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원수는 석가모니” 성철 스님 아버지의 분노
아이의 아버지 찾으러 사찰로 온 여인
#풍경1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에는
2500년 전에
붓다가 머물던
사찰의 풍경은
보이질 않습니다.
대신
마음과 이치와
깨달음에 대한
본질적 메시지가
담겨 있지요.
초기 불교 경전인
『잡아함경』을 읽어 보면
다릅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풍경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아하,
그때는 이랬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풍경들 말입니다.
그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광경이
하나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가슴 아픈 광경이고,
어찌 보면
궁리할 거리를 던져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붓다가
인도 북부의 사위성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에
머물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찾아와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스님들 중에서
아이의 아버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풍경2
당시
그 절에는
상가마지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내와 아이를 뒤로하고
머리를 깎고
출가했습니다.
아내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겠지요.
그 대목을 읽는
요즘의 우리도
황망할 정도니까요.
아니,
출가를 하려면
결혼하기 전에 하든가,
아이까지 낳았는데
어떻게
이기적인 출가를 했을까.
이런 생각이
절로 들지요.
물론
2500년 전
고대 인도의 관습과 전통도
있었겠지요.
그래도
아내가 느끼는
배신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 여인은
사찰 안에 있는
남편의 방 앞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걷기 명상을 하고 있던
남편을 만났습니다.
아내가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이 아이는
어린 아기입니다.
당신이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누가 길러야 합니까?”
비구 상가마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똑같은 말을 던지며
두 번, 세 번
따졌습니다.
상가마지는
그래도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아내가 말했습니다.
“두 번, 세 번이나 말해도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보지도 않는군요.
나는 이제
아이를 두고 가겠습니다.”
그 여인은
정말로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이 아버지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그래도
상가마지는
아이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뒤를 돌아
그걸 지켜보던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이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구나.
필시 얻기 어려운
현자의 도리를 얻었을 터이다.
훌륭하신 사문이여,
반드시 해탈을 얻으시오.”
그 말을 남긴 채
여인은 아이를 안고서
돌아갔습니다.
#풍경3
갑론을박
여러 의견이 있을 법한
일화입니다.
화를 내며 따지는
사람도 있을 터이고,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는
사람도 있겠지요.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비구 상가마지는
참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석가모니 붓다도
똑같은 처지였습니다.
붓다는
왕위를 이을
외아들이었는데
부왕을 배신했고,
아리따운 아내와
태어난 지 1주일밖에 안 된
갓난아들을 뒤로 한 채
새벽에 궁에서 나와
출가를 했습니다.
비구 상가마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게 없는
처지였습니다.
상가마지를 보면서
붓다는
동병상련을 느꼈을까요.
당시
그 풍경을 본
붓다는
이런 게송을 남겼습니다.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가는 것도 슬퍼하지 않는다.
세간에서 말하는
화합에서 해탈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니
나는 저 비구를
진정한 수행자라고 말하네.”
#풍경4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속의 인연을
뛰어넘는 일 말입니다.
요즘은
통신이 발달해
출가자라고 해도
휴대폰으로
속가의 안부를
어렵지 않게
물을 수 있습니다.
또 짬이 날 때는
부모님을 찾아뵐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달랐습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통신도 없으니
일단 출가하면
자식 얼굴을 보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성철 스님도
그랬습니다.
뼈대 있는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성철은
집안의 대를 이을
장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교 대신 불교를 택했고,
머리를 깎고 출가해
스님이 됐습니다.
아버지의 배신감은
무척 컸습니다.
오죽하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성철 스님도
출가 전에
결혼한
몸이었습니다.
아내와 딸을 뒤로 한 채
머리를 깎고
집을 떠났습니다.
출가한 후에
아들 있는 곳을
수소문한 끝에 찾아온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며
쫓아내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참 모진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비구 상가라지와
성철 스님은
왜
그 모짊을 감당했을까요.
거기에는
깊고 강력한
목마름이 있지
않았을까요.
#풍경5
비구 상가마지에게도,
성철 스님에게도,
붓다에게도
다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에게는
존재의 이치를 모른 채
살아가는
세속의 삶은,
이쪽으로 가든
저쪽으로 가든
어차피
오보십보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모질게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직진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의 바닥을
뚫고서
존재의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는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가족에게
법을 전했습니다.
아들 라훌라도,
아내 아소다라도
붓다의 제자로 출가해
결국
아라한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이게
붓다가 줄 수 있는,
진정으로
큰 선물이 아니었을까요.
성철 스님의 아내도,
외동딸인 수경(불필 스님)도
훗날
머리 깎고 출가해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스승으로,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고서
말입니다.
저는
눈을 감고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아이를 안고 선
여인과
걷기에 집중하는
젊은 비구.
그들 사이에 흐르는
삶의 애환과
그 애환을
본질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구도심.
참,
애잔한 물음표와
명징한 느낌표가
동시에 흐르는
풍경입니다.
2500년 전에도
말입니다.
붓다의 한 마디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가는 것도
슬퍼하지 않는다.”
붓다는
제자들을 향해
길을 가라고 했습니다.
그건
즐거움의 길도 아니고,
괴로움의 길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중도(中道)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즐거움에도
괴로움에도
물들지 않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에
적멸의 고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백성호의 붓다뎐
[출처:중앙일보] 백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