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3> 최종석
“박제된 깨달음 보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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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팔정도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성화한 청원스님의 ‘녹원전법상’ 조각. |
깨달은 자의 가르침을 따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을 불교라고 한다. 그 길을 따라 가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한다. 그 수행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 아니면 수행자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마치 대학입시에 합격하려면 이런 방법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참고서처럼 서로 이 방법이 좋다 저 방법이 옳다면서 주장하고 있다. 깨달음은 갑자기 오는 것이다. 아니다 점진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는 등 등…. 정말 무엇을 깨달음이라고 하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처음으로 깨달을 때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은 자가 이미 깨달아 놓은 것을 깨우치는 것일 뿐이다. 만약에 엉뚱하게 무엇을 깨우쳤다고 하면서 새로운 것을 내놓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아마도 새로운 종교의 교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혹시 깨달음을 종교적 신비체험과 혼동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에 깨달음을 타심통이나 천안통과 같은 초능력을 얻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불교의 시작은 다른 종교처럼 신화적이거나 가설적인 출발점을 기초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을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깨닫겠다기보다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따라 깨우치겠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부처님의 첫 번째 깨달음을 우리는 벌써 잊고 있는 것이다. 네란자라 강가에서 극심한 육체적 고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마치 차력사가 초능력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육체적 고행을 포기한 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깨달음이 아닐까? 그런데도 육체적 고행을 수행이라고 여기고 육체적으로 갖은 고통을 지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법’ 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고 고(苦)라는 속성을 지녔는데 그것들은 다 연기되었기 때문에 그런 속성을 지니게 된 것이고, 우리가 가야할 것은 바로 이 세계에 머물면서 끊임없이 윤회하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나서 무상과 무아와 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존재는 변하지 않는 아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모여서 이루진 것이기에 변치 않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존재하려고 끊임없이 집착하고 힘을 들이고 있다는 것, 이런 세계의 속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영원한 소멸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그 열반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길을 팔정도라고 한다.
무엇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느냐,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안한 말씀이지만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하고 질문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연기법을 뒤로하고 불교 고유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방법으로 그 체험을 얻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들릴 뿐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라고 질문한다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행복하고 평화롭게 될 수 있다는 말씀은 뒷전으로 하고 조성택교수가 지적한대로 ‘박제된 깨달음’에 매달려서 세월을 낚는 일만 하겠다고 들릴 뿐이다.
이제는 깨달음 타령을 그만하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실현시키는 일에 몰두할 때이다. 여기에서 팔정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팔정도는 열반으로 가는 길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혜와 실천의 복합적인 길이다.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것을 뜻한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즉 깨우치기 위한 수행법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팔정도는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의 삶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깨우치려는 사람들이 따라가는 길이다.
팔정도는 열반으로 가는 길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천법
부처님 가르침 우리 시대 언어로 새롭게 이야기되어야
정견(正見 samyak-di: 바른 견해)를 보자. ‘진리를 향해 마주봄, 무아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결단’이다. 윤리적 규범의 기반은 먼저 근본적인 진리를 향한 인식에 있다. 그 출발은 곧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자각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연기의 원리를 찾아낸 부처님의 깨달음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 진리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정견이다.
정사(正思 samyak-sakalpa: 바른 생각)이다. ‘진리를 항상 그리워함, 진리를 향한 끊임없는 쏠림’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했으면 그 진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것을 정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진리에 대한 그리움으로서, 진리를 내 안에 품겠다는 도덕성의 내면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sam-kalpa라는 말을 살펴보면 sam이 ‘함께’의 뜻을 지녔고 kalpa는 ‘맞추다’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아 정사유는 부처님의 진리에 ‘나의 생각을 맞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리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 즉 진리에 나의 생각을 쏠리게 하여 고정시키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됨을 말한다. 이것을 올바른 생각이라고 한다.
정어(正語 samyak-vc: 바른 언어)이다. ‘진리 안에서 말의 참뜻을 살핌’는 일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인간의 내적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온화하고 평온한 언어를 사용했다. 언어는 곧 진리의 강을 건너게 하는 배와도 같다. 정어는 부처님의 진리에 맞추어서 말의 참뜻을 깊이 자각해야 하고, 다시 진리를 깨닫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써 말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진리를 향한 쏠림과 그리움의 표현은 올바른 말이 아닐 수 없다.
정업 (正業 samyak-karma-anta: 바른 직업)이다. ‘늘 깨어 있는 행위’이다. 진리 안에서의 올바른 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 지금껏 정업이 계율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정업은 깨어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명(正命 samyak-jva: 바른 생활, 바른 직업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의식화된 생활’이다. 정명은 바른 생활, 또는 바른 직업을 통한 바른 의식주라고 해석되어 왔다. 이것은 앞의 바른 정업에 따른 자연스런 사회지향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으로 의식화된 생활, 바른 가치관을 갖고 진리를 생활 속에서 체현하려는 것이 바로 정명이라고 볼 수 있다. 진리의 생활화는 도덕의 완성이고 그것은 바른 생활이다.
정정진(正精進 samyak-vyyma: 바른 노력)이다. ‘자신의 해탈뿐만 아니라 곧 이웃과 사회를 위한 노력과 관심’을 말한다. 종교적으로 의식화된 생활은 자신의 해탈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참다운 봉사와 깊은 관심 그리고 그에 맞는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정진은 그렇게 올바르게 방향을 잡고 노력함을 뜻한다. 지금까지의 다섯 가지 연결고리가 옳고 당위적인 것이며, 열반으로 이끌어 가는 길이라 해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정념(正念 samyak-smti: 바른 기억)이다. ‘진리를 향한 열정의 현재성’으로 해석해 본다. 정념은 바른 기억이라고 해석해 왔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 현재성을 지닐 것을 말한다. 진리에 대한 열정의 현재성은 시들지 않고 늘 새롭고 지루함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진리를 향한 기쁨과 아름다움이 항상 새롭게 다가올 수 있도록 그 새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 이렇게 항상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야말로 바른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종교적 실천, 곧 구원에 이르기 위한 실천은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뒤로 미루고 주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정정(正定 samyak-samdhi: 바른 집중, 바른 삼매)이다. ‘진리의 체현’이다. 도덕성의 절정은 마음의 집중인 깊은 삼매로 이끈다. 내 마음의 동요가 없는 진리와의 만남은 일치라고 말할 수 있다. 바른 삼매라는 의미는 진리와 일치된 삶을 뜻하는 것이고 열반이다. 열반은 살아 있는 동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진리의 체현된 모습이다.
지금까지 팔정도가 진리의 체현을 향한 길로서 서로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살펴보면서 현대적 해석을 해보았다. 이와 같은 해석이 시도되어 팔정도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이해의 지평이 열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 시대의 언어로 자꾸 새롭게 이야기되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도 불성이 있다고 하면서 하늘의 그 많은 별들에 대해서는 왜 무관심할까? 깨달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폭을 넓혀갈 필요가 있음에 분명하다.
최종석/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67호/ 9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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