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2:1-5,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과 헤렛 수풀로 24.7.10, 박홍섭 목사
미친 척하면서 겨우 가드에서 살아나온 다윗은 블레셋과 가까운 이스라엘 영토이며 땅굴이 많아서 숨어지내기가 좋은 아둘람으로 도망옵니다. 여기에 형제와 온 집 안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왔고, 환난을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 4백 명도 다윗에게 몰려와 일종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이들은 다윗을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망가다가 보니 여기까지 왔고 와서 보니 다윗이 있어서 그에게 자신을 의탁했을 뿐입니다.
어쩌면 교회의 모습이 이와 비슷합니다. 낮아진 다윗을 통해 아둘람 공동체가 형성되었듯이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고 높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그가 다윗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만왕의 왕이 종이 되셨고 거룩한 분이 십자가의 수치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낮아지신 주님이 이 땅에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자기 백성들을 불러모으는데 그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고전 1:26-28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아둘람 굴로 도망간 다윗과 그에게로 모여든 사람들과 거의 흡사하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아둘람 굴에 모여든 사람들처럼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 때문에 나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분들도 있고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도 있고 부유한 사람도 있고 학벌과 재산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외형이 어떠하든 교회는 영혼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와 자신을 의탁하는 영혼의 안식처라는 점에서 아둘람 굴과 그 성격이 비슷합니다.
여하튼 다윗과 400명의 사람들은 그렇게 아둘람 공동체를 이룹니다. 말이 400이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사울의 눈과 추격을 피해 계속 아둘람에 숨어지내기가 힘들어지므로 다윗은 모압으로 내려가 부모님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모압 왕에게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뒤 자신은 인근에 요새를 만들어 아둘람 공동체와 함께 머뭅니다. 에돔도 있고 암몬도 있고 다른 나라도 있는데 왜 모압입니까? 모압이 그의 증조할머니 룻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룻이 누구입니까? 모압 여인으로 유대 남자와 결혼하여 남편이 죽었고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하나님께 피하기 위하여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온 사람입니다. 환난과 마음의 원통함과 슬픔으로 가득 찬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녀를 보아스를 통해 먹이셨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룻으로 인해 다윗은 모압과 친인척 관계가 되었고 다윗은 부모와 형제를 안전하게 맡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통하여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 땅의 위험을 피해 모압까지 왔는데 왜 다시 위험한 유다로 돌아가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사람이나 다른 것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하고 살아왔을 때도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여 주셨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든 다윗의 피난처와 요새가 되어주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순종하여 다윗이 그와 함께 한 사람들과 같이 유다 땅 헤렛 수풀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그의 도망자 생활이 근 10년간 계속됩니다. 말이 십 년이지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왜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까? 계속 우리가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잠시라도 사람이나 다른 것 의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연단이고 그 연단을 통해 다윗은 시편 57편, 시편 142편을 지어서 부릅니다. 둘 다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시편 57편의 부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었을 때 지은 ‘믹담’ 시라고 되어 있고, 시편 142편은 다윗이 굴에 있을 때 지은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믹담’은 황금시, 교훈의 시 그런 뜻이고 마스길은 기억해야 할 교훈, 잊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굴과 같은 고난과 연단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고 하나님께 피하게 하셔서 황금과 같은 교훈, 반드시 기억해야 할 잊지 말아야 할 하늘의 가르침을 다윗이 영혼과 존재 속에 새겨 놓으십니다.
1대왕 사울에게는 없었고 다윗에게만 있었던 것이 광야의 연단과 고난입니다. 다윗도 사울처럼 죄악 된 본성은 똑같습니다. 다급하니까 요나단에게 사울의 본심을 알아보기 위해 거짓말을 시켰죠.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 앞에서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울처럼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사울도 두려워했고 살기 위해 가드왕 아기스에게 갔다가 신분이 발각되자 아기스도 심히 두려워해서 미친 척했습니다. 그때그때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는 은혜를 입었지만, 다급한 현실과 시험 앞에서 다윗에게도 숨겨져 있었던 불순물과 죄악 된 본성이 튀어나왔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광야로, 굴로, 데리고 가서 연단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 광야의 노래, 굴의 시편을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과 다르게 인도하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어떻게 인간이 원하는 왕과 다른지를 그의 연단을 통하여 가르쳤습니다.
시편 142과 57편을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42:1-7을 먼저 봅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를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나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나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하고 원통하고 억울할 때 하나님께 피하였다가 핵심입니다. 하나님께 피하여 그 억울함과 원통함을 하나님께 부르짖어 하나님께 맡겼다가 이 시편의 핵심입니다.
그다음 시편 57:1-11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중에 빠졌도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를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여기도 주께로 피하고 주의 날개 아래로 숨었다가 핵심입니다. 원수들이 웅덩이를 파고 그물을 치고 창과 칼과 날카로운 혀로 비방하고 모함하는 억울한 상황에서 주께 피하여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부르짖었더니 하늘보다 크고 궁창보다 높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맛보고 만민 중에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겠다는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노래와 고백이 굴과 광야와 수풀의 연단 속에서 지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로 나가지 않더라도 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마치 광야에 있는 것처럼, 굴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만 피하고 숨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시편과 우리의 노래를 만들어내실 것입니다. 우리의 믹담과 우리의 마스길을 우리 안에 담아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고백과 시편을 만들어내는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