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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운동의 역사에서 새롭고도 가장 결정적인 국면은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5)의 교황 재위 시절에 시작되었다. 학자들은 그레고리우스가 선대의 개혁 운동으로부터 사상이나 정책면에서 얼마만큼이나 영향을 받았으며, 또한 얼마만큼이나 독창적이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레고리우스가 다른 어느 개혁자들 못지않게 개혁을 후원했을 뿐더러, 실제로 성직 매매와 성직자 혼인을 금지한 선대의 법령을 엄격하게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동시대인들은 그를 일컬어 거룩한 악마(Holy Satan)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법령을 열성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에 더하여 인간의 삶에서 교회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종래의 그리스도교적 이상은 은둔적인 것이었고, 완벽한 “그리스도의 종”은 소극적이며 명상적이고 금욕적인 수도사였다.
이에 비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그리스도교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생각했고, 교회가 “세상의 올바른 질서”를 창출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는 성직자들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순결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그를 반대했던 일부 성직자들은 그가 성직자들로 하여금 마치 천사처럼 살 것을 요구한다고 불평을 터뜨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가 국왕과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국왕과 황제는 교황의 명에 복종하여, 세상을 개혁하고 복음화 하는 일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세속 군주들이 순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한 한 지배권과 결정권을 계속 보유해도 좋다고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교황의 궁극적인 최고권을 받아들일 것을 기대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선임 개혁 교황들이 교황권과 세속권의 이원성(二元性)만을 추구했던 데 반해,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敎)·속(俗) 두 영역을 모두 지배하는 교황 군주 국가를 창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이 관습을 무시한 새로운 것이라는 반박을 받자, 그레고리우스 및 그의 뒤를 이은 교황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주께서는 ‘나는 관습이다’라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과거의 어떤 교황도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를 일컬어 “독보적인 위대한 개혁자”라고 한 어느 현대 역사가의 평가는 적절한 듯하다.
그레고리우스의 교황으로서의 활동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재위 초기부터 그는 “속인에 의한 서임식”, 즉 세속 지배자가 성직자의 직무를 상징하는 직장(職章)―주교의 경우 반지와 목장(牧杖)이 수여되었다―을 수여하던 의식을 반대하는 법령을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의식은 성직자를 임명·통제하는 황제의 오랜 권리였고, 그것이 없다면 황제의 권위는 크게 약화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야기된 투쟁은 서임권(敍任權) 문제가 중심이었으므로 통상 서임권 투쟁(the investiture struggle)으로 불리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교황과 황제 둘 중 누가 더 강력한 권위와 힘을 갖는지를 겨룬 투쟁이었다.
속인의 성직 서임에 대한 그레고리우스의 금지 명령을 하인리히 4세가 모독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빠져 들어갔다. 과거의 교황들 같았으면, 이러한 굴욕을 적당히 외교적으로 처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조치를 취했으니, 그는 황제를 파문하고 세속 군주로서의 그의 모든 권력을 정지시켰던 것이다.
이 대담한 조치를 알게 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일 황제들은 955년에서 1057년 사이에 재위했던 교황 25명 가운데 5명을 폐위시키고, 12명을 새로이 임명한 바 있었다. 실로 이 시기에 교황은 장기판의 졸(卒)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제 교황이 감히 황제의 폐위를 선언한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의 공식적인 폐위를 막기 위해 먼저 교황 앞에 굴복했음을 보았다. 황제의 굴복은 동시대인들을 더더욱 경악케 했다. 그 후 하인리히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모을 수 있었고, 이어 가공할 설전(舌戰)이 이어졌다. 한편 실제의 전투에서 황제는 교황 지원군을 수세에 몰리도록 할 수 있었다. 1085년에 그레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그는 패배한 듯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의 후임 교황들은 하인리히 4세 및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와 계속해서 투쟁을 벌였다.
서임권 문제를 둘러싼 길고도 격렬한 투쟁은, 1122년에 교황 칼릭스투스(Calixtus)와 황제 하인리히 5세 사이에 체결된 보름스 협약(the Concordat of Worms; 보름스는 독일에 소재한 도시)에 의해 종식되었다. 서임권 투쟁을 타협적으로 종결시킨 이 협약에서, 독일 황제는 성직자에게 성직의 종교적 상징인 직장을 수여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대신 세속 지배자의 자격으로서 주교에게 속권―속권(regalia)은 주교직에 수반하는 세속적 권리들을 말한다―을 수여할 권한을 허용 받게 되었다. 황제는 주교들의 세속적 주군(主君)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협약의 내용은, 서임권 투쟁이 황제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교황의 위신을 드높였다는 사실에 비하면 대단치 않은 것이다.
덧붙일 것은, 이 극적인 투쟁은 서유럽의 성직자들을 교황을 정점으로 규합시키고, 사태를 주시하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상한 주목을 끌었다는 사실이다. 어느 동시대인이 말했듯이, “길쌈하던 아낙네와 작업장의 직공들마저도” 만나기만 하면 서임권 투쟁 이외에는 아무 것도 화제 거리로 올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것은 과거에 종교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배제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 문제에 깊숙이 끌려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