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감꽃 / 김준태
어릴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을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탱자나무 흰 꽃 / 문태준
들마루 양지녘에 오늘 나앉았다가
문득,
탱자나무 가시 사이
흰 꽃 핀 것 알았다
응달에,
부엉이의 눈 같기만 한
탱자나무 흰 꽃송이
꽃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사랑 /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나무에 깃들어 / 정현종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은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自尊 / 이시영
화창한 가을날
벌판 끝에 밝고 환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솟아 있다
모든 새들이 그곳에서 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혼자 둥굴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빈 방 / 정군칠
삼태성 막 돋는
저녁 무렵
왜가리 날아와
금붕어 한 마리 물고갑니다
연못에
빈 방 하나 생겼습니다
산책 / 배진성
산책은 살아있는 책이다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책이다
내가 산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여러 번
정독하는 책은 자연이다
산책은 자연이다
자연은 산책이다
산책은
자연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 일이다
산책은 시간을 주고 산다
시간으로 산 책
그리하여 산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길이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나무에 대하여
정호승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각인
배한봉
이름부터 아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장수풍뎅이, 각시붕어, 닭의장풀꽃
사는 법 알면 사랑하게 되는 줄 알았다
아이는 한 송이 풀꽃을 보고
갈길 잊고 앉아 예쁘네 너무 예뻐, 연발한다
이름 몰라도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눈빛만 빛나고 있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헛것만 가득한 내게 봄을 열어주고 있다
깨닫느니, 느낌도 없이 이름부터 외우는 것은
아니다, 사랑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마음이 가 닿는 사랑
놀람과 신비와 경이가 나를 막막하게 하는 사랑
아름다움에 빠져 온몸이 아프고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때
사랑은 웅숭깊어 지는 것이다
이름도 사랑 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것이다
나뭇가지를 얻어 쓰려거든
이정록
먼저 미안하단 말 건네고
햇살 좋은 남쪽 가지를 얻어오너라
원추리꽃이 피기 전에 몸 추스를 수 있도록
마침 이별주를 마친 밑가지라면 좋으련만
진물 위에 흙 한 줌 문지르고 이끼옷도 입혀주고
도려낸 나무그늘, 네 그림자로 둥글게 기워보아라
남은 나무 밑동이 몽둥이가 되지 않도록
끌고 온 나뭇가지가 채찍이 되지 않도록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으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고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편지 / 김남주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을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으로 / 서정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할머니의 뜰
김선우
토담 아래 비석치기 할라치면
악아, 놀던 돌은 제자리에 두거라
남새밭 매던 할머니
원추리꽃 노랗게 고왔더랬습니다
뜨건 개숫물 함부로 버리면
땅속 미물들이 죽는단다
뒤안길 돌던 하얀 가르마
햇귀 곱게 남실거렸구요
악아, 개미집 허물면 수리님이 운단다
매지구름 한소쿠리 는개 한자락에도
듬산 새끼노루 곱아드는 발
싸리꽃이 하얗게 지곤 했더랬습니다
토담, 사라진 기억의 덧창에
고가도로 삐뚜루 걸리는 저녁
마음 들일 데 없는 할머니 흰 버선발
찬비에 저만치 정처없습니다
가지 않은 길 /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으므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더니라고.
책
김수영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하지요.
바람도 잠든 숲속, 잠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든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나는 한때 사랑의 시들이 씌어진 책을 가지고 있었지요.
모서리가 나들나들 닳은 옛날 책이지요.
읽는 순간 봄눈처럼 녹아버리는,
아름다운 구절들로 가득 차 있는 아주 작은 책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