는다. 몇 년 못가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셨다. 충부님은 공산치하 동토의 땅 부자유한 환경에서 고초 속에 한 서린 날들을 지내시다가 1954년 10월 11일 불의의 상황 가운데 별세하셨다.(51)
참어버님의 종제 문용기 장로는 고향시절에 충부님께서 “일본사람들이 알게 되면 잡혀 간다.”고 주의를 주시며 구두로 전수해 주신 「대한지리가」를 구성진 음성으로 부르곤 했었다. 참아버님께서는 식구들이 그 노래를 배우도록 하라고 말씀하셨다.(51)
참아버님의 생모이신 김경계 충모(忠母)님은 키가 크시고 체격이 둥글며 힘이 장사여서 ‘중국당장님’이라는 별호를 얻기도 하셨다. 성격은 활발하고 정열적이어서 일을 잡으면 단번에 해치우셨다. 길쌈 솜씨가 뛰어났고 집안 살림을 주도하셨다. 한편 어려운 이웃에게는 아낌없이 베푸는 온정을 지니고 사셨다. 또한 선견지명이 있어 살림이 한창 흥성할 때 친정에 땅을 사두셨다고 한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인 시숙 문윤국 선생이 집안 재산을 거의 가져가 생활이 궁핍하게 되자 그것을 처분해 7천 평 정도 전답을 사서 가계를 꾸려 나가셨던 것이다.(52)
충모님은 둘째 아드님이신 참아버님에게 각별한 기대를 갖고 애정을 쏟으셨다. 외지 유학시절이나 뜻길에서의 옥살이 때마다 뒷바라지에도 온갖 지성을 다하셨다. 또 매일같이 밤 깊도록 기도 정성을 들이셨는데, 특히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즐겨 부르셨다고 한다. 천도를 가시는 공적인 아드님으로 인해 평생 깊은 모정의 가슴앓이로 공산치하 부자유한 환경에서 해후의 날을 염원하시다가 1968년 1월 7일 별세하셨다. 뜻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도 완전히 모자협조의 섭리기반을 이루신 희생적 어머니의 일생이었다.(53)
참아버님의 친형님이신 문용수 대형님은 건강한 체력과 준수한 용모에 온순하고 정직한 성품을 타고나셨다. 대형님 20세경 몇 개월간의 안수기도로 인한 병마치유를 계기로 집안 식구들이 인근의 덕흥장로교회에 입교하게 됐다. 그 후 대형님은 철저한 신앙에 몰입해 만사를 기도로 해결하셨고 앞날의 시운을 예견하시기도 했다.(54)
대형님은 특히 아우인 참아버님에 대한 믿음이 두터우셨고 누구보다 지중히 여겨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절대적으로 협조하셨다. 이렇듯 자연적으로 가정적 장자권 복귀의 섭리기대를 이루신 분이었다.(54)
충모님 별세 후 15년째 되던 해 1983년 3월 29일, 서울 청파동 본부교회에서 최초의 충모님 추모예배가 거행됐다. 세계적인 광야 40년 노정(‘45~’85)의 최종 3년 기간의 승리를 위해 영계 총동원의 문을 여시는 뜻으로 공식적인 추모식이 허락된 것이다. 이후에 참부모님 선대 어르신들에 대한 공식적인 추모식이 허락된 것이다. 그 후 1994년 3월 26일 충모님 추모일에, 충모님은 하나님의 권유와 안내로 지상 영매자를 통해 참아버님께 애절한 사연의 서신을 보내주셨다. 이 서신을 성심으로 접하신 참아버님께서는 그 후 4월 13일, ‘근본된 중심 어머니’라는 섭리적 의미의 ‘충모(忠母)’ 존호를 추서하시고 한 서린 모정을 위로하셨다.(54-55)
그 이듬해인 1995년 8월 23일 한남동 공관에서 대모님 가정, 대형님 가정과 더불어 최초 영계 가정축복을 해주심으로써 영광된 하늘 성모(聖母)의 자리에 오르셨다. 또한 이날 ‘대형(大兄)’ 존호를 추서 받으심으로써 하늘 맏형님의 자리에 서게 되였다. 그리고 선친 문경유 선생은 2003년 1월 7일 충의애관에서 봉행된 제35주기 충모님 추모예배 때 참부모님 축도를 받아 ‘충부’ 존호를 공식 추서받게 되셨다.(55)
6) 인류의 본향으로 정하신 고을 정주
탄생지인 평안도(平安道)는 자고로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 일컫는 높은 기상을 특성으로 한 지역이었다. 난세마다 숱한 환란을 겪었는가 하면, 소련이나 중국 등 국경을 잘 넘나들 수 있어 외교 수완도 능란한 지역이었다. 한국 기독교 유입 초기부터 신앙의 본거지가 됐다. 일체치하에선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이었으며, 근래에도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55)
덕언면(德彦面)은 기질상 남의 도움을 절대로 싫어하는 특별한 자립정신을 가졌다고 한다. (중략) 상사리(上思里)는 상식이 풍부한 동네라는 뜻으로 ‘상식(常識)마을’이라 불렸다. 후일 동민이 단합해 공산당을 반대했기에 ‘이남(以南)부락’이라고도 불리었다. (중략) 또한 상사리(上思里)는 하늘을 흠모하며 공경하는 의미의 대표적인 땅이다. 지번 2221은 7천년 역사가 내표된 7수 완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중략) 정주(定州)라는 말은 섭리적으로 보아 ‘하나님이 인류의 본향으로 미리 정하신 고을’, 복귀된 고을로서 고향 땅에 제일 가깝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류는 그 본향 땅에 본연의 심정을 심어야 한다.(55-60)
7) 역사적인 대혼란시대와 참아버님 성탄
참아버님이 탄생하신 1920년도는 시대적 혼란상이 극에 달한 때였다.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있었다. 인류역사는 탕감복귀역사이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적인 혼란의 종말시대에 새로운 역사 창건을 위한 준비를 하시지 않을 수 없다. 대개 섭리적인 큰 사건 이후 3년 이내로 모든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그 준비섭리는 1차 대전 3년 후부터 본격화된다. 1차 대전은 궁극적으로 참아버님께서 지상 탄생하실 세계적 탕감시대를 이루기 위한 일대 섭리적 사건으로서, 그때부터 재림역사의 소생기가 시작된 것이다.(61)
한국은 1919년 3ㆍ1운동 전후 수년간의 흉년으로 거족적 환란을 겪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45년 해방까지 40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점령 하에 압제받았다. 한국에서 장차 하늘의 아담이 탄생할 것을 사탄이 먼저 알고 사탄 편 국가인 일본을 통해 갖은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61)
3ㆍ1운동은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인 애국지사들이 거사한 봉기였다. 이리하여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새로이 미국을 중심한 서구의 방향을 따라감으로써 기독교문화권의 급진적 발전의 전기가 됐다. 유관순(1902~20) 열사는 고향인 충남 병천에서의 만세 운동 때 붙잡혀 192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했다. 섭리적으로 보아 순결한 민족적 해와형 여성의 숭고한 희생이었다. 타락한 해와의 죄를 탕감하기 위해 하늘편 심정권을 갖고 모든 지상여자들을 대표해 한국 땅을 지키면서 순절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적 제물(유관순)을 조건 삼아 한민족의 정기가 일제를 타고 넘는 시운을 안고 10개월 후 참아버님의 역사적 탄생이 이뤄졌다. 독립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태어나실 수 없었기에 그런 싸움이 참아버님의 생명을 중심하고 벌어졌다. 일제치하 나라 주권을 잃은 상황에서 국가실체를 선포함으로써 하늘편 주권기반을 조성해 드린 일대 섭리적인 독립운동이었다.(62) *상해 임시정부 수립(1919년)
1920년 경신(庚申)년 음력 1월 6일(양력 2월 25일) 자시(子時), 삼라만상이 깊은 침묵에 잠기고 망국의 한을 품은 삼천리강산도 적막에 잠긴 심야 자정을 넘긴 시각에 탄강하셨다.
1919년 3ㆍ1운동 이전 3년간 노간주나무에 매일처럼 금계(金鷄)가 울고 가곤 했고, 집 앞 소나무동산에는 따오기가 3년 넘게 울었다고 한다. 이 무렵 충모님은 수태하신 후 친정 대산리 근처 제석(帝釋)산 길목에서 산정으로부터 승천하는 한 쌍의 황금용을 선연하게 목도하시고 나서 참아버님을 낳으셨다. 충모님은 이런 경이로운 체험을 오랫동안 홀로 마음 깊이 담아오시던 중 어느 날 참아버님께 은밀하게 전해주셨다고 한다. 그러니 그 많은 자녀들 중 참아버님 장래에 대한 기대와 촉망이 얼마나 남다르셨을 것인가. 또한 종조부 문윤국 선생이 한 쌍의 용이 바다에서 승천하는 몽시를 받고나서 참아버님대 항렬(行列)을 ‘용룡(龍)’자로 했다고 한다.(63-64)
참아버님께서는 학자타입의 온순하고 정직하신 부친과 창의적이고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모친의 양면을 조화롭게 이어받으셨다. 체격와 체력 면에서는 두 분의 장점을 닮아나셨다. 특별히 집안 며느님들은 3대 전부터 체격이 좋고 건강한 분이었다고 한다.(64)
참아버님의 본래 존함은 집안 형제들의 돌림자를 따라 ‘용(龍)’자, ‘명(明)’자였다. 1945년 한국 해방 직후 평양 전도시절부터 그 크신 섭리적 사명에 뜻 맞춰 하늘로부터 ‘선(鮮)’자, ‘명(明)’자로 새로이 이름을 받으셨다. 그 후 호적상 최종 개명신고는 1964년 8월 11일에 이르러 이뤄졌다.(64)
*선명이란 이름은 해방 후 월북하여 만난 ‘여호와의 부인’으로 자처하던 박노파(박을룡)가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적 이름임
‘문(文)’은 한국 270여 성씨 중에 유일하게 진리말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자의 획을 달리해 쓰면 ‘아비 부(父)’도 되고 ‘하늘 천(天)’도 된다. 또 형태상으로는 마치 제사상에 제물을 바쳐 올리는 모습으로서 제주(祭主), 혹은 제사장의 뜻도 가진 성씨인 것이다. ‘鮮’은 바다(魚)와 육지(羊)로서 상대적 구성이다. ‘明’자도 해(日)와 달(月)로서 상대적이며 하늘을 뜻한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보면, 진리로써 바다와 육지와 하늘을 묶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실 우주적 주인공, 천주적 제사장을 말한다. ‘선명(鮮明)’은 맑고 깨끗하고 티가 없고 질서적이고 확실하다는 뜻이다. 영자로도 선(SUN), 문(MOON)은 해와 달, 즉 부모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다.(65)
『참부모님 생애와 섭리 1권』(역사편찬위원회,2009) 인용
끝.
첫댓글 참 좋은 자료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