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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24> 화폐 이야기 (4) 한국의 돈 10원 주화 / 다보탑
1960년대에 10원이면 서울 또는 부산 시내전차를 4번 탈 수 있었다(당시 전차표는 2원 50전, 시내버스는 3원이었음). 1970년대 초 대학 졸업자 초봉(월급)이 1만 원에 못 미쳤다. 요즘 대학 졸업자 초봉(월급)이 약 350-38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40년 동안에 400배나 변한 셈이다. 그만큼 잘살게 된 점도 있지만,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는 떨어진 셈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 가운데 현재 우리나라 실용 화폐의 최저 단위가 돼버린 10원짜리 주화 하나로는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됐다.
▲1966년 발행한 한국의 돈 10원 주화(좌)와 2006년 12월 18일부터 발행한 새 10원 주화(우)
2007년 현재 황동(구리 65%+아연 35%)으로 제조된 종전 10원 주화 1개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약 40원 정도였다. 그래서 2006년 12월 18일부터 규격도 줄이고, 알루미늄에 구리 도금한 것으로 제조하는 새 10원 주화를 발행하게 되었다. 새 10원 주화 1개 제조 단가는 24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연간 40억 원 가량의 제조비용을 절감하게 된다고 한다.
거스름돈으로 10원짜리를 받았을 때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녀봐야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너도나도 그것을 버리거나 집에 오랫동안 모아두면 국고를 축내는 일이 된다. 그것은 곧 국민의 세금이다. 그러므로 좀 번거롭더라도 10원짜리 동전이 10개, 20개가 되면 오래 가지고 있지 말고, 은행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다.
한국의 돈 10원 주화 앞면에는 경주 불국사(佛國寺)의 다보탑(多寶塔)이 부조(浮彫, 돋을새김)되어 있다.
불교 사찰 구조의 기본은 당(堂)과 탑(塔)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붓다(Buddha, 부처)나 보살 등 불교신앙의 대상이 되는 불상(佛像)을 모신 법당(法堂)은 불법 연구와 신앙 공간이다. 탑(塔)은 원래 석가모니의 유골을 모신 무덤이었다. 원칙적으로 석가모니의 유골만 모셨던 탑은 나중에 승려들의 유골도 안치하게 되었다.
금당(金堂)은 사찰의 건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이를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한다. 절 또는 사찰(寺刹)을 산스크리트어{Sanskrit, 범어(梵語)}로 ‘가람(伽藍)’이라고도 한다. 탑이 금당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식(一塔式) 가람 배치이고, 두 탑이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되면 쌍탑식(雙塔式) 가람 배치이다.
경주(慶州) 불국사(佛國寺)는 쌍탑식 가람 배치를 취하고 있다.
우리나라 3보(三寶) 사찰(또는 3대 사찰)은 ①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 ②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③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이다. 통도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있다 하여 불보(佛寶) 사찰이고, 해인사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있어 법보(法寶) 사찰이며, 송광사는 유명한 승려가 많이 배출되어 승맥(僧脈)을 이어왔기 때문에 승보(僧寶) 사찰인 것이다.
한국 불교 하면 경주(慶州)이고, 경주 하면 불국사(佛國寺)인데, 불국사가 삼보 사찰에 들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경주 불국사는 무엇으로 유명한가? 불국사는 한국 불교 사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이고 국보가 가장 많은 사찰(국보 총 7개)로 유명하다.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는 경주 불국사
불국사(佛國寺)의 창건(創建)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의 설은 『불국사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있는 기록으로서, 528년(법흥왕 14년) 신라 제23대 법흥왕(法興王, ?-540, 재위 514-540)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에 의해 창건이 시작되어, 574년(진흥왕 34년)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의 어머니 지소부인(只召夫人)이 크게 중건했으며, 670년(문무왕 9년) 제30대 문무왕(文武王, 626-681, 재위 661-681)이 무설전(無說殿)을 지었고, 751년(경덕왕 9년)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765, 재위 742-765) 때 재상 김대성(金大城, 700-774)에 의해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설은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에 있는 기록으로서, 전자보다 100년 앞선 연대인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458, 재위 417-458) 때 아도화상(阿道和尙, ?-?)에 의해 불국사가 창건되어, 751년(경덕왕 9년)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765, 재위 742-765) 때의 재상 김대성(金大城, 700-774)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두 설에서 확실한 것은 석교(石橋)들과 두 개의 탑 및 석굴암을 포함한 불국사가 김대성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에 의하면 김대성은 수수께끼 같은 설화적인 인물이다. 고려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찬한 『삼국유사(三國遺事)』도 김대성이 불국사를 건축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김대성은 공사를 시작한 지 24년 동안에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국가가 6년 더 공사하여 30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현재의 불국사는 신라 때의 모습이 아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년) 중인 1593년 5월 왜군이 불을 지른 바람에 석조 건축물을 제외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전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1604년(선조 37년)경부터 중건을 시작하여 1805년(순조 5년)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복원을 했으나, 완벽한 설계도면이 없어서 현재의 모습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 불교의 중심지였던 경주에 있는 사찰이 한국 불교의 3대 사찰에 들지 못하는 것은 몽골의 침입과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 때문이다. 경주 또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던 경주의 황룡사(黃龍寺)는 몽골군에 의해, 황룡사 못지않은 경주의 분황사(芬皇寺)와 불국사(佛國寺)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전소되고 말았다.
불국사는 제대로 복원되지 못했지만, 그 아름다움이 인정되어 불국사와 석굴암(石窟庵, 국보 제24호)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국보(國寶), 보물(寶物), 사적(史蹟)에 처음으로 번호를 붙인 것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 즉 일제(日帝) 조선총독부가 처음 번호를 붙였는데, 그 가치의 경중(輕重)을 따라 붙인 것이 아니라, 편의적으로 붙였다. 즉 문화재의 가치 순으로 붙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보 제1호인 숭례문(崇禮門)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1962년 이래 우리나라는 국보, 보물, 사적으로 추가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유래를 알 리 없었던 일본인들이 서울의 사대문을 고유명 대신에 방향을 따라 남대문, 동대문 식으로 붙였다고 한다.
국보 제1호는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국보 제2호는 원각사지 10층 석탑, 국보 제3호는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이고, 보물 제1호는 서울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보물 제2호는 서울 보신각종(普信閣鐘), 보물 제3호는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이며, 사적 제1호는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 제2호는 김해 봉황동유적(鳳凰洞遺蹟), 사적 제3호는 수원 화성(華城)이다.
예술작품은 원형 그대로일 때에 가치(價値)가 있다. 고치거나 복원했을 때는 제 가치가 나지 않는다. 1395년(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년)에 완성된 숭례문(崇禮門)은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에 개축되기는 했으나, 서울의 목조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수많은 전쟁과 난리를 꿋꿋이 버텨낸 숭례문이 2008년 2월 10일 한 미치광이의 불장난에 의해 전소되고 말았다. 복원하기는 했지만, 그 가치는 한없이 떨어진다.
불국사의 목조 건물도 그와 같다. 현재 불국사의 목조 건물들은 신라 때의 그 원형들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복원한 것들로서 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석조 건축물들은 그런 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석조 건축물에 있는 것이다.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석조 계단과 다리로서 국보 제23호인 동쪽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 그리고 국보 제22호인 서쪽의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에 있다. 이 다리들을 통해 이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현재는 훼손을 막기 위하여 이 다리들을 통해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석조 문화재는 대리석(大理石)이다. 대리석은 비교적 다루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 석재인 화강암(花崗巖)은 너무 단단하여 다루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화강암으로 조각하거나 석조 건축물을 만든 것은 우리나라뿐이다. 신라인들은 그러한 화강암을 밀가루 반죽하듯이 다루었기 때문에 세계인들이 놀라는 것이다.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는 불국사만이 가지고 있는 정교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독특한 석조 건축물이다.
또 불국사의 아름다움은 대웅전 앞에 있는 석조 건축물 3층 쌍탑(雙塔)인 석가탑(釋迦塔, 국보 제21호)과 다보탑(多寶塔, 국보 제20호)에 있다.
‘탑(塔)’은 인도의 고대어 산스크리트어{Sanskrit, 범어(梵語)} ‘수투파(Stupa)’에서 나왔다. 수투파는 ‘뼈를 담은 항아리를 넣은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 수투파가 중국에서 ‘탑파(塔婆)’로 음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파(婆)’를 떼어내고 ‘탑(塔)’이라고 했다.
영웅호걸이나 명작에는 으레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는 법이다. 소설(小說)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허구적(虛構的)으로 꾸며진 이야기이지만,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런 소설 같은 이야기가 옛날 옛적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전설(前說)이다. 석가탑과 다보탑 역시 그런 전설을 지니고 있다.
김대성이 불국사의 탑을 만들기 위하여 석공(石工) 아사달(阿斯達)을 초청했다. 원래의 전설에는 아사달이 중국 당(唐)나라 석공이었고, 아사녀(阿斯女)는 그의 누이동생이었다고 한다. 이를 현진건(玄鎭健)이 소설 『무영탑(無影塔)』에서 백제(百濟) 사비성{泗泌城, 현재의 부여(夫餘)} 출신으로, 그리고 부부 사이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사달이 당나라 출신이라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하니, 백제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아사달은 갓 결혼한 아내 아사녀에게 3년 후에 돌아온다고 약속하고 서라벌로 갔다. 아사녀에게 있어서 3일은 3년처럼 길었을 것이다. 아사녀는 3년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서라벌로 떠났다. 그러나 주지의 만류로 지척(咫尺)에 있는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아내가 와 있는 줄도 모르는 아사달은 심혈을 기울여 다보탑을 완성하고, 이제 석가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사녀는 불국사 밖에서 남편을 만나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허구헌 날 불국사 밖에서 서성대는 아사녀를 본 주지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탑 공사가 얼마 남지 않았소. 이렇게 서성대지 말고, 저 연못가에서 지성으로 빌면 곧 탑 그림자가 연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을 만나게 될 것이오.”
그런데 석가탑이 다 완성되어 가고 있는데도, 웬일인지 연못에는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지치고 탈진한 아사녀가 절망에 빠져버렸는가? 아니면 연못에서 남편의 얼굴을 보았던 것일까? 아사녀는 그만 연못에 뛰어들고 말았다.
원래 모습의 불국사 석가탑 아래에는 ‘영지(影池)’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석가탑의 그림자는 끝내 그 연못에 비치지 않았다 하여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부른다.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몇 나라의 불탑들을 살펴본다.
종단, 분파가 아주 많은 불교를 크게 둘로 나누면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이다. 소승불교는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있고, 대승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에 있다.
인도의 최초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Maurya Dynasty, BC 317-BC 180)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제3대 황제 아쇼카(Ashoka, ?-232?, 재위 272?-232?)는 불교를 국교화하고 불교의 국외 전파에도 힘썼다. 그러나 이후에 이슬람 제국에 정복되고, 불교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인도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불탑을 보면 거대한 면적에 반구(半球) 모양의 무덤이다. 아래 사진은 인도 중부의 도시 보팔(Bhopal) 인근의 산치(Sanchi)에 있는 대탑(大塔)으로서 아쇼카가 세운 것이다. 높이가 16.5m, 지름이 37m이다.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
이슬람교에 의해 인도 불교가 쇠퇴하자, 아쇼카가 불교를 전파한 스리랑카{Sri Lanka, 옛 국명은 실론(Cylon)}가 소승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스리랑카의 탑도 인도의 불탑과 비슷한 모습이다. 아래 사진은 고도(古都)이자 불교도시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있는 마하세야(Mahaseya) 탑이다.
▲스리랑카의 마하세야(Mahaseya) 탑
세계 최대 불교 사찰은 대만의 불광산사(佛光山寺)라고 한다. 태국 방콕(Bangkok)의 태국 최대 사찰인 왓 포(Wat Pho) 사원, 왓 프라 깨오(Wat Phra Kaew, 일명 에메랄드) 사원도 엄청난 규모이다. 이 사찰들을 처음 보았을 때 입이 딱 벌어졌었다. 규모 면으로 말하자면 경주 불국사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탑도 어마어마하다. 탑이 본 건물보다 더 높다. 아래 사진은 왓 포 탑이다.
▲태국 방콕의 왓 포(Wat Pho) 탑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사찰 건물과 탑들은 모두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이제 대승불교의 나라 중국, 한국(위에서 소개했음), 일본의 탑을 살펴본다.
아래 사진은 중국 당(唐)나라의 고승(高僧)으로서 인도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불경을 중국에 가지고 온 현장법사{玄奘法師, 602-664, ‘삼장(三藏)’은 불교 경전(經典)을 총칭하는 말인데, 삼장을 통달했다고 해서 그를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도 함}가 당의 수도 장안[長安, 현재는 시안{西安(서안)}]에 사찰 건축과 함께 세운 7층 전탑(塼塔)이다. 정사각형에 높이 64m, 25m의 규모이다. 전탑(塼塔)이란 벽돌로 쌓은 탑이다. 중국은 주로 전탑, 한국은 석탑(石塔, 목탑도 있음), 일본은 목탑(木塔)을 세웠다. 중국의 탑은 시대에 따라 팔각형 또는 원형 등 다양했고, 대체로 높다.
▲중국 당 시대의 7층 전탑
한국으로부터 전래된 일본 불교의 탑은 주로 목탑(木塔)이었다. 후에 일본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탑이 높아졌고, 다층 기와집 같은 형태였다. 아래 사진은 8세기에 나라{那良(나량)}에 지어진 야쿠시사{藥師寺(약사사)}의 3층 탑이다.
▲일본 나라 시대의 3층 목탑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 불탑과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 불탑의 형태가 확연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불탑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숫자도 많고 화려하며 아라베스크(arabesque)하고 귀족적이다.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가난한 원인 중의 하나는 불교 건축물에 돈을 너무 쏟아 붓는 것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동북아시아의 불탑은 작고 숫자도 하나 아니면 둘이며 소박하고 서민적이다. 특히 한국의 불탑은 가장 초라할 정도로 작고 소박하다.
그러나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면 독특하면서도 예술적이지 않은가!
석가탑의 높이는 8.2m, 기단 너비는 4.3m이고, 다보탑의 높이는 10.4m, 기단 너비는 4.4m이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서 있는 두 탑 중 석가탑은 서쪽(대웅전을 마주봤을 때 왼쪽)에 있고, 다보탑은 동쪽(대웅전을 마주봤을 때 오른쪽)에 있다. 이러한 배치는 현재(現在)의 부처인 석가여래(釋迦如來), 즉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법(說法)하는 것을 과거(過去)의 부처인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法華經)』 내용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탑 이름도 석가탑(釋迦塔), 다보탑(多寶塔)인 것이다.
디자인 이론에 의하면 두 탑을 나란히 세울 때에 똑같은 탑은 배치하기가 쉬우나, 서로 너무 다른 두 탑을 배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 두 개의 탑이면서도 매우 잘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신비한 것이다.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은 별칭이다. 정식명칭은 불국사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이다. 석가탑은 높이와 너비가 각각 다른 2개의 ① 기단(基壇, 탑의 기초), ② 위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3개의 탑신(塔身, 탑의 몸체), ③ 상륜부(相輪部)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노반(露盤)‧복발(覆鉢)‧앙화(仰花) 외의 상층부가 전란 중에 파손된 것을 1973년 실상사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의 상륜부를 본떠서 복원하였다고 한다.
다보탑에 비해 석가탑은 무늬와 조각이 없어 너무 단순한 것 같이 보이나, 완벽한 절제미와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탑신의 1층과 2, 3층의 비례는 각각 4:2:2로 함으로써 아래에서 쳐다볼 때의 거리를 고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균형미와 안정감이 완벽하다는 것이다. 석가탑 이후에는 모든 불탑들이 석가탑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석가탑은 한국 불탑의 절정(絶頂)에 이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석가탑은 한국 불탑의 표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탑 중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만들기가 더 어렵겠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다보탑”이라고 대답한단다. 그러나 전문가에 의하면 석가탑이 더 아름답고 만들기가 더 어렵다고 한다.
석가탑의 지면과 닿는 기단에는 자연석과 다듬은 돌을 섞어서 쌓았는데, 이러한 축성법을 ‘그랭이’ 공법이라고 한다. 이 그랭이 공법은 고대부터 전수(傳受)된 한국만의 독특한 축성술이다. 언뜻 보면 미숙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 같지만, 돌들이 서로 불규칙적으로 물고 물려서 엄청나게 강하고 질기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랭이 공법에 의해 축조된 성벽은 적이 성벽파괴기구로 아무리 공격해도 성벽이 뚫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고구려의 평양성이 특히 유명하다. 중국의 수(脩)나라와 당(唐)나라가 아무리 공격해도 평양성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랭이 공법에 의해 세워진 탑은 지진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석가탑과 다보탑은 내진(耐震) 공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하다.
다보탑은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수난을 당했으나, 석가탑은 수난을 당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생겼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너무 견고하여 어찌할 수가 없었는지 모른다. 석가탑은 1,260년 동안 제자리를 지켜왔다. 그러한 석가탑이 1966년 9월 6일 도굴꾼들에 의해 도굴되었다. 탑 속의 사리함을 훔쳐가기 위해 도굴했던 것이다. 이것이 석가탑의 최초 수난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도굴꾼들의 도굴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그 때문에 1966년 석가탑 해체‧복원 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2층 탑신 중앙부 사리공에서 금강사리함(金剛舍利函)과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목판활자 인쇄본의 불경 일부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무구정광대타라니경)}』{줄여서 ‘다라니경{陀羅尼經(타라니경)’}(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의 발견이었다. 이것의 간행연대는 이르면 704년, 늦어도 751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계 최고(最古) 목판활자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4-751년 간행 추정‧국보 제126호)
1966년 ‘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에는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불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줄여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이자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이었다. 1800년대 말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 주한 프랑스 공사가 돈을 주고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을 사 가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가 1455년에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1377년 간행‧보물 1132호)
그런데 1966년 ‘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에는 770년에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百萬塔陀羅尼(백만탑타라니)}』가 세계 최고(最古) 목판활자 인쇄본이었다. 1966년 석가탑에서 발견된 신라의 『다라니경{陀羅尼經(타라니경)}』이 704-751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의 『다라니경』이 일본의 『백만탑다라니』보다 최소한 20년 이상 앞선 것으로서 세계 최고(最古) 목판활자 인쇄본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다라니경{陀羅尼經(타라니경)}』(704-751년 간행 추정)과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1377년 간행)은 각각 목판활자 인쇄본과 금속활자 인쇄본에서 세계 최고(最高)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세계문화사상 대한민국의 자랑거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석가탑(釋迦塔)이 한국 불탑의 전형(典型)이고 남성적(男性的)이라면, 다보탑(多寶塔)은 변형(變形)이고 여성적(女性的)이다. 다보탑은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면서도 독창적(獨創的)이고, 섬세(纖細)하며, 변화무쌍(變化無雙)하고, 미려(美麗)하다.
정사각형의 2개 기단(基壇)으로 이루어진 석가탑과는 달리 다보탑은 별 모양으로 변형된 사각형의 1개 기단으로 되어 있고, 대신에 신을 신은 것 같은 보계(寶階)가 있다. 또 기단 사방에는 계단이 있다.
석가탑의 3층 탑신(塔身)은 뚜렷한데, 다보탑의 탑신은 온갖 변화가 주어져서 3층 같기도 하고 4층 같기도 하다. 1층 탑신은 사각형이고 난간이 있으며, 그 다음부터는 팔각형 모양이다.
상륜부(相輪部)도 석가탑 같으면서도 변화가 주어져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소승불교의 불탑처럼 거대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다보탑은 그 어느 나라의 불탑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면서도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니 세계인들이 이 다보탑의 우아(優雅)한 아름다움을 보고 반하는 것이다. 다보탑과 같은 불탑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없는 유일한 탑이다.
석가탑에 비해 다보탑은 수난을 많이 당했다. 1924년 일제는 다보탑을 수리한다고 하면서 탑 내의 사리함을 훔쳐 갔다. 그리고 그들이 수리 내역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고 있다. 다보탑의 기단부 위 사방(四方)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었다. 현재 그 중 한 마리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도둑맞아서 두 마리는 일본에, 또 한 마리는 영국에 있다고 한다. 기단의 보계(寶階)에 8개의 석주(石柱)가 있다. 원래는 그 석주 사이를 잇는 난간(欄干)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고 있다.
한국의 돈 10원 주화 앞면에는 다보탑이 있다. 이전 주화에는 사자상이 없으나, 더 작게 만든 새 주화에는 한 마리의 사자상이 있다. 그림이 워낙 작아서 시력이 여간 좋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2013년 현재 문화재청과 문화재 관련 기관의 통계에 의하면, 총 75,000여 점의 우리 문화재가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20개국에 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도둑맞거나 밀반출된 것들이다. 많이 가 있는 순서로 보면 일본 약 35,000여 점, 미국 16,000여 점, 영국 6,600여 점, 독일 5,000여 점, 러시아 3,000여 점, 프랑스 1,900여 점 등이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처럼 돈을 주고 사 오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아 와야 한다. 문화재를 보전(保全)하고 나라를 지키는 길은 우리나라가 더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2013.11.29.(금). 조귀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