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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46-49, 성도에게 요구되는 윤리의 결론, 8.4, 박홍섭 목사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더불어 천국 백성의 삶을 다루는 대표적인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두 설교가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한 설교이지만, 내용은 거의 흡사합니다. 구조도 비슷합니다. 산상수훈이 팔 복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운 건축자의 비유로 끝난다면 평지 설교도 사복으로 시작해서 지혜로운 건축자의 비유로 끝이 납니다. 다만 그사이에 담겨 있는 내용이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로 훨씬 분량이 많고 자세합니다.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6:20-49까지로 분량이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분량이 적은 만큼 산상수훈에 담긴 많은 내용을 하나의 선명한 주제로 압축해서 전달합니다.
그 주제가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삶의 윤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입니다. 주님은 산상설교와 평지 설교를 통해 이웃의 범위가 원수까지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면 불신자와 다를 게 무엇이 있냐면서 너희를 적대하고 해치려 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마 5:43-48, 눅 6:27-36). 너무나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요구 아닙니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 급진적인 요구의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우리는 다 죄로 인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랬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우심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녀 삼아주셨고 지금도 계속 자비와 은총을 베풀면서 자녀답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안에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너희도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여 아버지께 받은 자비를 나타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의 마지막 부분, 결론에 해당합니다. 4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여기 너희가 누구입니까? 바로 앞에서 비유로 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입니다. 그런데도 선생 노릇을 하면서 마음에 쌓은 악으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외식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주여, 주여”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비판과 정죄를 멈추고 자기 눈의 들보를 빼면서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산상수훈의 어조는 훨씬 더 강력합니다. 마 7:21-23입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은 입술로 주여, 주여 하면서도 말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가짜이며 그들은 천국 백성이 아니라 지옥의 자식일 뿐이라고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단지 행함 자체의 강조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행함보다 더 중요한 것이 행함의 근거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는 주님의 지적은 행함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나를 떠나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불법이지만 그들에게도 행함이 있었습니다. 행함은 있는데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았고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노릇도 하고 권능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내었습니다. 기도도 했고 구제도 하고 금식도 했습니다. 멋있는 설교도 했고 잘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려고 주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행함은 모두 불법이며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여, 주여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해도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입말 열면 주여 주여 하고, 기도만 하면 “주여 삼창”하면서 유난을 떠는 신앙이 아니라 조용히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고 분별하여 작은 것 하나라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 의와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은밀히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몰라주어도 원수까지 사랑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성령의 은혜를 구하여 그렇게 살아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두 집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46-49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집을 지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반석 위에 놓고 집을 지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런 기초 없이 그냥 흙 위에, 모래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두 사람 다 집을 지었습니다. 두 사람 다 행함이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기초가 다릅니다. 한 사람은 그 기초가 반석이고 다른 사람은 흙입니다. 집의 외형만 보면 이 집이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인지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두 집의 차이를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탁류에 부딪칠 때입니다. 삽시간에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면 반석 위에 짓지 않고 흙과 모래 위에 지은 집들은 아예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리고 맙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의 집을 짓는 건축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땅을 깊게 파고 기초를 튼튼히 한 뒤 반석 위에 집을 짓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렵다고 모래 위에 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짓는 집의 기초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싶다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가만히 있지 말고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라고 하십니다. 살아내되 자기만족이나 휴머니즘이나 종교적 열정이 근거가 아니라 철저하게 말씀에 근거하라고 하십니다.
마 6:1-2을 보십시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절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절도 보십시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무엇이 강조됩니까?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지 말라”입니다. 우리 신앙과 삶의 기초가 사람에게 보여서 칭찬과 영광과 상을 받으려는 동기가 되면 외식과 자기 의로 흐릅니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건축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도 그런 동기로 행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사랑의 삶을 사는 것 같고, 행함이 있는 것 같지만, 그 행함의 동기가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비가 오면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준공검사를 맡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떤 건축자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지은 집은 어떤 집입니까? 모래 위에 지은 무너질 집입니까? 아니면 반석 위에 지은 든든한 집입니까? 만약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면 비가 오고 창수가 내리고 바람이 불기 전에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합니다. 적당하게 몇 곳만 수리해서 살 생각하지 말고 완전히 새로 지어야 합니다. 한 걸음 한걸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자들의 삶이고 그것이 이 세상이라는 무대를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입니다.
오늘 나의 신앙과 삶이 말씀에 근거한 지혜로운 건축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무너질 모래 위에 세우는 어리석은 건축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16-23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도에게는 두 소욕이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이 있고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은 소욕이라고 했지만 원어의 뜻은 강력한 욕망, 혹은 열망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자기를 위한 강렬한 욕망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강렬한 열망입니다. 이 강렬한 두 욕망이 성도 안에서 서로 대적하며 부딪칩니다. 성령의 열망은 육체를 거스르고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육체의 일들이 나타나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자기를 위해 살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이라는 육체의 일이 나타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자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의미를 넘어 판별식입니다. 지금 너희들의 신앙과 삶이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서 자신을 점검하라는 내용입니다. 이차 방정식의 판별식은 b2-4ac입니다. 이 판별식에 방정식을 넣어서 그 결과가 양이면 실근을 가지고 판별식이 0이면 중근을 포함하는 실근, 판별식이 음일 경우는 2개의 허근을 가집니다. 판별식을 보고 이차 방정식의 근을 분별하듯이 지금 우리의 삶이 어떤 내용과 방향과 목적을 향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을 나타내면 자기를 위해 사는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고,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성령의 소욕으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판별식이 필요합니다. 내가 짓는 집이 어떤 기초위에 지어지고 있는지, 반석 위에 짓는지, 모래 위에 짓는지, 이 말씀으로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의 삶에 나타나는 결과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육체의 일이라면 어떤 명분, 어떤 행함이 있더라도 불법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고 그 삶을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성도의 윤리가 실천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는 것, 구제와 금식과 기도의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동기와 기초입니다. 사람 앞이냐 하나님의 말씀 앞이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느냐? 성령을 소욕을 따르고 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다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