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드록의 아침.
하이캠프에서 날듯이 내려와 란드룩 롯지에 도착하니 더 이상 움질일 힘도 없다.
커다란 롯지에 나 혼자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뜨거운 국물이 있는 저녁을 먹고 나니 정신이 돌아온다.
대충 주변을 정리하고 약까지 챙겨 먹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제 저녁무렵에 도착한 란드룩은 건너편 간드룩에 비해 소박한 네팔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엄청난 내리막 계단과 비탈을 무지막지하게 내려왔는데 무릅에 이상이 없는게 신기한 아침이다.
하룻만에 고도를 3,000m 가까이 내린 탓인지 약한 저산증 증세가 나타난다.
뭐 다시 올라가면 나아질 문제니.
롯지 마당에서 바라본 ABC Trek 쪽은 안나푸르나 남봉과 히운출리가 장엄하게 서 있고
앞쪽으로 시누아, 촘롱, 지누단가 한눈에 들어 온다.
눈 높이로 보이지만 거기를 가려면 깊은 계곡을 따라 모디콜라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
아침은 네팔누들을 시켰는데...
30분쯤 걸려 나온 것은 네팔라면.
결국 라면 하나먹고 6시간을 걸여야 한다.
타다파니를 출발한 일행이 촘롱에 도착한다고 알려준 시간 12시-12시30분경.
7시에 출발을 한다해도 5시간만에 주파를 해야 한다는 계산.
나보다 항상 뒤에 식사를 하는 포터 솜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건너편에 촘롱을 째려보며 다짐한다. 기달려라. 내가 간다.
지누단다에서 촘롱으로 오르는 수많은 계단들이 커다랗게 다가오며 이승에서 저승으로 향하는 계단처럼 느껴진다.
"어서와!! 뜨거운맛을 봐야지."
소박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정겨운 집들을 지나쳐 마을을 빠져 나오니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여유가 있으면 천천히 마을의 돌아보며 아침나절을 즐기고 싶었으나 삭제당한 여유에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포크레인으로 대충 밀어서 만든 길을 걷기가 만만치 않다.
결국 그 길을 따라가다가 트래일을 놓치고 말았다.
가다보니 포크레인 뒷꽁무니. 오도가도 못하게 된 상황.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희미하게 보이는 길을 따라 길을 개척하며 기어 올라 옛길을 찾았다.
"제기랄, 공사를 하면 안내판이나 좀 설치하지."
하긴 네팔어로 써 놓으면 내가 알기나 하겠냐마는.
다리를 건너며 아래서 굉음을 내고 있는 포크레인에 욕을 한바가지 퍼붓는 걸로 소심한 복수을 한다.
계곡 아래 모디콜라까지 내려왔다.
적설량이 적어서 인지 계곡의 물흐름이 빈약하다.
산위에 눈이 좀 쌓여 있어야 풍광이 아름다운데. 아쉽다.
생각보다 빠른 시간에 내려와 다행이다.
계곡 사이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남봉을 올려다 보며 한 숨 고른다.
"그래 뭐있냐. 이 정도면 되지. 참 좋다."
몸상태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다.
이제 오르막.
일행은 타다파니를 출발해 추일레를 향해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틀 반의 걷기로 소모된 체력과 아직 적응단계인 몸상태로 많이 힘들것인데.
추일레 이후에는 깊은 계곡을 건너와야 하는데 쉽지 않은 운행일 것.
"나만 힘든게 아냐."
예전에 뉴브릿지였던 다리가 낡아 옆에 새로운 뉴브릿지가 튼튼하게 새로 놓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이제 무지막지한 오르막의 연속.
숨을 크게 들이 쉬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
그러나 산자락에 걸려있는 경사로는 그 모습만으로 주눅들게 한다.
경사로를 따라 숨이 턱에 차서 올라온 산등성이에서 건너편 지누단다가 빤히 보인다.
ABC Trek에서 지누단다는 종착지로 지친몸을 다스릴 온천과 편안한 잠자리가 있는 낙원.
그러나 지금은....
히말라야에서는 빤히 보이는 저곳이 최소 반나절, 하룻거리다. 조금 멀리보인다 하면 3-4일 거리.
뉴브릿지 마을은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 적막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며 체력이 급격히 소진된다.
"그냥 발목 다쳤다고 하고 지누단다에서 퍼질까..."
"일행은 ABC 갔다 오라 하고, 난 온천에 몸 담그고 한가롭게 쉴까?"
"ABC야 몇 번이나 갔다 왔는데, 또 갈 필요가 있겠어."
"마르디 히말 Trek에서 그 개고생을 했는데..."
산등성이를 넘어 계곡으로 내려가며 유혹과 싸운다.
하지만, 지누단다로 들어가는 계곡에 길게 걸린 다리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달콤한 유혹은 일장춘몽이 된다.
오호..
예전에는 저 계곡을 내려갔다 올라와야 했는데 고맙게도 그런 수고로움을 덜었다.
다리 입구에 배낭을 던져 놓고 그냥 널부러진다.
란드룩에서 3시간만에 왔으니 조금 빠르게 도착한 셈.
다리옆에 조촐하게 음료와 간식거리를 파는 이쁜이, 포터 솜과 간식을 나눠 먹으며
알량한 영어와 네팔어, 손짓몸짓으로 수다를 떤다.
레몬생강차까지 한 잔 들이키고 나니, 바닥을 향하던 체력이 조금 올라오는 느낌.
자! 가자.
이왕이면 촘롱에 내가 먼저 도착해서 일행을 기다려야 폼이 나지 않겠는가.
다른건 몰라도 폼은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폼생폼사인데.
긴 서스펜션 다리를 건너자 드디어 무지막지한 계단이 앞을 막는다.
이제부터 두 시간은 저 끝없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지나치는 지누단다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번듯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소박하게 예쁘던 마을의 정취이 사라졌다.
여러 추억이 깃든 곳인데 아쉽다.
곳곳에 서너 층짜리 건물을 짓는 공사도 한창이다.
시즌 막바지라서 그런지, 내려오는 여행자는 거의 없고 현지인만 간간이 마주친다.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오른다.
중간쯤 오르고 나니 체력이 바닥을 치고, 젊은 친구들이 나를 제치고 쿵쿵 지나간다.
"그래 니들은 젊어서 좋겠다. XX"
"나마스테" 하지만 거의 신음소리처럼 나온다.
그냥 지나가지 왜 자꾸 말은 붙이냐..
오르막 조그만 티샵에서 정신줄을 놓고 널부러지니,
포터 솜이 걱정된듯 위를 가르키며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위로를 한다.
상품 진열대를 보니 "레드불" 이 보여 손가락으로 저거 저거하니 눈치 빠른 샘이 얼른 가져다 준다.
레드불을 완샷으로 처리하고 의자에 기대 앉아 정신줄을 잡는다.
일행이 추일레를 지나 계곡을 명랑하게 건너 오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제는 레드불 파워다.
무념무상으로 오르고 또 오르니 드디어 촘롱 입구.
나를 제치고 먼저 올랐던 젊은 네팔인 무리들이 길을 막고 있다 길을 내주며 박수를 친다.
헐~~지금 내 몰골이 어떻다는거지.
트래킹을 시작하면 몸단장은 거의 포기하게 된다.
수염도 자라는데로 놔두고,
머리는 떡지는데로 놔두고,
씻는 건 아주 최소한으로,
그리고 절대 거울을 보지 않는다.
왜냐면 그것이 마음이 편하거든.
좋은 말로는 자연의 품속에 동화되는 것이고
사실 몸단장을 신경을 쓰는 것조차 사치가 되는 상황이니까.
어하튼 죽을둥 살둥 올라온걸 감추고 최대한 우아하게 폼나게 손을 흔들어 주고 지나치는데
롯지 입구에 “김치찌개 합니다.”라는 간판이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다.
마르디 히말 트랙엔 김치찌개 파는 롯지가 없었는데.
궁시렁 궁시렁 하면서 마을길을 돌아 나가니 먼저 간 포터 솜이 익숙한 롯지 마당에서 손을 흔든다.
아! 다 왔다.
촘롱.
늘 이용하던 롯지라 정겹다.
아래 게르만브레드는 문을 닫았다.
애플파이는 어디서 사지?
일행들에게 애플파이 맛보여 준다고 했는데, 공수표 날리게 생겼네.
몸상태는 파죽이 되서 생각나는게 ...
포터 솜이 낯선 네팔인과 다정하게 담소를 하는데 내가 다가가니 다들 친근하게 인사를 한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네팔스텝 중에 포터대장과 포터들이다.
롯지 안쪽에 가니 주방팀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포터 솜이 일행은 많이 늦을듯 하다고 한다.
"우씨..나 배고프다고.
라면먹고 5시간 넘게 뛰어 왔다고"
마실정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