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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라의세상보기 스크랩 희양산 봉암사 ⑤-닥나무실로 누더기 옷 기워입고...
찰라 최오균 추천 0 조회 667 12.02.25 09: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치원과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남한 최고의 금석문

 

닥나무 실로 누더기 옷 기워입고

평생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도인 지증대사의 일대기..........

 

 

신라시대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83세 고령의 분황사 혜강(慧江) 노스님이 글을 새겼다는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문은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20세기 한국서예 최고봉으로 꼽히는 고(故) 여초 김응현(金應顯) 선생의 말을 빌리면 이 비문은 "남한에 남아 있는 금석문중 최고봉"이라고 한다.

 

36세의 젊은 대학자 최치원이 헌강왕으로부터 왕명(885)을 받은 뒤 8년만(893년 진성왕 7년)에 완성을 하고 혜강 노스님이 정성을 다해 새긴 비문은 젊음과 늙음이 어우러진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그러니 봉암사에 가면 반드시 이 탑비를 방문하여 지증대사의 선풍과 최치원의 명문을 느껴보아야 할일이다.

 

나는 봉암사에서 가장 오랜된 목조거물인 극락전을 둘러보고 대웅전을 지나 최치원의 명문이 새겨진 지증대사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지증대사적조탑비에는 봉암사의 유래와 지증대사의 일대기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비문은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글자를 온전히 읽어 볼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사진 : 지증대사적조탑비 뒷면) 

 

최치원은 비문 서두에 불교의 연원과 한국 고대 불교의 역사를 장대하게 서술한 후, 신라 선종사를 3시기로 나누어 정리하고, 지증대사의 행적을 12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승여들이 다수 등장해 신라 하대의 선종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최치원이 뼈를 깎는 고통으로 8년 동안 새긴 불후의 명작

 

지증대사 탑비는 왕명을 받은 지 8년이란 오랜 세월을 걸처 완성을 한 남한 최고의 금석문으로 꼽고 있다.  비문 완성이 오래걸린 이유를 살펴보면  "신이 비록 무인(武人)의 재목이 아니기 때문이긴 하나, 문인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바야흐로 마음껏 재주를 부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주상전하의 승하하심을 당하였는데"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갑자기 왕명을 내린 헌강왕이 승하를 하여 늦어지기도 했지만, 또한 최치원이 이 비문을 짓는데 얼마나 심사숙고하여 심혈을 기우렸는지 다음 내용을 보면 짐작을 하 수 있다.

 

"문인인 영상(英爽)이 와서 글을 재촉하였을 때 금인(金人-지금 세상사람)이 입을 다물었던 고사에 따라 돌같은 마음을 더욱 굳히었다. 참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요구는 몸을 새기는 것보다 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림자는 8년 동안 함께 짝하였으며, 말은 세 번을 되풀이했던 것에 힘입었다. 저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은 일로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다..... 일은 꽃을 따서 모은 것과 같은데, 글은 초고 없애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가시나무를 쳐내지 않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쭉정이와 겨가 앞에 있음이 부끄럽다"

 

이렇게 말하며 최치원은 비문을 짓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쓰고 83세의 분황사 혜강스님이 글을 새겼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쌍계사 진감국사 대공탑비, 만수산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경주 대숭복사비와 함께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써 신라시대 선종의 유래를 연구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탑비는 가로 164cm, 높이 273cm, 두 께 23cm로 헌강왕이 최치원으로 하여금 비문을 짓도록 왕명을 내렸는데(885년), 최치원은 왕명을 받은 후로부터 7년 후인 893년(진성여왕 7년)에야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년)에 건립되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천년 동안 봉암사를 지키고 희양산문을 있게 한 핵심이다. 따라서 봉암사의 역사는 지증대사와 함께 시작된다. 봉암사에 가서 지증대사적조탑비를 보고 오지 않으면 헛 다녀 온 것이며, 비문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왔다면 역시 한국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봉암사를 건성으로 다녀 온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봉암사를 가기 전에 지증대사 탑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탑비 원문이 새겨진 현장에서 천 년 전의 흔적을 한 번쯤 되새겨 본다면 참으로 봉암사 성지순례를 다녀 온 보람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우매한 중생이 어찌 천년전 최치원의 명문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다만 살을 에는 강추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봉암사 산문을 들어가 비분앞에 선 것 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그 감동을 마음에 새기고자 서울로 돌아와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져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여 보았다. 그리고 미력하나마 카메라에 손가락이 얼어붙는 추위를 무릅쓰고 찍어온 사진과 함께 한달 동안  이글을 다듬어 실어본다. 8년 동안 이 비문을 짓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몸에 새기듯 이 글을 지은 최치원의 마음을 헤아려보면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는 8척 장신

 

지증대사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으로 속성은 김씨이며 경주사람이다. 아버지는 찬괴(贊?)이며 어머니는 이(伊)씨이다. 신라 헌덕왕 16년(824년)에 태어나, 17세에 부석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경의율사에게 사사하였다. 8척이 넘었고, 외모가 건강하고 말소리가 웅장하고 맑아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헌강왕 8년(882년)에 세상을 뜨니, 법랍은 43세이고 세수는 59세. 헌강왕은 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며 시호를 지증, 부도탑을 적조(寂照)라 내렸다.

 

“서(序)에 말한다. 오상을 다섯 방위로 나눔에 동방에 짝지어진 것을 인(仁)이라하고, 삼교(三敎교)의 명호를 세움에 정역에 나티난 것을 불(佛)이라한다. 인심(仁心)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능인(能仁)’이라고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지증대사적조탑비와 부도비를 모신 누각

 

지증대사의 일대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최치원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는 흐름을 유장하게 풀어가는 것으로 서서히 탑문의 불을 지펴 나간다. 비문은 신라에 불교가 아도화상에 의해 유입된 이후 9세기 도의(道義)선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익혀 전파한 이후 훗날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말기부터 고려초기까지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은 아홉산문, 곧 남원 지리산 실상산문, 장흥 가지산 가지산문, 강릉 굴산사지 사굴산문, 곡성 동리산 태안사 동리산문, 보령 성주산 성주산문, 영월 사자산 사자산문, 문경 희양산 희양산문, 창원 봉림산 봉림산문, 해주 광조사 수미산문을 말한다) 개창조 밑거름이 되는 법맥을 자세하게 설파한다.

 

"교가 일어남에 있어, 아비달마대비파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소승)이 먼저 이르자 우리나라(四郡)에 사제(四諦-사성제)의 법륜을 굴리고, 대승교가 뒤에 오니 전국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장경(長慶-821년)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스님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가서 서당(西堂)의 오지(奧旨)를 보았는데,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智藏禪師)와 비등해져서 돌아왔으니, 지인(智人)이 처음으로 현계(玄契-마음법)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최치원은 중국에 귀의한 스님을 거론하고, 고국에 돌아온 도의, 지리산 홍척, 태안사 혜철, 쌍계사 혜조, 굴산사 범일, 성주사 무염 등을 일일이 열거하며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기술한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금(益州金) 진주금(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溪寺)의 혜조(慧昭), 신흥언(新興彦), 통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보리종(菩提宗) 등인데,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 것이었다."

 

 

여섯 가지 기이한 일(六異)

 

 

▲지증대사부도비

 

4조 도신의 고손제자

최치원은 당의 제4조 도신(道信)으로부터 선풍을 전수받아 쌍봉-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으로 이지어는 법맥을 거론하고, 혜은 스님으로부터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고손제자가 되는 지증대사에 이르러 큰 빛을 발하게 된 것을 설파한다.

 

"법의 계보를 보면, 당(唐)의 제4조 도신(道信)을 5세부(世父)로 하여 동쪽으로 점차 이땅에 전하여 왔는데, 흐름을 거슬러서 이를 헤아리면, 쌍봉(雙峰)의 제자는 법랑(法朗)이요, 손제자는 신행(愼行)이요, 증손제자는 준범(遵範)이요, 현손제자는 혜은(慧隱)이요, 내손제자(來孫弟子)가 대사(지증)이다. 법랑대사는 대의사조(大醫四祖)의 대증(大證)을 따랐는데, 중서령(中書令)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도신대사명(道信大師銘)에 이르기를, “먼 곳의 기사요 이역의 고인으로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이르러,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갔다”  하였으니,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므로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비장한 것을 능히 찾아낸 이는 오직 신행대사뿐이었다. 그러나 때가 불리하여 도가 미처 통하지 못한지라 이에 바다를 건너갔는데, 천자에게 알려지니, 숙종(肅宗)황제께서 총애하여 시구를 내리시되, “용아(龍兒)가 바다를 건너면서 뗏목에 힘입지 않고, 봉자(鳳子)가 하늘을 날면서 달을 인정함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신행대사가 ‘산과 새’, ‘바다와 용’의 두 구로써 대답하니 깊은 뜻이 담겼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삼대(三代)를 전하여 대사(지증)에게 이르렀는 바, 필만(畢萬)의 후대가 이에 증험된 것이다."

 

이어서 지증이 잉태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이한 행적과 숨겨진 이야기는 귀신이 출몰하는 것 같아 붓으로 다 기록 할 수 없다며,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 옳은 것(六異와 六是)로 간추려 표시하였다.

 

임신한지 400일만에 부처님 탄신일에 태어나다

지증의 어머니가 지증을 잉태할 당시 기묘한 태몽을 꾸었다. 꿈에 한 거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과거의 비파시불(毘婆尸佛)로서 말법의 세상에 사문이 되었는데, 성을 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용보(龍報)를 따랐으나, 업보가 이미 다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려 합니다.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태몽을 꾼 지증의 어머니는 임신하여 거의 4백일을 지나 부처님 탄신일에 태어났다. 꿈이 마야부인의 태몽고사에 부합되어, 가죽 끈을 찬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경계하게 하고, 스님들로 하여금 정밀하게 불도를 닦도록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지증이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도인(道人)이 문 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오신채와 육류(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 하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숙습(宿習)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9살에 집을 도망쳐 나와 중이되다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지증은 거의 몸이 다 상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중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예날에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자 지증은 이를 느끼고 까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중이 되겠다고 청하였다.

 

▲천년동안 봉암사를 지켜온 지증대사적조탑비

 

어머니는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자, 지증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이야기를 듣고 도망쳐 영주 부석사에 가서 중이 되었다. 지증이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집나간 아들을 그리다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지극정성으로 간병을 하니 어머니 병이 나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증이 고질이 전염되어 백방의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자 점을 쳤더니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빌건대 부처님의 아들로 삼겠습니다"고 하자, 이틀 밤을 지난 다음에 지증은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지증은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신광이 빛남을 깨닫고 이를 탐구하여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일으켜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육도집경(六度集經-부처님이 성불하기전 6바라밀을 닦았던 전생이야기)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애쓴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지증대사부도비

 

 

닥나무실로 기어 입은 해진 옷을 입고 수행에 전념

지증이 하안거를 마치고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밤에 꿈속에서 보현보살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귀를 끌어당기면서 말하기를, “고행을 실행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행하면 반드시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뒤 놀란 나머지 오한이 든 것 같았다.

 

잠자코 살과 뼈대에 새겨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옷과 솜옷을 입지 않았고, 긴 실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삼이나 닥나무에서 나온 것을 사용하였으며, 어린 양가죽으로 만든 신도 신지 않았다. 하물며 새깃으로 만든 부채나 털로 만든 깔개나 그 밖의 것을 사용하겠는가. 지증은 평생 해진 옷 한벌로 수행에 전념하였다. 삼베옷이나 해진 솜옷을 입은 자로 하여금 수행에 눈을 뜨게 하고 명주옷을 입은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였으니, 계율로써 자신을 단속함의 기이함이 다섯째이다.

 

지증은 남을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깨치기를 더 좋아하였다. 후학들이 다투어 배우기를 청하였으나 지증은 이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살 꼴이 되리라”

 

어느날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무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 수석사(鷄藍山 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봉암사 조사전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경을 읽는 자로 하여금(교종인) 세 번 살피게 하고 선실을 경영하는 자(선종인)로 하여금 아홉 번 생각하게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이 기이함의 여섯째이다.

 

 

여섯가지 올바른 일(六是)

 

죽만 얻어먹고도 금석에 새겨 은혜를 잊지않는 스님

864년 겨울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당래불(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하생(下生)이라 이르고 상공(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읍사(邑司)의 영유인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옹주의 청을 받고 대사가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현계(賢溪)이고 땅이 우곡(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안락(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옹주가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지증대사부도비 기단부 공양상. 정교한 조각솜씨는 치밀하고 세밀하다.

 

어느 날 문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故) 김의훈(金?勳)이 나를 승적(僧籍)에 넣어 중이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불법으로써 보답하겠노라” 하고는, 곧 1장 6척되는 철불상을 주조하여 가장 광택이 나는 황금을 발라, 이에 절(仁宇)을 수호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도록 하였으니, 보답을 아는 것의 옳음이 둘째이다.

 

지증이 44세 때인 867년, 단의옹주가 농장과 노비문서를 절을 위해 바치고, 어느 승려라도 여관처럼 알고 찾을 수 있게하고, 언제라도 바꿀 수 없도록 하자 대사는 "왕녀께서 법희(法喜)에 의뢰하심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불제자인 내가 선열(禪悅)을 맛봅이 어찌 헛되이 하겠는가. 내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척이 다 죽고 없으니, 내 재산을 길가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제자들의 배를 채워주리라"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였으며 훗날 헌강왕은 이 재산 증여를 공식으로 인정하였다.

 

 

▲지증대사적조탑비에 바라본 봉암사

 

대사는 죽만 얻어먹고도 능히 금석에 새겨 은혜를 잊지 않았다. 목숨을 이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仁)과 더불게 하고, 노래를 부른 이에게 상을 주고자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뉘우치도록 하였으니, 대사가 시주로서 희사한 것의 옳음이 셋째이다.

 

도적의 거처가 될 희양산에 절을 짓다

경 사람 심충이 찾아와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鳳巖)·용곡(龍谷)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선사(禪寺)를 지으십시오”라고 말하자, 지증은  처음에는 사양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전추(前騶)로 삼은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석장을 짚고 나뭇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희양산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지증대사적조탑비 기단부의 돌거북. 입과 코부분이 파손되어 있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대사가 교화한 지 수년이 되었을 때, 산에 사는 백성으로 도적이 된 자가 있어 처음에는 감히 법륜에 맞섰으나 끝내 감화하게 되었다. 능히 정심(定心)의 물을 깊이 헤아려서 미리 마산(魔山)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팔이 부러진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고, 용미(龍尾)를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선심(善心)을 개발한 것의 옳음이 넷째이다.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지증이 현계산 안락사로 돌아왔을 때 헌강왕의 초대를 받아 서라벌 반월성 월지궁으로 향하여 산에서 내려온다. 지증이 선원사에 이르러 휴식하게 되자, 편안히 이틀 동안을 묵게 하고는 인도하여 왕은 월지궁(月池宮)에서 심(心)을 질문하였다.

 

때는 가는 담쟁이 덩굴에 바람기가 없고(한여름), 궁내의 온실수에 바야흐로 밤이 되었는데, 마침 달그림자가 바로 못 가운데에 비친 것을 보고는, 대사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저 평온한 정경, 마음, 자세, 그런 세상살이면 족하다는 뜻이었다.

 

임금께서 상쾌한 듯 흔연히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이심전심으로 이 말을 알아듣고 크게 기뻐하여 스님께 절을 올리고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하신바 풍류가 진실로 이에 맞습니다.”라고 하며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이는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였을 때 마하가섭(摩訶迦葉)만이 그 뜻을 깨달아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일화와 유사하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할 때 세운 것으로 아담한 형태와 고푸스런 상륜부가 돋보인다.

 

이윽고 임금의 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대사가 대궐을 떠나려하자, 임금께서 충성스런 신하로 하여금 뜻을 비추어서,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소를 소라 하면 값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요, 새로써 새를 기르신다면 그 은혜 됨을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작별하기를 청하오니 이를 굽히려하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있는 지증의 겸손함은 참으로 감동을 준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운어(韻)로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베풀어도 이미 머물지 않으니 불문(佛門)의 등후(鄧侯)로다. 대사는 지둔(支遁)이 놓아준 학(鶴)과 같거늘, 나는 속세를 초월한 갈매기가 아니로다”라고 하며 감탄하였다.

 

그리고  십계(十戒)를 받은 불자인 선교성부사(宣敎省副使) 풍서행(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는 데 호위토록 하였다.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루터기에서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물 만드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으니, 세상에 나가서 교화하고 물러와 도를 닦는 것의 옳음이 다섯째이다.

 

 

▲탑비 밑에 있는 구대웅전. 지금은 금색전으로 변하였다.

 

임금이 하사한 가마를 타지않고 걸어가다

대사는 세간에서 도를 행함에 있어 멀고 가까움과 평탄하고 험준함을 가림이 없었고, 일찍이 말이나 소에게 노고를 대신토록 하지 않았다. 지증이 산으로 돌아감에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넘고 건너는 데 지장을 주므로, 이에 임금께서 종려나무로 만든  가마를 내리시니, 사자에게 사절하며 말하기를, “세속의 똑똑한 사람도 가마를 사용하지 않거늘 하물며 삭발한 중으로서야. 그러나 왕명이 이미 이르렀으니, 그것을 받아 빈 가마로 가다가 병자가 생기면 도와주는 도구로 삼자고 했다.

 

그리하여 빈 가마를 앞세우고 가다가 얼마 가지 못하여 지증 자신이 병으로 말미암아 안락사(安樂寺)에 옮겨가고 나서 석장을 짚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용하였다. 병을 병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공을 깨닫도록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취사(取捨)의 옳음이 여섯째이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안락사로 돌아온 지증대사는 이듬해인 882년 12월 18일 열반에 들었다. 지증대사는 저녁 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 도란 이야기를 하던 중 책상다리를 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태양빛에 신비롭게 반사되는 지증대사부도비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사라수(沙羅樹)와 같았다."

 

최치원은 지증대사의 열반을 이렇게 감탄사를 부여하며 표현했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랑이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사라수(沙羅樹)와 같았다고 하며 사라수 옆에서 열반에 드신 부처님의 열반에 비유하였다. 외물이 감응함도 이같이 극진하거늘,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수 없다는 것. 지증의 유해는 이틀 밤을 넘겨 학계산(賢溪山)에 임시로 유체를 모셨다가, 1년 뒤의 그 날에 희양산으로 옮겨 장사지냈다.

 

 

 

 

비문에 마지막에  최치원의 지증대사의 공적을 계속 찬탄한다. 아무리 글로 다해도 지증대사의 도를 나타낼 수 없는 자신의 우매함을 한탄한다.

 

"사(詞)에 이르기를,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능히 흑을 지키었네. 두 교가 한껏 천하의 본보기라 일컬었지만, 석가는 힘 겨루는 것을 나무랐으니, 십만 리 밖에 서역의 거울이 되었고, 일천 년 뒤에 동국의 촛불이 되었네.

 

무엇하러 참바를 잡고 말뚝을 박을 것이며, 무엇하러 종이에게 붓을 핥도록 하고 먹물을 머금게할 것인가. 저들은 혹 멀리서 배우고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나는 능히 정좌(靜坐)하여 온갖 마적을 물리쳤도다.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고, 정욕(情欲)의 밭에다 농사를 그르치지 말며, 수없는 항하사(恒河沙)를 두고 만(萬)이다 억(億)이다 논하지 말고, 외로이 뜬 구름을 두고 남북을 논하지 말라.

 

집안의 대를 이을 부유한 처지에서 과연 누가 형극의 길에 들 것인가. ?은 선비의 도로 대사의 정상(情狀)을 들추기가 부끄럽도다. 발자취가 보당처럼 빛나니 이름을 새길 만한데, 나의 재주가 금송(錦頌)을 감당하지 못하여 글을 짓기 어렵도다. 시끄럽고 번거로운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산중으로 와서 전각을 살펴보노라."

 

▲지증대사의 선풍이 서린 봉암사 '희양산문태고선원'

 

헌건왕은 의원을 보내 문병하시고 파발마를 보내 재를 지내도록 했다. 보살계를 받은 불자 김입언(金立言)을 보내 지증선사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최치원은 비문 말미에 지증대사의 도력을 감히 글로서 서술하기가 어려움을 한탄하며 글을 써 내려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서술한다.

 

▲범종각

 

"저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은 일로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고 용력(勇力)을 과시하기에 여유가 있는 것은, 실로 곧 대사가 안으로 육마(六魔)를 소탕하고 밖으로 육폐(六蔽)를 제거하여, 행하면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포괄하고 좌선(坐禪)하면 육신통(六神通)을 증험하였기 때문이다. 일은 꽃을 따서 모은 것과 같은데, 글은 초고 없애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가시나무를 쳐내지 않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쭉정이와 겨가 앞에 있음이 부끄럽다. 자취가 ‘궁전에서의 놀음’을 따랐으매, 누구인들 ‘월지궁(月池宮)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을 우러르지 않겠는가. 게(偈)는 칠언연구(七言聯句)를 본받았으니, 바라건데 해 뜨는 곳에서 고상한 말로 비양(飛揚)하라. 분황사의 중 혜공(慧江)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기다. 용덕(龍德-경명왕) 4년(924) 세차(歲次) 갑신(甲申) 6월 일에 건립을 마치다."

 

▲삼층탑과 희양산

 

 

최치원은 쭉정이와 겨와 같다고 하며 비문을 마무리한다. 과연 도를 이룬 지증대사의 의중을 설파할만한 당대의 명문ㅏㅇ이다. 최치원의 12세에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18세에 중국에서 빈공과에 장원급제를 한 천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최치원은 경주 최씨로 아버지는 견일(肩逸)이며 숭복사를 창건 할 때에 관계한 바 있으며, 경주 사량부 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와 매탄사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신라말기 최고의 문호인 그는 <사륙집><계원필경>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으나 난세를 만나 마음껏 포부를 펼쳐보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과나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유유저적하며 유람을 하다가 만년에 해인사로 들어가 그 뒤의 행적이 알려지지않고 있다.

 

나는 섬진강에 살 때에도 최치원은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문을 여러차례 답사한바 있다. 이제 이곳 산문에 들어가기 힘든 봉암사에서 다시 그의 명문을 대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인걸은 간데 없으나 그의 족적은 능히 이곳 지증대사비문에서 찾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봉암사에는 지증대사비문외에도 보물로 지정한 것이 4개가 더 있다. 그것은 심층석탑, 지증대사부도비, 정진대사부도비, 정인대사탑비이다. 그러나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적조탑비문을 하나만 보아도 봉암사에 온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남훈루에서 바라본 희양산

 

탑비의 머릿돌과 받침돌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받침돌은 머리가 용이고, 몸은 거북모양으로 머리 위에는 뿔이 솟아 있고, 입에는 여의주가 물려있다. 머릿돌에는 연꽃무늬와 여덟마리의 용이 얽힌 형태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조각 역시 뛰어나다.

 

이토록 지증의 선풍이 혁혁이 전해내려오는 희양산 자락에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하고 이쓴 있는 금세의 학인들은 과연 무엇을 심(心)에 새겨 넣고 있을까? 만약에 이런 중생에게도 이처럼 불후의 명당에서 수행을 하기를 허된다면 지증대사의 발가락이라도 붙잡고 밤을 새우고 싶을만한 장소다. 그러나 어찌 속세에 머물고 있는 탁인이 이 청정도량에 가부좌를 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나는 지증대사의 비문에 수차례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위대한 도력과 그리고 그 도력을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8년동안 완성에 최치원 노고에 감사를 드려야 했다. 또한 83세의 노구로 돌에 이 글을 새겨 천년이 지나도 끄덕없이 그 뜻을 전하게 해준 해강 노스님에게도 엎디어 감사의 절을 올렸다. 그리고 살을 깎는 추위도 잊은 채 나는 천년이란 세월의 시공을 초월하여 최치원과 지증대사의 흔적과 조우를 한 후 계곡을 따라 발걸음을 백운대로 옮겼다. 그곳에 있는 얼음계곡에 세운 마애보살입상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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