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 감독
- 줄리앙 슈나벨
- 출연
- 마티유 아말릭, 엠마누엘 자이그너, 마리-조제 크로즈, 안느 콩시니, 파트릭 쉐네
- 정보
- 드라마 | 프랑스, 미국 | 111 분 | 2008-02-14
우연이었을까. 이번 수행에서 내가 가져온 깨달음은 경계넘기였는데
돌아와 처음 본 영화가 육신의 경계를 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이야기를 담은
프랑스 영화 <잠수종과 나비>였다.
그러고보면 일상의 삶도 참 소소한 우연을 가장한 흥미가득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 장 도미니크 보비는 엘르의 편집장으로서
한 마디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성취주의자의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근데 나조차 익숙하게 사용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성취주의자의 삶"이란 무엇일까?
프랑스여서 한국과는 약간 달리 법적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세 아이가 있는데
애인이 있다. 그리고 멋진 새 차와 집이 있고, 날마다 화려한 삶을 이어간다.
이런 장면들을 영화에선 잘 나가는 40대 자본주의 성취자의 삶으로 그리고있고
나도 그렇게 받아적고 있다. 역히 현대사회가 좀 허무하기는 한 것 같다.
무튼,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감금 증후군"이란 희귀병에 걸리게 된다.
병명조차 처음 들어본 이 병은, 한 마디도 전신마비인데 왼쪽 눈만 깜빡일 수 있는 그런 상태를 뜻한다.
영화 초반, 다큐멘터리를 방불케하는 현실성을 지니고 환자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오른쪽 눈이 실명될까 봉합하는 장면까지, 환자의 정신상태는 멀쩡한데 자신이 전신마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의사로부터 그 밖의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기까지. 한 마디로 무서울정도로 처절하다.
관객 모두,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환자와 자연히 동일시하게 만들 정도로 탁월했던 것 같다.
잠수종.
스킨 스쿠버의 낭만이 아니라, 철교 공사를 위해 무거운 철통안에 갇혀 뿌연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잠수종에 자신을 비유하는 주인공.
그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건 오직 그의 왼쪽 눈과 기억력과 그리고 상상력 뿐이다.
그리고 그는 왼쪽 눈을 20만번 깜빡이는 방법으로 그의 기억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책을 써낸다.
물론 언어치료사, 행동치료사 그리고 출간 도우미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지만
이 모든 일들이 내겐 잔잔한 기적처럼 보일 뿐이다.
대한민국 땅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날 갑자기 전신이 마비된다면, 언어치료사에 행동치료사의 도움까지 받아
세상과 여전히 소통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눈깜빡임으로 처음 치료사와 나눈 대화는 죽고싶다는 말이었다.
그 누군들 안 그럴까.
자살이 죄라 여기는 나조차도 그 상황에선 그저 본능적으로 그리 말할 것 같다. 그저 본능적으로.
그런데 포기하지 않았다.
애인을 두고 자신을 외면한 남편을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고
92살이 되어 이젠 자신도 집에 갇힌 신세가 된 노령의 아버지도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치료사들도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돌봄 가운데, 주인공도 서서히 그 자신의 현재상황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차차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주인공 보비. 그가 실존인물이라니 참으로..
스스로 잠수종이라 여기는 그이지만
상상력 속에서는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육신의 한계를 넘어 정신만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세상과 소통한다.
근데 왜 인간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잃고나서야 훌쩍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걸까..?
물론 잃고나서도 그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끝끝내 경계를 넘지 못하고 주저앉고마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번쯤 살면서 도약을 이루는 위대한 이들의 삶을 보면 거의 어김없이 상실을 경험하고는 한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다지도 어리석은걸까..?
공평할걸까..?
비로서 청춘이 삶에서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해야 인생의 의미가 무엇일지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 빈자리를 지혜로 채우지못하면 남은 생이 참으로 비루해진다는걸 알기에
누군가는 청춘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 애쓰기도하고, 누구는 권력이나 물질로 대신하려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지혜를 찾아나서기도 한다.
그 어떤 상실도 지혜로 채울수만 있다면, 그 상실이 품고있는 배움을 터득할수만 있다면
인생은 그때 비로소 공평해질 수 있는건데 나 자신 사실 너무도 우매해서 자신은 없다.
주인공 보비는 책이 출간된지 열흔 뒤에 사망했다고 한다.
20만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삶을 책에 담느라 생명력을 다 소진해서 일까.
엘르 편집장으로 계속 승승장구하며 장수하는 삶보다
그렇게 식물인간이 되어 책을 남긴 삶이 더 의미 깊다고 말하기엔
사실 당사자에겐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자체도 타자인 우리들의 오만일수도 있다.
막상 우리가 그 상황이 되면 어떻게 울부짖을지 알 수 없기에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영혼이 위대했음은 인정하고싶다.
나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그리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행하고 삶을 마감했으니
그는 진정 나비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떤 잠수종에 메여있을까..?
나는 끝끝내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우리보다 복지체제가 훨씬 발전한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괜시리 투정부리게 싶게만들 정도로 한 생명을 향한 극진함이 베어있는 영화
<잠수종과 나비>
너무 늦기전에 무거운 잠수종에서 탈출해야 겠다. 너무 늦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