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23. 바이샬리.파트나의 제 2.3의 결집
제2결집지엔 힌두교 사원만 덩그라니…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기 위해’ 인도에 온 지도 벌써 20여일 지난 2002년 3월24일. 서서히 인도 대지에 적응해 가던 그 때 〈유마경〉의 무대 바이샬리를 찾았다. 원숭이들이 부처님을 위해 연못을 파고, 부처님께 꿀을 공양한 곳 바이샬리. 그 바이샬리에 24일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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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사원 정원으로 변한 제2 결집지 > |
사진설명: 바이샬리 남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제2 결집지는 현재 힌두교 사원의 정원으로 변했다. |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서 출발해 바이샬리에 도착하니 시간은 오전 11시경. 높이 솟은 아쇼카석주가 있는, 대림 중각강당으로 추정되는 곳을 먼저 보았다. 이어 부처님 사후 제2결집이 거행된 장소를 찾았다. 바이샬리 남쪽 4km 지점에 위치한 제2결집지는 이미 힌두교 사원으로 변해 있었다. 힌두교 사원이 들어선 모습을 보는 순간 참으로 허망했다. 힘들게 인도까지 찾아 왔더니, 인도에 불교가 희미해졌다는 소식을 못들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확인하고 보니 너무나 참담한 기분이었다.
‘十事논쟁’이 제2결집 촉발
〈선견율비바사〉에 의하면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100년 된 때에 바이샬리의 바지풋타카 비구가 ‘열 가지 비법’(十非法)을 일으켰다. 소위 ‘십사(十事)논쟁’이 그 것인데, “금이나 은을 신자로부터 받는 것은 괜찮은가”가 가장 큰 쟁점이었다.
당시 동인도 바이샬리 교단에서는 비구들이 신자로부터 금은을 받아 분배하고 있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그 즈음 율에 철저한 야사와 카붓다 스님 등이 이를 보고, 불법(不法)이라고 비난했다. 바이샬리 비구들은 승가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야사를 ‘무엄하다’며 오히려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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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힌두교 사원의 정원으로 변한 바이샬리 제2결집지에 있는 조그만 봉헌스투파. |
야사는 코삼비·마투라 같은 중인도·서인도의 유력한 교단의 스님들에게 사정을 호소했다. 결국 바이샬리에서 동인도·서인도의 유력한 스님들 700여명이 모여, 율(律)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고, 경전을 편찬했다.
야사 스님이 서인도 스님들에게 구원을 요청했기에, 동·서 비구의 싸움이 되었던 것 같지만, 바이샬리 비구들 중에서도 10사를 반대한 스님들이 있었다. 때문에 “십사논쟁은 계율을 융통성 있게 지키고 예외를 인정하려고 하는 관용파 비구와 끝까지 계율을 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엄격파 스님들 간의 대립이었다”고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해석한다. 부처님이 입적한 지 100년쯤 되면 승가의 확대와 함께 스님들의 수도 늘어나고 사고방식 차이도 있기에, 교단 내 대립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논쟁 결과 스님들은 바이샬리 비구들의 행위를 모두 불법(不法)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비구들이 많았다. 이로인해 교단분열은 서서히 진행된다. 결정에 승복하지 않은 스님들이 모여 대중부(마하상키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단은 이로써 상좌부·대중부로 분열되는데, 이것을 소위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사실 대중부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참여자의 수는 대중부가 많았던 것 같다. 계율을 탄력적으로 해석하자는 스님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조그만 스투파, 결집지 지켜
어찌됐던, 십사논쟁으로 비롯된 제2결집지는 현재 힌두교 사원으로 변해있다. 불교 흔적이 있다면, 그곳에 작은 부처님이 새겨진 조그만 ‘봉헌(奉獻) 스투파’가 있다는 점 정도다. 우리가 그곳에서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데, 마침 힌두교 수행자가 나왔다. 확인을 위해, 갖고 간 사진을 보이며 “여기가 제2결집지가 맞느냐”고 물었다. 힌두교 수행자는 “틀림없다”며 봉헌 스투파를 가리켰다. 봉헌 스투파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새겨진 부처님의 상호는 매우 원만하고, 스투파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것뿐이었다. 제2결집지에서도 ‘불교’는 사라진 것이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는 이방인이고, 인도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힌두교도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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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결집지 > |
사진설명: 아쇼가왕의 후원 아래 제3 결집이 거행된 파트나의 아육원사지 전경. |
봉헌 스투파를 살피고 나오는데, 힌두교 수행자가 우리를 붙잡았다. “박시시(보시. 헌금)를 하고 가야 부처님을 잘 모실 것 아니냐”며 돈을 요구했다. 황당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힌두교 사원을 빠져 나왔다. 다시 차를 타고 아쇼카 왕 당시 제3결집이 이뤄진 파트나로 향했다.
2002년 3월24일 오후 3시30분에 파트나에 도착했다. 시내는 상당히 붐볐다. 성이 온통 꽃으로 덮였기에 ‘화씨성(華氏城)’으로 한역(漢譯)된 파트나. 인도 최초의 대제국을 이룩한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비하라주(州) 주도(州都)다. 인도의 다른 도시들처럼 골목엔 휴지들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고, 대부분 사람들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아쇼카 왕이 다르마(法)에 의한 통치를 할 당시의 파트나는 대단한 규모였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지배하던 그리스 계 셀레우코스 왕이 파견한 매가스테네스가 저술한 〈인디카〉에 - 책은 현존하지 않는데 다른 책에 인용돼 일부가 전한다 - 의하면 파트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64개의 성문이 있었다. 특히 507개의 망루가 항상 외부침입자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깨끗한 물이 흐르는 운하가 있었다.
파트나에 도착한 다음날인 3월25일 아쇼카 왕(아육왕) 당시 제3결집이 이뤄진 쿰나하르(아육원사)를 찾았다. 연못이 있고, 연못 속에 몇 개의 돌기둥이 보였다. 유적지는 상당히 넓었다. 유적지를 한 바퀴 돌았다. 시원스레 쭉쭉 뻗은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한 바퀴 돌아 연못가에 앉아 제3결집을 생각했다.
아쇼카왕 승단정화 지원
〈선결율비바사〉 등에 의하면, 불멸 218년에 즉위한 아쇼카 왕은 승단을 적극 지원했다. 교단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자 ‘안이한 생활을 바라고 출가하는 자’가 많아졌다. 승가의 계율이나 포살·수행은 자연스레 어지러워져 갔다. 승단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못갈리풋타·팃사가 아쇼카 왕의 지원을 받아, 승가를 숙정했다.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단정하지 않는” ‘분별설(分別說)’을 지지하는 사람은 불교도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판단해 승단에서 추방했다. 분별설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논사(論事)〉. 목갈리풋타는 1000명의 아라한을 모아 ‘법의 결집’을 행하고, 9개월에 걸쳐 수료했다. 이것이 제3결집의 주된 내용이다. 3결집이 쿰나하르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쿰나하르 연못가의 나무 그늘에 앉아 아쇼카 왕을 추념(追念)했다. 칼링가지방을 정복할 때 벌인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불교에 귀의해 다르마에 의한 통치를 했던 전륜성왕. 그는 실로 인도불교 성장·발전의 제일가는 공헌자였다. 인도불교가 그야말로 ‘불교인도’로 발전하는데 일등공신이었다. 그로 인해 승단은 안정됐고, 그로 인해 부처님 가르침은 전 인도에 퍼졌으며, 그로 인해 불교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없었다면 오늘날 인도 불교유적지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대표적 불교유적지마다 서있는 아쇼카석주가 없었다면, ‘천하의 커닝햄’이라도 유적지임을 쉽게 확신·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근·현대 인도불교 부흥의 최대 공로자는 기원전에 죽은 아쇼카왕이라 해도 틀린 말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적만 있는 아육원사
굳이 아쇼카왕의 문제를 찾자면, 지나치게 승단을 후원해 포교에 대한 열정을 잃게 만든 것이라고나 할까. 물론 승단이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하지 못했기에 포교에 대한 관심을 저버렸지만. 만약 아쇼카왕의 후원과 승단의 포교열정이 결합됐더라면, ‘불교인도’로 변한 인도불교는 결코 지금 같은 ‘무불지대(無佛地帶)’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으리라. 잡념을 털고 아쉬움만 안은 채 쿰나하르를 나왔다. 벌써 정오가 가까워오는지 태양은 더욱 강렬한 빛으로 우리를 쏘았다. 불교도가 많다면, 뜨거운 태양도 훨씬 뜨겁지 않게 느껴지련만.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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