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소개
존 롤스(John Rawls)는 1921년 미국에서 태어나 코넬, MIT 대학을 거쳐 현재 하버드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학계에서 주목을 받은 '공정으로서의 정의','분배의 정의'등 사회 정의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논문들을 근간으로, 20여 년에 걸친 필생의 대작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을 내놓았다. 이 책은 20 세기 윤리학 저술 중 가장 유명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론'의 핵심내용
여기에 케이크 하나가 있다. 다섯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으려고 한다. 어떤 방법으로 케이크를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은가? 우리는 이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대충 생각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어떤 한 사람으로 하여금 케이크를 다섯 조각으로 나누게 한 다음, 다른 사람들이 케이크 한 조각씩을 갖고 마지막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케이크를 자른 사람이 갖게 하는 것이다.
다른 네 사람이 더 큰 케이크 조각을 가지려고 싸울지도 모른다. 그것이 걱정된다면 네 사람이 가위바위보를 하여 이긴 사람부터 케이크 조각을 골라 가지게 하면 될 것이다. 케이크를 나누어 먹을 때 이런 방법을사용하면 그 누가 불평을 하겠는가?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이유는 그 절차와 방법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 정의(社會正義)의 문제를 이와 같은 절차와 방법을 이용하여 풀어 간다면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 정의의 문제에 대해 일정한 모형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20 세기 최대의 윤리학자 존 롤스(John Rawls)이고, 그의 정의에 관한 이론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저서가 바로 '정의론'이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상당히 많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똑같은 몫을 받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전자의 경우처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측을 '자유주의'라고 말하고, 후자의 경우처럼 똑같은 분배를 강조하는 측을 '평등주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대가도 받을 수 없고, 열심히 일한 사람은 그만큼 많은 대가를 받는 사회를 자유주의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를 평등주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를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는 없는가? 더 나아가 자유주의 안에 평등주의의 좋은 점을 도입할 수는 없는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철학자가 존 롤스이다. 그는 '정의론'에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사회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롤스는 '정의론'의 요지를 다음과 같이 축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사회 전체의 복지라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정의는 타인들이 갖게 될 더 큰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됨을 거부한다. 즉, 다수가 누릴 더 큰 이득을 위해서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것을 정의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동등한 시민적 자유란 이미 보장된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정의에 의해 보장된 권리들은 어떠한 정치적 거래나 사회적 이득의 계산에도 좌우되지 않는 것이다. 최선의 이론이 없을 경우에는 결함 있는 이론이나마 따르게 되듯이, 부정의는 그보다 큰 부정의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참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의 제 1 덕목으로 진리와 정의는 지극히 준엄한 것이다.
롤스는 정의(正義)를 '정당화 할 수 없는 불평등이 없는 상태'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정의론'의 중심 과제는 "어떤 차등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즉 절차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면 불평등이나 차등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얼핏 들으면 모순되는 듯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점에서 설득력을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다수의 커다란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이익을 희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이 소수가 될 때도 그런 일을 순순히 허용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희생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롤스는 타인들의 커다란 선을 위하여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을 정의라고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도 있고 남들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그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위의 결과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시킨다고 할 때 그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금지시켜야 하는가? 어느 누구도 이러한 금지를 합리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직접 제한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로도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스는 "부정의를 참을 수 있는 경우는 그보다 큰 부정의를 피할 수 있을 때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롤스가 소수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 정의를 주장할 때 내세우는 정의는 '절차적 정의'이다.가령 어떤 사람이 추첨에 의해 5 억원을 받게 됐다고 할 때, 공정한 절차만 지켰다면 어느 누구도 그 결과에 대해서 전혀 불평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케이크를 나눌 때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마지막에 자기 조각을 가져가는 것이나, 더욱 커다란 케이크를 갖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도 이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롤스는 절차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계약(contract)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점에서 롤스는 기본적으로 로크, 루소, 칸트의 전통 위에 서 있고 그들과 비슷한 계약론적 접근을 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롤스는 순수한 절차적 정의의 원리를 수립하기 위해 계약 당사자들이 자신의 특수한 여건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한다. 그렇지 않고 만약 자신의 특수한 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순수한 절차적 정의가 확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법률을 만들 때 자신이 건설 회사 사장이라면 건물 주인보다는 건설 회사에 유리한 법률을 만들 것이고, 만약 법률을 만드는 사람이 변호사라면 의뢰인보다는 변호사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려면 그런 특수한 여건을 배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롤스는 계약 당사자들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만드는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가 갖게 될 케이크 조각이 어떤 것인지를 몰라야 케이크 자르는 사람이 케이크를 공정하게 자르지 않겠는가? 무지의 베일을 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원초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 말에는 계약 당사자들이, 상호 협동이가능하고,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권력이나 재화의 취득을 욕구한다는 사실 등을 전제하고 있다. 롤스의 기본적인 생각은 합리적인 사람들이, 원초적 입장에서, 공정한 절차에 의해, 사회 제도나 규칙을 결정한다면 비록 그 결과가 부정의하더라도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롤스는 자신이 주장하는 이와 같은 설명이 옳다면 합리적인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원칙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롤스의 정의의 두 원칙 중에 첫째 원칙은 자유 우선성의 원칙으로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원칙은 차등의 원칙으로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키도록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불평등이 인정되려면 ⓐ최소 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에게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어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직위와 직책이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는 똑같은 기회가 주어져 있고, 만약 불평등한 제도가 있다면 그 제도는 사회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그 모든 절차가 공개되어 있을 때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월 수입이 천만 원인 공인 회계사 시험이 특정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 있다면 어느 누가 그런 제도를 용납하겠는가? 또한 도시 계획이나 국가 기간 산업 건설에서 비록 그 결정 내용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손해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부정의한 결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롤스가 말하는 절차적 정의에서는 정책과 제도의 투명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런 원칙이 채택되면 좋은 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의 기본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평등주의의 좋은 점을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만약 각 개인의 자유만을 인정한다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불우한 처지에 놓인 노인, 그리고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문제를 소홀히 할 소지가 많다. 그러나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그들의 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커다란 단점인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롤스의 정의론은 기본적으로 '최소 수혜자의 최대 행복'을 고려하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롤스의 정의론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개인의 능력만을 강조하는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이지만, 둘 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이다. 정의로운 국가는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국가를 뜻한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이나 능력 없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