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동북아시아에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국민들을 고문하는 나라가 있었다.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그건 남한이다. 1970년대의 남한과 오늘날의 북한은 여러 점에서 흡사하다."
박정희 시대 한국의 현실을 일갈한 표현이다. 그것도 '빨갱이'나 '친북?좌파'도 아닌 박정희 정권 시절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었던 도널드 그레그가 한 말이다. 이 구절을 소개한 이유는 박정희의 비밀 핵 개발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30여년 전 박정희의 선택은 1990년대 이후 북한의 3대 세습 정권(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선택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하여 '박정희와 핵'에 대한 이해는 역지사지(易地思之) 관점에서 북핵에 대한 이해 수준을 높여줄 수 있다. 또한 박정희와 핵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다. 그의 좌절된 꿈을 다룬 김진명의 장편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450만 부나 팔렸고 영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정희 시대의 핵 개발 여부 및 그 수준은 관심도 여전하다. 그의 암살 배경에는 미국 CIA가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왜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했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갔을까? 그리고 그가 좌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앞서 소개한 그레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한국이 1972년에 핵 개발에 착수해 1977년에 중단했다고 증언했다. "내가 1973년 한국에 왔을 그때, 미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박정희는 이걸 보면서 미국과의 동맹에 대한 믿음을 잃기 시작했다. 그가 핵개발에 나선 이유다." 그러면서 "우리가 북한으로부터의 어떠한 공격에도 남한을 보호할 것이며, 따라서 남한이 핵무기를 지닐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하게 재확인"시켜 박정희를 설득했다고 한다.
베트남 전쟁, '닉슨 쇼크', 주한미군 감축
그레그도 지적한 것처럼, 박정희가 핵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1969년에 집권한 닉슨 행정부는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 구상의 핵심적인 내용은 베트남전의 조속한 종결, 중국과의 관계 개선, 아시아 안보에 대한 아시아 국가들의 책임 증대였다. "베트남 전쟁의 명예로운 종식"을 핵심적인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이를 위해 중국과의 적대 관계 종식을 추구했고, 소련과도 데탕트에 나섰다. 그리고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닉슨은 이 독트린을 통해 핵우산 제공을 비롯해 동맹국과 맺은 안보 조약을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도 "우리는 위협에 직면한 해당 당사국이 자국의 안보를 위한 병력 동원에 우선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간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시아는 아시아인들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마디로 아시아 국가들의 안보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독트린을 입증하듯, 닉슨 행정부는 아시아 주둔 미군의 대대적인 감축에 돌입했다. 우선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본격적으로 진행해, 1969년 초에 72만 7,000명에 달했던 병력 수가 1971년 말에는 28만 4,000명까지 줄어들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완전 철수 수순을 밟았다. 이와 동시에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미 집권 전부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피력했던 닉슨은 1970년 들어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과의 접촉에 나섰고, 당시 소련과의 국경 분쟁을 겪고 있던 중국도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차원에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타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1년 7월 중순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중국 방문과 이듬해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이어지면서 미중 데탕트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중간의 데탕트는 한국에서 '닉슨 쇼크'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중국은 한국에게 한국전쟁 참전으로 통일을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자 북한의 후견인 정도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내에서는 키신저와 닉슨의 방중을 계기로, '두 개의 코리아'와 남북평화협정 등이 미중간에 협의될 가능성을 경계했다. 이를 두고 <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상태를 유럽분쟁의 초점이었던 '베를린' 문제 해결방식처럼 미‧소‧일‧중공 등 4대강국에 의한 현상고정화는 중소국의 의사를 무시한 대국주의정치의 자의와 횡포를 강변할 수 없다는 점을 우리는 차제에 다시 한번 엄중히 경고코자 한다"며, "김일성이 '긴장완화'라는 거죽을 넉살좋게 뒤집어쓰고 '현재의 휴전협정을 남북평화협정'으로 뜯어고치고자 북경의 입김에 재빠르게 올라타고 위장평화공세를 펴고 있는 이때, 정부의 안보태세노력은 더말할나위 없고 국민의 정신자세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조치도 취하기 시작했다.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가능성에 대해 "유연하고도 진지하게 접근"할 의사를 밝혔고, 이를 뒷받침하듯 대외통상법을 개정해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모든 공산국가와의 교역을 허용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한국 외교관이 해외공관에서 중국 외교관과 접촉하는 것을 허용했고, 대만과의 관계 확대에도 신중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73년에는 '6‧23 선언'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를 뒷받침하듯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중국의 공식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개선 움직임은 1976년 마오쩌둥 사망 및 권력 투쟁 격화로 중단되었고, 한중 관계의 개선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의 등장 이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한편 신아시아 정책에 시동을 건 닉슨 행정부는 주한 미군 감축에도 본격 돌입했다. 존슨 행정부 때부터 주한 미군 감축을 검토하기 시작했던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이 구상에 속도를 냈다. 핵심적인 골자는 주한 미군 병력 수를 6만 명에서 4만 명으로 감축한다는 것이었는데, 1970년 7월 이를 통보받은 박정희 정권은 한국이 5만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 미군을 감축한다면 북한의 오판을 야기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단호했다. 제7보병사단 및 3개 공군 비행대대의 철수를 단행하면서, '인계철선(引繼鐵線)'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던 비무장 지대 최전선에 배치된 제2보병사단의 후방 이동을 강행했다. 대신 5년간 15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제공해 한국군의 현대화를 돕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한미 양국은 이러한 주한 미군의 감축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골자로 한 공동 성명을 1971년 2월 6일에 발표했다.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한국군의 대규모 파병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하자 박정희는 미국이 한국을 버릴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닉슨 행정부가 한국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중국과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박정희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미국 내에서 박정희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고 있었던 것도 한미간의 갈등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한미간의 갈등은 1968년 북미간에 푸에블루호 사건과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거치면서 박정희의 대북 위협 인식이 극에 달해 있었던 시기와 조우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와 같은 미국의 안보 공약 후퇴 조짐과 북한 위협 증대에 대한 대비책으로 1974년부터 '율곡 사업'을 통한 한국군 현대화와 함께 비밀 핵 개발을 착수했다.
박정희의 핵 개발과 관련해 가장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문서는 1978년 6월 CIA가 작성한 <한국: 핵 개발과 전략적 의사결정>(이하 1978년 CIA 보고서)이라는 보고서이다. 2005년 미국의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밀 해제된 이 문서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는 국방과학연구소(ADD) 산하에 '백곰' 미사일 개발팀, 핵무기 개발팀, 화학무기 개발팀을 두고는, 해외에서 한국인 과학자들을 대거 채용해 이들 무기 개발에 참여시켰다.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이름은 '890'이었다. 미사일 개발팀의 목표는 미국의 나이키-허큘러스 지대지 미사일을 개량해 사정거리를 350킬로미터까지 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포착한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압력을 가해 사정거리를 180킬로미터로 낮췄다.
핵무장 잠재력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에도 착수했다. 1974년에는 벨기에로부터 재처리 시설을 수입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캐나다로부터는 '캐나다형 NRX 중수로(heavy water reactor) 구매를 시도했는데, 경수로(light water reactor)와 달리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로 사용하는 중수로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추출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원전이었다. 계획대로 중수로와 재처리 시설을 확보하면 한국은 핵무장에 필요한 시설을 갖출 수 있게 될 터였다. 중수로에서 가동된 사용후 연료를 재처리하면 핵분열 물질인 플루토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는 벨기에로부터 '플루토늄과 우라늄 혼합 핵 연료 제조 시설'을 구매하려고 했다. 이를 두고 CIA가 "벨기에의 시설은 한국에게 후행 핵 연료주기(the Back-end of the Nuclear Fuel Cycle)의 마지막 열쇠를 주는 꼴"이라고 분석했듯이, 박정희 정권은 '핵 연료봉 제조→중수로(원전)→재처리'로 이어지는 핵 연료 주기 완성을 목표에 뒀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의 정보기관은 1974년 극비 보고서에서 "한국이 10년 이내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야심에 찬 계획은 미국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되기 시작했다. 미국과 캐나다 정부는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압력을 가해 벨기에로부터 재처리 및 핵 연료 제조 시설 수입을 무산시켰다. 미국은 이들 시설을 "청와대 사람들이 핵무기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군부 내에 비밀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필요한 요소로 간주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975년 8월 27일에 주한 미국 대사인 리처드 스나이더(Richard L. Sneider)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계속 간다면, 양국 사이의 안보‧정치 관계 전반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핵 개발 계획을 취소하고 핵확산 금지 조약(NPT)에 가입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교훈을 일깨워주듯, 핵무장의 꿈이 NPT 가입으로 귀결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CIA가 박정희의 '프로젝트 890' 유보 및 철회 결심에는 "ADD의 빈약한 성과"도 작용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CIA는 ADD를 비롯한 한국의 연구개발 부서들이 예산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의 능력을 과장하고 정교한 프로그램들을 조직하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했다"고 주장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청와대의 일부 관리들이 한국을 이스라엘과 비교하면서 결국 미국도 한국의 핵 개발을 용인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초반부터 핵 개발에 착수한 이스라엘은 60년대 후반에 핵무장 능력을 확보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미국은 결국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용인하기로 했다. 69년 9월 닉슨 대통령은 골다 마이어 이스라엘 총리와 비밀 협약을 체결해,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용인하는 대신에, 이스라엘은 핵실험을 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핵보유를 선언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박정희가 핵 개발을 결심하는 데 중요한 참고 사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CIA에 따르면, 청와대 관리들은 "미국이 단기적으로는 반대하겠지만, 점차적으로 한국의 독자적인 핵 능력 확보를 인정하고 용인할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스라엘에는 감아주었던 눈을 한국에는 부릅떴다. 이에 따라 한국이 일정 수준의 핵무장 잠재력을 갖는 것을 미국이 허용할 것이라는 청와대의 기대감은 물거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