㉕ 하늘나라는 왜 철부지에게만 드러날까
예수 이후 20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앞으로 2000년도 그렇게 훌쩍 흐를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간다.
우주의 눈으로 보면 개인의 삶이란 참으로 순간이다.
그래서 더욱 간절한 것일까.
영원에 대한 갈망, 신의 속성에 대한 염원 말이다.
갈릴래아(갈릴리) 호수 근처로 내려왔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호숫가를 걸었다.
갈릴래아 근처의 어느 동네였을까.
예수는 그런 ‘영원’이 누구에게 나타나는지 설한 적이 있다.
예수는 성령(holy spirit) 안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서 10장 21절)
예수는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어린아이 마음의 철부지에게 드러난다고 했다. 백성호 기자
‘나의 눈’과 ‘예수의 눈’은 다르다.
우리는 지혜와 슬기가 무기라고 생각한다.
지혜와 슬기를 통해 ‘영원’을 성취한다고 믿는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지혜롭다는 자들(the wise)과
슬기롭다는 자들(the intelligent)에게는 이것을 감추신다”고 했다.
지혜와 슬기를 통해서는 성령 속에 잠길 수가 없다고,
신의 속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지혜롭다는 자들은 ‘나의 지혜’를 말하고,
슬기롭다는 자들도 ‘나의 슬기’를 말한다.
나의 지혜가 뭘까.
에고의 지혜다.
나의 슬기가 뭘까.
에고의 슬기다.
제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이 있고,
그러한 정보와 지식을 활용하고 있다 해도 에고의 울타리 안에서 맴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갈망=집착’이라 생각한다.
찬찬히 짚어보면 그렇지 않다.
집착을 갖고 갈망할 수도 있고,
집착을 내려놓고 갈망할 수도 있다.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집착 없이 갈망하라는 뜻이다.
혜능 대사는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깨달음의 법맥을 온전히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는 세상을 ‘깨달음의 눈’으로 봤다.
그 눈에는 빤히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갈망할 때 어떤 식으로 갈망해야 하는지.
어떻게 갈망해야 그 갈망이 이뤄지는지 말이다.
소망은 나를 떠나가야 한다.
그래서 저 우주로 녹아들어야 한다.
그래야 소망과 우주가 하나가 되어 작동한다.
그런데 소망에 집착이 달라붙어 있으면 어찌 될까.
나를 떠나가지 못한다.
자신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강하게 집착할수록 강하게 브레이크를 거는 셈이다.
그래서 강력한 소망보다 집착 없는 소망이 더 잘 작동하는 법이다.
하늘에 닿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사람들은 무언가를 쌓는다.
돌을 놓고,
그 위에 또 돌을 놓고,
그 위에 또 돌을 놓는다.
그렇게 층층이 쌓아올리며 하늘로 손을 뻗는다.
나의 지혜와 나의 슬기도 마찬가지다.
지혜와 슬기를 쌓고 쌓아 ‘신이 속성’에 닿으려 한다.
성경에도 그렇게 쌓아서 올라가는 탑이 등장한다.
그게 바로 ‘바벨탑’이다.
그런 탑은 하늘에 닿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 해도 결국 땅에 머물기 때문이다.
예수는 ‘신의 속성’이 바벨탑이 아니라 철부지에게서 드러난다고 했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철부지’는 ‘nepios(네피오스)’이다.
‘어린이’라는 뜻도 있고,
‘마음이 담백한 사람,
마음이 단출한 사람(a simple-minded)’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 담백한 마음이 될까.
탑에서 내려올 때다.
쌓고 쌓아 올리던 돌들을 하나씩 빼면서 내려올 때다.
그렇게 낮아지고 낮아지다 맨 아래 주춧돌까지 빼버릴 때 무엇이 드러날까.
그렇다.
비로소 하늘이 드러난다.
나의 지혜와 나의 슬기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하늘이 드러난다.
하늘과 하나가 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복음서 10장 22절)
예수는 왜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라고 했을까.
예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같아서다.
그래서 통하고, 통하니까 안다.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는 아들을 안다.
예수 당시에는 신의 속성을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세례 요한조차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복음서 11장 3절)라며
헷갈려했다.
눈 밝은 세례 요한이 그랬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예수의 제자들도 그랬다.
‘예수의 속성’을 몰라봤다.
그러니 바리사이 등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상상도 못 했을 터이다.
예수의 속성과 신의 속성이 통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틱낫한 스님의 ‘서로 안에 있음’이라는 시가 있다.
영어 제목은 ‘Inter being’이다.
예수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예수를 아는 까닭도 ‘Inter being’이다.
그것을 예수는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고 표현했다.
틱낫한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해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구름과 강과 더불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 또한 강으로 들어간다
구름과 강과 더불어 해로 들어간다
우리가 서로 안에 들어가지 않는
그런 순간은 없다
그렇지만 내 안으로 들어오기 전,
해는 이미 내 안에
구름과 강과 더불어 내 안에 있었다
강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이미 그 안에 있었다
우리가 서로 안에 들어가 있지 않는
그런 순간은 없었다
그러니, 알아다오
네가 숨을 멎는 그 순간까지
내가 네 안에 들어 있음을.
―틱낫한, 「서로 안에 있음」(『영혼을 깨우는 시 읽기』, 교양인, 2014) 중에서
예수도 우리에게 말한다.
들어오라고.
내 안으로 들어오라고.
그것을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표현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었던 신의 속성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단 한 순간도 우리와 떨어진 적이 없다.
품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
나의 지혜로 인해, 나의 슬기로 인해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철부지가 되어라”고 했다.
갈릴래아 호수까지 내려왔을 때
나는 틱낫한 시의 마지막 구절을 몇 번이나 소리내어 읊었다.
그러니, 알아다오
네가 숨을 멎는 그 순간까지
내가 네 안에 들어 있음을.
지금 이 순간, 예수도 우리에게 말한다.
“네가 숨을 멎는 그 순간까지 나는 네 안에 들어 있다.”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