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9:40-20:26, 세바의 반란, 26.8.5, 박홍섭 목사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고 다윗이 왕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이전보다 더 강력해진 왕권으로 태평성대를 이루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복귀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를 놓고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으며 이는 세바의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세바는 베냐민 지파 비그리의 아들로 북이스라엘의 유력한 인물 중의 하나였고 다윗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불량배였습니다. 여기 불량배라는 말은 깡패라는 뜻이 아니라 상당한 세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서 선동하는 악한 정치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양각 나팔을 불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에게 우리 몫은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우리의 유업은 없으니, 이스라엘은 각자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세바의 이 선동에 거의 모든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서 돌아서 그를 따르게 되었고,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유다 사람들만 다윗을 따르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스라엘이 다시 세바의 반란으로 분열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다윗은 즉시 요압 대신 새로운 군대 장관으로 임명한 아마사에게 삼 일 내에 유다 사람들을 모아서 이를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4).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아마사는 다윗의 명령이 있음에도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5). 결국, 다윗은 요압의 동생 아비새에게 진압을 맡기고 그 과정에서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고 동생 아비새와 함께 세바를 추격합니다. 세바는 자신의 세력이 있는 벧 마아가 아벨의 비그리 사람들에게로 가지만, 한 무명 여인이 아벨 성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바침으로 세바의 반란이 진압됩니다. 이후에 요압은 그 공으로 다시 죽은 아마사의 자리인 군대 장관으로 복귀했다는 게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한 사람의 영웅담이 아닙니다. 영웅담은 “고통과 역경을 극복한 주인공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서사는 그런 영웅담과 거리가 멉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수습해서 이제 겨우 한숨을 돌렸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세바의 반란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들을 잃은 큰 고통을 겪고 다시 왕의 자리로 돌아온 다윗에게 더 강력한 왕권과 태평성대의 세월을 주시지 않고 세바의 반란이라는 또 다른 반란을 허락하셨고, 그 과정에서 요압이 다시 군대 장관으로 복귀하게 되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계속 허락하십니까? 요압은 다윗의 허락도 없이 다윗이 임명한 군대 장관 아마사를 죽이고 세바를 추격했습니다. 지혜로운 한 여인의 개입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으니 망정이지, 아마사가 속한 유다 지파 전체가 다윗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었을 정도로 위험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요압도 거의 반란에 준하는 행동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처한 현실입니다.
다윗이 맞았던 현실을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반란을 진압했는데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고 그 반란을 잠재웠는데도 여전히 반란을 꿈꾸는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바와 세바를 따랐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이 죽어서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 찾아왔지만, 명분이 생기자 여지없이 변절하고 다시 다윗을 버리고 세바의 반란에 동참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이들이 세바가 죽었다고 다시 다윗을 등지지 말라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하나가 될 것처럼 보였던 나라는 다시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실제로 나중에 다윗이 죽자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고 맙니다. 그때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할 때 세바가 했던 말과 거의 똑같은 말로 선동했습니다. 왕상 12:16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윗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분명히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압살롬의 반란을 해결했고, 이어진 세바의 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진압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현실은 계속 힘이 듭니까? 왜 계속 어렵고 계속 고달프고 계속 갈등이 있고 편안하지 않습니까? 다윗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현실을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의 자손인 야곱도, 야곱의 아들 요셉도, 이스라엘의 영웅적인 지도자 모세도 그랬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그랬고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도우심도 맛봅니다. 그런데 현실은 꽃길이 아닙니다. 여전히 문제투성이고 어렵고 만만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드리고 찬송하고 예배할 때는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누리지만 돌아서서 현실에 부딪치면 힘들고 피곤한 일상이 계속됩니다. 껄끄러운 사람도 여전히 생기고 팍팍하고 고달픈 오늘이 금방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NCD 이론처럼 건강한 교회는 늘 성장합니까? 교리가 건강하고 믿음이 건강하고 구조와 제도가 건강하면 자연스럽게 교인들이 늘고 재정이 부족함이 없어지고 세상 가운데 영향력도 증가시키면서 성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건전한 교리를 가진 성도들이 있고 건강한 지도자가 있는 교회도 눈에 보이게 성장하거나 아무 걱정 없는 편안한 신앙생활만 이어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교회인데도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고 여러 어려움이 계속 생깁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한 한 나라가 아닙니다. 이들은 구약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안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열방의 정신을 따르는 세바와 같은 불량배가 늘 있었습니다. 세바같은 사람에게 쉽게 선동되는 어리석은 무리들도 늘 있습니다. 군대 장관 자리에서 내려앉은 뒤 기회가 왔을 때 세바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아마사를 죽이고 다시 그 자리에 올라선 요압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교회인데 그렇습니다. 천사들만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 모든 현실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허락 안에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기대와 다릅니까? 하나님의 통치 방향과 목적은 우리의 오늘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크리스챤’이라는 사람이 순례의 길을 갑니다. 그는 십자가의 언덕에 올라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죄 짐을 내려놓는 구원을 경험합니다. 죄사함의 은총을 받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새 옷을 입고 이마에 구원의 표와 인을 받습니다. 기쁨에 못 이겨 껑충껑충 뛰면서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 부분이 천로역정 전체의 1/3입니다. 천로역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2/3인 영광의 천성에 들어가기 위한 진짜 여정이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구원받기 위해 가는 길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 천로역정의 2/3인데 꽃길이 아닙니다. 유혹이 있고 싸움이 있고 고통과 괴로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성도는 그 길을 믿음으로 가면서 계속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며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다른 종교는 고난을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악으로 봅니다. 고난이 끝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고진감래가 세상 종교의 결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도 고난의 삶을 살고 신자도 고난의 삶을 산다고 가르칩니다. 고난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신앙의 목적은 고난을 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신다고 말합니다.
약 1:2-4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여러 가지 시험을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빚어집니다. 고난을 누가 좋아합니까? 시험을 기쁘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합니까? 그것도 온전히 기뻐합니까? 그 시험의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면서 인내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인내는 우리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시험을 만나면서 기도와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 속에서 성도는 야고보서의 가장 큰 주제인 참된 믿음인 경건과 하늘의 지혜를 구비하는 사람으로 빚어져갑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믿음이 견고해지며 정금과 같이 연단 되어 썩어 없어질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집니다. 오늘 다윗이 경험하는 어려움과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현실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하여 순례하는 나그네들입니다. 그 순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갈 때 함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주님을 잘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세바와 같은 불량배의 선동과 요압처럼 자기 욕심으로 공동체를 힘들게 만드는 현실이 생길 때마다 기도와 인내로 하늘의 지혜를 구하고 귀신도 떠들고 말하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환난 중에 돌보는 살아 있는 믿음,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가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