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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서를 읽을 때
할렐루야!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많은 사람과 함께 성경 정리를 통해서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해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저도 모든 분과 함께 배우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을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바울 사도, 베드로 사도, 그리고 요한 사도와 야고보와 유다, 그리고 저자를 알 수 없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쓴 서신서를 공부하게 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함께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배울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 옵소서
샬롬! 비가 그치고 나니 온 산이 푸르고 공기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밭에 나가서 고추도 심고 호박 모종과 토마토 모종도 준비하고 당근과 시금치는 직접 씨를 뿌리려고 합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경계를 지나쳐 타인의 소유를 탐을 내면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뺏으면 가난한 사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약탈을 당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보복을 잘 하지도 못했습니다. 에덴 부근에서 잘 살다가 늘 이렇게 평화로운 곳을 아브라함이 롯에게 자신의 목축지를 양보하고 이주한 것과 같이 이동하고 이동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곳 더 이상 갈 곳 없는 땅끝 한반도에까지 왔는가 봅니다. 구약은 특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민의 질서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반드시 질서가 유지되어야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이 전해지기 전 공자가 세운 유교적 예적 질서는 너무나 아름다운 인간 사이의 질서입니다. 어떤 분은 공자가 없었더라면 세상은 너무나 무질서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인간의 질서는 물론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질서를 바르게 세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 질서는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이는 구약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이것이 구약의 율법의 근본정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바탕으로 질서를 세우기를 바라셨는데 사랑은 하지 않고 질서만 세우려 하는 것을 책망한 것이지 결코 질서 자체를 없애려고 하신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질서가 있어야 하고 자연 속에는 스스로 두면 너무나 아름다운 질서가 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 속에도 너무나 정밀하고 엄청난 질서가 있습니다. 질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합니다. 자연이 스스로 질서를 지키면서 존재하는 것을 보면 철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관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인간이 너무 욕심을 부리면 이 질서가 파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도 사랑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고 봅니다.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데 구체적으로 꼭 필요하고 조목 조목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하면 되지 않는다고 직접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절대로 없애지는 아니하시고 또 없애러 오시지 않고 도리어 세우려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서론을 길게 이야기하냐 하면 바울이나 예수냐는 논쟁이 있고 복음서냐 서신서냐 특히 로마서냐 논쟁이 있고 하나님 나라이냐 칭의냐 라는 논쟁도 있는데 이는 바울의 신분을 보면 그리고 자신의 고백을 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바울서신이나 지금 우리가 공부할 서신서들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저자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죄인인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죄 사함을 받고 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임을 반드시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같은 신약성경에 속해 있고 또 성경책에 있는 내용이지만 우리가 지금 배울 서선서는 모두가 다 이렇게 예수님의 종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사복음서의 내용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태초에 계신 말씀이시고 구약의 약속된 메시아이십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 그리고 오실 예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 사복음서도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마태를 비롯한 4분의 사람들이 기록하고 지금 우리가 배울 서신서도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바울과 다른 또 다섯 분이 기록을 했기 때문에 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로마서의 칭의로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무력화시킨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고백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죽도록 전한 분인데 즉 복음을 이방인에 전하신 분인데 이분이 로마서에서 칭의를 논하면서 예수님께서 여러 번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언급하신 부분(예수님께서 너무나 중요하기에 진실로 진실로 붙이시고 또 결단코를 붙여서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부분들)을 무시하고 믿으면 칭의되고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을 했다고 어떤 분들이 주장을 하고 있는데 진짜로 바울이 이런 의도로 로마서를 썼다면 바울은 정말로 큰일이 날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께서 진실로 예수님의 종으로써 주인을 잘 전하고 주인의 말에 전혀 위반하지 않고서 칭의를 논했다면 이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간곡하고 강조하고 엄격히 말한 부분을 바울의 로마서를 이상하게 해석을 해서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금하신 내용을 겁도 없이 날마다 행할 것인지 아니면 정말 성경을 올바로 이해를 해서 바울을 예수님의 종으로 보고서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로 어긋나지 않는 칭의의 올바른 의미를 제대로 배워서 살아야 할 것인지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래의 글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시도한 글입니다. 로마서의 칭의는 정말로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모든 내용이 올바릅니다. 사람이 해석을 잘못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발생을 합니다. 해석보다는 조용히 오랫동안 정리를 해보는 것도 좋고 무엇보다도 성경을 깊이 몰라도 그냥 모두를 사랑하면 제일 안전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어려운 분들을 사랑하고 차를 타고 가면 모두에게 양보를 하면 됩니다. 차를 타고 양보만 실천하여도 너무나 좋은 세상이 됩니다. 양보하는 사람 너무나 보기가 어렵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상대방이 양보를 하지 않으면 길이 없는데도 빠른 속도로 가면서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살인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지금 세상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운전을 하고 있고 미국 사람이 한국에 오면 놀라는 것 셋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목사가 10만 명이나 되고 신학생 교수님 그리고 성도가 1000만 명이나 되는데 약 1-3%만 양보를 실천하는 사람이 생기면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믿어도 한참 잘 못 믿고 멋대로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런 일이 생깁니다. 올바로 배워서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와 잘못 배워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지옥 갈 수 있는 죄를 밥을 먹듯이 짓고 있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운전하는 곳에서 양보를 실천하고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너무나 많은 세상의 문제가 해결이 가능하고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덜 죽고 덜 부상을 당할 것입니다. 온 국민의 3% 믿는 이의 10% 정도만 양보를 실천해도 너무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말이 너무나 길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나 바울이냐의 논쟁의 글을 먼저 보고 다음에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글을 보겠습니다.
예수인가 바울인가, 하나님 나라인가 칭의 인가
스캇 맥나이트 Scot McKnight
2011.8.25 김병규 옮김
많은 성경학자와 성도들은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강조한 반면 예수님은 거의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설교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누군가는 예수님과 바울이 서로 다른 두 복음을 전했다고 결론짓는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바울 모두 실제로 이신칭의를 전파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그 둘이 전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일까?
나는 사도 바울과 함께, 그의 터 위에서, 그를 통해, 그 안에서 자랐다. 바울의 편지는 우리가 보는 성경의 핵심이었다.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부터 지금껏 기억나는 설교는 매주 절별로 전체를 강해한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 설교뿐이다. 복음서나 예수님에 관한 설교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 1년에 두 번은 바울이 아니라 다른 데 초점을 맞췄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설교를 들었던 성탄절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설교를 들었던 고난주간이 바로 그때다. 우리는 바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었고, 아무도 이 사실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나는 바울 식으로 생각하고 믿으며 사는 걸 배웠다. 모든 것을 바울의 신학이라는 체로 걸러냈던 것이다. 이신칭의는 복음을 보는 렌즈였으며, “성령 안에서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는 렌즈였다.
나는 바이블 대학(현재의 코너스톤 대학교. 미시건주 그랜드래피즈에 위치)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들을 수 있는 성경 강의를 최대한 수강했다. 다시 한 번 바울은 주인공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대학 졸업반 시절 나는 랄프 마틴이 쓴 「신약의 초석」(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역간) 첫 권을 읽고서 복음서의 새로운 매력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신학대학원에서의 첫 경험만큼 나를 압도한 것은 일찍이 없었다. 트리니티복음주의 신학대학원에서 월터 리펠트 교수의 공관복음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 그리고 복음서에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때 그곳에서 나는 평생 예수님과 복음서를 탐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후 나는 마태복음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 뒤 몇 년이 지나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예수님과 복음서에 관해 강의할 수 있었다. 나는 예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어떻게 바라보셨는지 전부 다 가르쳤다. 내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해 너무 자주 강의했던 탓에, 한 학생이 “교수님이 하시지 않은 강의라고는 ‘예수님이 바라본 예수님’밖에 없을 겁니다”라는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이전에 나는 바울을 사랑했고 그와 함께 사고했다. 하지만 마치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처럼 그분을 새롭게 마주했을 때, 나는 예수님과 함께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 동료는 가끔 내가 바울을 너무 무시한 채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넌지시 묻곤 했다. 정기적으로 바울 서신 일부를 강의하고 있으니, 글쎄, 내가 바울을 무시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바울 식으로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오직 예수님 식으로만 생각했다. 나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사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전에 강렬히 사로잡혀서 바울 서신을 펼쳐 읽을 때마다 매번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복음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
나만 유별난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바울에서 예수님으로 옮겨갔다. 복음주의자 사이에서는 누가 결정권을 쥐는가 하는 문제, 즉 예수님이냐 바울이냐 하는 문제로 여전히 긴장이 감돈다. 우리가 복음을 가르치고 살아내는 데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아니면 이신칭의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가 그 문제다.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복음주의 운동의 근원적인 동력이 종교개혁과 대각성 및 18세기와 19세기의 부흥이라는 사실, 곧 복음주의 운동이 하나부터 열까지 바울로 인해 생겨난 운동이라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20세기 초반, 하나님 나라를 진보와 정의에 연결한 듯 보이는 사회 복음이 등장하자 복음주의 운동권 내부에서는 바울을 더욱 강조하기 시작했다. 최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전을 새롭게 발견한 몇몇 복음주의자는 복음주의 내부로부터 그들이 사회 복음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는 경고를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다. 많은 복음주의자가 바울 중심적인 신학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일으킨 데는 조지 엘든 래드의 「미래의 현존」(The Presence of the Future), 「하나님 나라: 조지 래드 전집 1」(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역간), 그리고 「회심」(한국 IVP 역간)으로 잘 알려진, 단호하면서도 끈질기게 정의를 부르짖는 짐 월리스의 목소리, 그리고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싹을 틔운 사회적 양심이 한몫했다. 이 상황에 이르게 한 여러 요인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풀러신학대학원 캠퍼스 중 한 군데서 강의하는 소장파 신약학자 대니얼 커크가 최근 내게 검토를 요청하며 원고 하나를 보내왔다. 처음에 제안한 제목은 「나는 예수를 사랑했지만 바울도 사랑했을까?」(Jesus Have I Loved, But Paul?)였다. 이 제목은 내가 지난 15년간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관찰한 바를 완벽히 잡아낸 것이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예수님을 다루면 좋아하다가도 바울로 옮겨가면 이내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뀐다. 복음주의가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놓고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과 오늘날 많은 이들이 편 가르기를 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젊고 진지한 복음주의자들을 많이 만난다. 하나님 나라 언어에 흠뻑 빠진 이들은 바울을 거기에 맞추려 애를 쓰는 반면 바울의 신학적 용어에 젖어있는 이들은 예수님을 바울에게 맞추려 낑낑댄다. 나 역시 바울의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맞춰보려 몸부림쳤다가 후에는 예수님을 바울의 메시지에 적합하게 만들어보려 버둥거려봤기에 그 경험을 이해한다.
두 가지 접근
복음주의자들은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즉 바울과 예수님을 좀 더 완벽하게 조화시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눈에 띄는 점은 각각의 접근법이 자신의 것이야말로 복음 자체를 분명히 드러낸다고 상정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접근법은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철저히 숙지해서 바울이 그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보여주는 방법이다. 다른 접근법은 바울의 복음과 그의 칭의 신학을 완벽히 익혀 예수님이 그에 얼마나 들어맞는지 보여주는 방식이다. 각각의 접근법은 별도의 수고를 동원해 특별한 설명을 덧붙이는데, 이 과정에서 각각의 내용을 살짝 구부리거나 둘을 억지로 끼워 넣을 수밖에 없다. 각각의 접근은 예수님과 바울의 메시지가 일관성 있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이신칭의의 복음이 하나이자 동일하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중심의 접근법을 생각해보자. 주로 ‘시작된 종말론’이라 불리는 조지 래드 계열의 사고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로 정의된다. 이는 마태복음 12:28, 곧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구절이나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너무 가까워서 그 임재를 지금 느낄 수 있으니) 회개하고 믿으라고 말하는 마가복음 1:15 같은 본문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역동적이고 인격적이며 구속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임재라는 틀을 이신칭의에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묘한 차이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칭의에 대한 로마서의 증언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적 구속에 관한 에베소서의 증언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한 문제들 때문에 이런 방식의 조화를 보는 내 양심은 매번 불편하다. 먼저 바울의 신학이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 중심적이라고 생각할 만큼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충분히 얘기한 적이 없다. 바울 서신 중 하나님 나라를 언급한 곳은 열다섯 군데가 못 된다. 바울을 하나님 나라라는 틀에 맞추는 일은 바울 서신만 가지고는 어렵다. 오히려 이리저리 꿰어 맞춰야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바울은 하나님 나라라는 측면보다 구원론과 이신칭의 및 교회론을 바탕으로 사고를 전개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을 공정히 다루려면 바울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더구나 이러한 접근법에는 보다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 이상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나는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 나라가 개인적인 체험이나 회심이길 바라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바울에 끼워 맞추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다음과 같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없다. 1세기 모든 유대인에게 하나님 나라는 최소한 왕(예수님 또는 하나님), 백성(이스라엘), 영토(그 땅 또는 이스라엘) 그리고 백성을 규율하는 율법(토라 또는 모세의 율법)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서 단순히 비약해 예수님이 칭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핵심 주제 중 일부를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접근법은 완전히 실패다. 나사렛에서의 첫 설교(4:16-30) 등 누가복음의 중요 문단에서 모두 보이는 주제를 바울의 가르침에서는 찾을 수 없다. 물론 바울도 가난한 사람들, 적어도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하신 가난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주제와 재물에 관한 혁명적인 메시지는, 바울이 예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을 가르쳤다고 결론 내릴 만큼 바울의 가르침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칭의는 같지 않다. 예수님과 바울을 조화시키려면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바울의 칭의 이해에서 출발한다. 칭의에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빙 둘러 가는 것이다. 개혁신학을 되살린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존 파이퍼 목사의 최근 시도는 이러한 접근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준다. 목회자를 위한 어느 집회에서 파이퍼는 다음처럼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께서 바울의 복음을 설교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이 가르침에 들어맞는지 묻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과 수많은 역사가의 마음을 괴롭히겠지만, 성경에 대해 이렇게 묻는 것이 부적절하지는 않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파이퍼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justified)이라는 단어가 복음서에서 바울이 사용한 의미로 언급된 예는 단 한 군데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사했다. 누가복음 18: 14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물론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2:37, 그리고 누가복음 10:29과 16:15를 여기에 덧붙일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이신칭의”라는 관점으로 생각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구절을 복음서에서 더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파이퍼는 탁월한 주해 실력과 신학적 설득력을 활용해 예수님은 이신칭의를 분명 가르치셨으며, 심지어 이중 전가(double imputation,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을 뜻함/편주)까지도 가르치셨을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주장을 파이퍼 혼자만 한 건 아니다. 오래전 독일 루터파 신학자인 요아힘 예레미야스는 칭의라는 신약성경의 중심 메시지가 예수님과 바울 모두에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한 압바(Abba, ‘아빠’를 뜻하는 아람어/역주)라는 용어와 바울의 칭의 신학을 연결했다.
그러나 바울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를 약화시키는 것이 바울의 칭의 패러다임에 예수님을 맞추려는 시도 또한 약화시킨다. 언어 차원에서 바울에게 맞아떨어진 것이 예수님께도 동일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틀 속에서 예수님께 맞아떨어지던 것이 바울에게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칭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적 없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으로, 바울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한 것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바울로 남겨두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다. 둘 모두를 공정히 다루면서도 동시에 복음이라는 차원에서 내적 통일성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복음이라는 방식
이 두 가지 접근법, 곧 바울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전에 끼워 맞추려 하거나 예수님을 바울의 칭의의 비전에 끼워 맞추려 하는 시도가 지닌 문제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각각의 접근은 복음이라는 단어의 범위를 축소한다.’ 이쪽 사람들에게 복음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말이지만 저쪽 사람들에게 복음은 이신칭의와 동의어인 것이다. 분명 복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나라와 칭의 모두를 압축해 포괄하면서, 하나님 나라나 칭의보다 더 깊이 뿌리내린 개념이다.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확실히 파악한다면 이른바 예수님과 바울 사이의 괴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하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바울에게서 시작해보자! 하지만 로마서 3장이나 5장이 아닌 고린도전서 15:1-8에서 시작할 것이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복음을 정의하려 한다. 사실 이 본문이야말로 신약에서 복음을 정의하는 유일한 본문이기도 하다. 이다음에 바울이 말하는 것이 핵심이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몇 가지를 순서대로 살펴보자.
첫째, 이것이 바울에게 전해진 복음이었는데(3절), 그 복음은 최초의 사도들이 전한 것이다.
둘째, 그 복음은 사람들을 자신의 죄에서 구원한다(2-3절).
셋째, 복음의 진수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인 예수님의 이야기다(3-8절).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말과 “성경대로”라는 문구는 사도들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이해한 핵심이다.
넷째,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나 칭의라는 그 어떤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집요하게 조사해 이 두 가지 주제를 표면에 등장시킬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우리는 바울 자신이 복음의 정의를 말하게 해야 한다.
종합하자면 이런 말이다. ‘복음이란 무엇보다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복음은 기독론(Christology)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칭의 너머에 또는 그 밑바탕에 복음이 자리하며, 그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완성하신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다. ‘복음을 전하다’(to gospel)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라는 이야기를 전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동일한가 하는 질문을 완전히 새롭게 고쳐야 한다. 그 질문은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했을까?”를 묻는 게 아니다. 또한 그 질문은 “예수님께서 칭의를 전하셨는가?”를 묻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파이퍼처럼 예수님께서 바울의 복음을 전하셨는지 질문을 던진다면, 그건 사실상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 가르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하신 분이라 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 장사된 사실과 부활에 대해 전하셨을까요?”라고 묻는 것이다.
신약성경 전체가 이 모든 질문에 함께 답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 이야기의 완성이라 전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전하셨기 때문에 복음을(그 복음이 바울의 복음이든 베드로나 요한의 복음이든 상관없다) 전하신 것이다. 복음서를 어떻게 읽든, 어느 복음서를 읽든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예수님을 보고 들었던 이들에게 물었던 이 물음에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된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Who am I?)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신 데서 출발해보자.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처음 하신 설교는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 설교였는데, 이는 심오하면서도 적절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로만 축소한다면 이 단락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 예수님은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구속에 관한 단락인 이사야서 61:1-2를 발췌해 읽으셨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러한 구속의 전권대사로 여기셨다는 점, 곧 자신이야말로 “기름 부음 받은”자라고 생각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또 하나의 핵심 본문은 누가복음 7:20-23이다. 여기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그이”인지 아닌지 묻는다. 예수님은 이사야서(29:18-19, 35:5-6, 61:1)를 인용해 지혜롭고도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어 답하신다. 마지막 23절의 대담한 주장에 심장이 멎을 지경이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달리 말해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성경 구절을 성취하시는 분이라 주장하고 계신다. “이스라엘 이야기는 나로 완성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이 마지막 본문은 내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부르는 복음서 본문들로 우리를 이끈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서로 대화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단락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건너뛸까 두렵다. 그러니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나눈 대화에 대해 우리가 먼저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던질 질문은 다음과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성경의 인물과 예언 가운데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까? 우리 중 누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사야가 말한 그 인물 또는 메시아, 엘리야, 모세나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아니면 다윗 계통의 왕이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아마도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사회 보호시설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계속 대화를 이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항상 확신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 반면 예수님은 요한이 어떤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언제나 분명히 알고 계셨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마태복음 16:14를 보라. 다른 사람들은 요한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요한복음 1:19-28에 나온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요한복음 1:22-23이 말해준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생각은? 마태복음 3:11-12와 누가복음 7:18-23이 보여준다. 예수님은 요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마가복음 9:9-13을 보라. 예수님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누가복음 7:22-23이 그 답을 준다.)
여기엔 복음서에 면면히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 바로 예수님과 요한이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할 사람으로 보았다는 점, 자신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이야기가 될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했을 수 있고, 바울이 칭의를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와 칭의의 바탕에는 기독론, 곧 메시아이자 주님이시며 그 나라를 임하게 하사 믿음으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놓여있다.
여기서 주절주절 풀어놓는 걸 양해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예수님에 대한 구원 이야기로 확신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 사이에 놓인 심오한 일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둘 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했기에, 동일한 복음을 “전파한 것”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겠는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해 복음을 전한 바울처럼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자신을 가리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함으로 “복음을 전하고” 계신다.
열둘이라는 상징적인 숫자, 열두 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과 관련될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열 지파의 회복이라는 소망과도 연관된 그 숫자를 골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였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 열둘에 포함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그 열둘의 주인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심으로 역사가 완성되어감을 보셨고, 자신이 그 완성의 주인임을 아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도들이 전한 바로 그 복음이다.
그 누가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31에서 하신 것처럼 자신이 죽을 뿐만 아니라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예언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그것도 다니엘서 7장의 인자 환상과 이사야서 42-53장의 종의 이미지를 결합한 방식으로 주기 위해 온 인자(the Son of Man)라는 말로 자기 생애를 통틀어 말할 수 있겠는가? 마가복음 10:45과 마가복음 24:24를 묶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를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그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을 유월절로 여기신 것처럼 자신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예수님은 깊은 뜻을 지닌 이미지를 종합해서 자신의 삶을 그러한 이미지로 깨달을 수 있게 하시고서는, 그분 자신이 이스라엘의 구속과 사죄를 대신 담당하는 이임을 천명하신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에 담긴 바울의 복음이다.
그렇다면 내 주장은 단순하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한다면 바울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라는 틀에 우겨넣어야 하고, 우리가 칭의에서 시작한다면 예수님을 칭의라는 틀에 끼워 맞춰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에서 시작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1-11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복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 즉 둘 다 예수님이 하나님 이야기의 중심이라고 증거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 복음이 성경의 핵심이며, 그 복음이 예수님의 이야기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와 칭의 모두를 담아내는 이야기가 된다. 단 그 이야기는 예수님에서 시작해야 함을 기억하자
출처: http://lewisnoh.tistory.com/entry/예수인가-바울인가-하나님-나라인가-칭의인가?category=425818 [Post Tenebras Lux]
이제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글을 올리겠습니다. 목사님의 글이고 또 다른 분의 글도 있는데 "서평: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를 치고 검색을 하면 글이 나옵니다. 두 글을 다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선 목사님의 글을 올립니다.
서신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송영목 목사(고신대 대학교회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들어가면서
신약 27권 중 21권이 서신으로 분류된다. 즉 신약의 3/4이 서신이다. 가장 이른 서신 (아마도 갈라디아서- 49년)은 가장 이른 복음서 (아마 마가복음- 59년) 보다 10년은 더 빠른 것으로 보인다. 서신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각 지역 교회에 전파되었으며, 그 후 개체 교회는 어떻게 특별하면서도 다양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이다. 따라서 서신서는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그 핵심 주제로 한다.
1. 서신서의 장르
서신서는 바울이나 베드로, 요한 혹은 무명의 성도의 신학을 집대성한 논문(theological treatise-compendum)으로 우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먼저 1세기 특정한 수신자에게 특정한 상황과 문제에 대한 설득, 경고, 책망, 권면, 영적인 목회적 가르침을 위한 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역사적 정황을 연구하는 것은 서신서 이해의 기초요 중요한 열쇠가 된다.
구체적인 상황에서 쓰여진 상황문서들(occasional documents)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한된 자료와 정보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특정한 교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신약 서신 저자들의 신학적인 사상을 우리는 충분히 찾고 체계화할 수 있고 해야만 하기에 바울 신학, 요한 신학, 베드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별로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것에 대한 반대 견해는 오래전에 아브라함 카이퍼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성경 저자들을 결코 신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신학은 신학보다 앞서 형성된 교리(dogmas)와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교리는(제도적인) 교회 생활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는 신학이 아니며 신학에 기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계시의 도구로서 바울의 신학적 사고의 틀이 사용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 말은 성경의 인간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반대로 인간이 계시 전달의 도구화되었음을 강조하기에 하나님의 활동은 더욱 주도적이고 특별해진다(참고. 게핀, 1992:29, 31).
서신은 상황적이되 신학적이다. 서신서 연구는 과제신학적(task theology)이다. 즉 어떤 과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의 신학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바울이 현대의 신학박사보다 못한 영성과 지적인 능력을 가졌겠는가? 바울은 다른 성경 저자보다 더 조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확증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은 것이라기보다는 구속 사역을 해석하는데 더 관심을 쏟은 것이다.
환언하면 바울의 관심은 구속역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 절정을 이룬 것을 믿고 그 구속 역사를 설명하는데 있었다. 하나님은 계시 전달에 있어서 바울의 교육적 배경과 성격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기독교 자료를 조직적으로 다룬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참고. 박형용, 1992:6. In 리차드 게핀. '부활과 구속' 추천문. 엠마오). 편지는 시간을 두고 문제를 파악한 후 세밀하고 주도면밀하게 논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좋은 매체였다. 따라서 저자의 논리와 신학을 우리는 체계화할 수 있다.
1.1. 용어: 서신인가 아니면 편지인가?
"Light from the Ancient East"(1927, 1965)에서 Gustav Adolf Deissmann은 많은 파피루스를 연구한 후에 서신(epistle)과 편지(letter)를 철저히 구분하여 그중 하나를 선호하나(물론 이 구분에 타당한 지적이 있다) 우리는 교차적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Deissmann에 의하면(참, 사적인) 편지(real letter)는 비문학적인 것으로 일반 회중이나 후대 사람들을 상대로 쓴 것이 아니라, 그 편지를 직접 받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만을 위해 쓴 것이다.
반면에(공적) 서신(epistle)은 일반 회중을 대상으로 한 예술적인 문학 형태, 또는 문학의 한 종류이다. Deissmann은 모든 바울 서신을 letter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 서신과 비교하면 벧후, 요일은 훨씬 더(회람용, encyclical) 서신에 가깝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epistle이란 용어 안에는 편지로서 갖추어야 할 정확한 형태나 요소가 없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1.2. 주후 1세기의 서신:
1세기에 학생들은 초등교육을(혹은 12-15살) 받을 때부터 편지를 쓰는 교육을 받았다. 전문 편지 작성자를 위한 지침서도 있었다. 1세기에는 상업, 법률, 군사, 행정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서신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시대의 아들인 바울-베드로-요한 역시 그 당시의 서신의 형태(특히 personal-private letter)와 특징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서신서 역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을 배제한 서신서 분석은 무의미하다.
신약 서신서와 그레코-로마(Greco-Roman)의 서신들 간의 유사점을 연구하며 설득의 기술을 분석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물론 신약 기자들이 그 형식에 메이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를 주며 서신의 주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삼아 초대 교회에 전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형식과 틀을 빌려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기독론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이다.
2. 서신의 형식
일반적인 헬라의 서신은 인사말, 감사말, 본론, 마지막 인사말로 구성된다. 신약 서신에는 그 당시의 다양한 문학적인 전통들을 수용했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수사학 양식들, 설득 양식 등을 사용했다. 바울-베드로-요한 서신의 형식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다: 서신이면서도 서신의 형태를 벗어나는 책도 있다. 히브리서, 특히 히 1-10장은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그리스도 신앙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설교 양식이다(히 13:22, '권면의 말'). 그리고 요한일서와 계시록도 다르다.
서론(Preamble)- 송신자, 수신자, 인사말(빌레몬서 1-3)
Formula valetudinis(수신자의 행복과 관련된 말): 건강을 기원하고 감사의 말을 함 (4-7)
주요 논의를 소개함(Body-opening) (8-11)
본론적 논의(Main argument or body) (12-20)
논의의 결론(Body-closing) (21-22)
결론: 인사, 때로는 특정한 말의 첨가, 결론적인 고별인사(23-25)
신약 서신은 고전 수사학적 형식을 일부 따른다(참고. 정태현, 1996:124-127):
(1) 서론(exordium 혹은 prooemium): 청중의 주의를 끌어 그들이 좋은 뜻으로 연설의 내용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짧은 말.
(2) 연설 가운데 부분은 목적 제안(propositio)과 이성적 추론(rationes)으로 이루어진다.
1. 목적 제안(propositio): 연설이 얻고자 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기능. 목적 제안은 두 가지 요소로 세분화될 수 있다:
1.1. 세부 설명(partitio):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을 자세히 설명함.
1.2. 사건 개진(narratio): 목적 제안에 맞춰 사건의 흐름을 진행함.
2. 논증(argumentatio): 여러 가지 증명을 끌어내는 기능. 반증(refutatio)은 반 대자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한 논증.
(3) 귀결(peroratio): 결론(conclusio)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논증에서 제시된 증명들이 이제 분명히 옳다는 것을 천명하는 짧은 끝맺음이다. 연설자는 여기서 청중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판단을 내려 주기를 요청한다. 귀결은 두 가지 기능을 한다: (가) 목적 제안과 결론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나) 논증의 요지를 간추려 반복(recapitulatio) 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서론(1:6-10), 사건 개진(1:10-2:14), 목적 제안(2:15-21), 논증 혹은 증명(3:1-4:31), 그리고 마지막 부분(5:1-6:10)은 권고문(paraenesis)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인사말(1:1-5)과 추신(6:11-18)이 앞뒤를 장식한다. 물론 모든 서신에 이런 형태가 정확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서는 실로 서신의 형식이 거의 없고 히브리서도 진짜 편지 형식에 분류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공공 설교인지 논란이 된다.
3. 서신이 읽혀진 방식
빌레몬서 그리고 요 2-3서와 같은 몇몇 개인적인 서신을 제외하고는 서신들은 주로 예배 중에 크게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의 부재중 서신이 그 사도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그 당시는 기록된 문서의 시대라기보다는 구전의 시대였기에 하나의 편지(책값은 비싸고 인쇄술이 발전되지 못함)로 여러 사람이 듣고 말로 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선교활동의 수단이 편지이다. 따라서 서신이 낭독될 때 청중이 잘 그리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했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예. 헬라어 표현의 중복 등).
4. 서신서의 수사학적인 기교
수사학이란 무엇인가? 고전적인 의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가 거짓에 의해 가리지 않도록 말을 잘해야 한다는 동기에서 정의하기를 "화자가 청자를 위해 설득을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한다.
고전 수사학자들은 따라서 말하는 사람이 청중에게 보여주는 신뢰도(ethos), 그리고 청중의 감정에 대한 호소 (pathos), 또한 논리 정연한 주장 (logos)을 잘 조화시켜서 전하려는 진리를 잘 배열하고, 완전히 외운 다음에, 적절한 언어를 구사해서, 잘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사용한 고전 수사학이 1세기에 유행했는데 주로 4가지 요소들을 포함한다: 서론(exordium)→ 사실 진술(narratio)→ 논증(probatio)→결론(peroratio) (참고. H.D. 베츠의 '갈라디아서 주석'. 한국신학연구소의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고전 수사학의 3가지 종류:(Kennedy, G.A. 1984.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through rhetorical criticism.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2. The art of rhetoric. Princeton University Press; Vernon K. Robbins. 1996. Exploring the texture of texts. Trinity Press International; Burton Mack. 수사학과 신약성서- 나단출판사 한국 저자의 책으로는 수사학적 성경해석의 이론과 실제- 현경식/이성호 공저- 성서연구사를 참고하라).
a. 법률적이고 변증적인 수사학- judicial-forensic: 법정에서 과거의 사건에 대한 변론과 판단을 청중에게 설득하는 것.
b. 정치적이고 심의적-의도적인 수사학-deliberative: 공공집회나 정치적인 변론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청중들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을 미래에 취하도록 설득함.
c. 의식적-제의적 수사학-ceremonial-epideictic: 공공예배나 의식에서 어떤 인물 (덕)이나 사건을 칭송하거나 책망하여 청중들에게 현재의 어떤 견해와 전망을 갖도록 설득하는 것.
서신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것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함이 균형 잡힌 해석을 위해 중요하나 먼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서신, 하나님의 설득으로서의 서신(NT epistles as God's divine persuasion)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로 현대 수사학(modern rhetoric)은 이런 법정적, 정치적, 의식적인 범주를 넘어 모든 인간의 언어적 및 비언어적 행동을 그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소설, 시, 연극, 영화, 광고, 신문 기사, 음악, 사회 현상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인간의 이야기 속에는 그 주장하는 바의 이념적인 동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야기에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화자의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기에. 또한 화자가 청자를 설득하는 기술로 보지 않고 더 나아가 화자와 청자가 불확실한 그 무엇에서 확실한 것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해결해 나가도록 돕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청중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의 참여자이다.
따라서 수사학은 인간의 의사소통에 사용된 모든 수단들을 묘사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말한다. 화자의 의도, 내용의 분석, 본문의 구조와 문학적 기교를 분석, 화자와 청자의 사회-역사적 배경, 그리고 설득을 통한 화자의 결정과 실행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사회 수사학은 개혁주의 서신 해석에 유용한 기여를 한다.
수사학적 해석을 문학적인 해석 혹은 자유주의적 해석 방법으로 여기고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종들이 인간의 언어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 한 것이기에 인간의 언어를 분석하는 수사학적 비평은 적절하고 유용하다. 이를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1세기 서신서의 수신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와 그 영향력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수사학을 길게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의 서신서의 해석 경향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즉 역사 비평 방법만으로 연구하던 전성기는 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비평의 주요 관심은, 예를 들어, 이것이 바울의 것인가? 이 편지는 이전에 어떤 자료들을(기독교의 찬송, 케리그마, 교리문답 등) 모집한 것인가? 구전자료 혹은 주변의 다른 나라의 서신과의 종교사학파적 비교 등.
5. 로마제국 안에서 서신을 통한 복음의 전파의 용이성
통일된 로마제국은 발달된 교통망(예. 리챠드 보컴 등: holy internet)을 갖추어서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언어적으로는 코이네 헬라어가(비교: 고전 헬라어는 좀 더 학적이고 고급)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서 언어적인 문제는 거의 없었다. 그 어느 시대보다 1세기 로마 제국은 복음이 효율적으로 증거 되는 기반이 조성된 시기였다. 여기서 1세기의 여행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 제국 시대에 하루 도보 여행길은 보통 32km 정도였고 급사(急使)들은 80km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현대인과 똑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여행했다. 사업과 정부의 공무, 제의적인 순례, 순전히 관광적인 차원 등 여러 이유가 있었다. 육상 여행은 고대에서 가장 자연스럽지만 안락하지 못한 여행의 형태였다. 하지만 1세기의 육로 여행은 어느 시대보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으로 평가된다. 네로 시대에 런던에서 로마까지 육로로 가는데 28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군대가 효과적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도로가 건설되었다. 로마의 도로망은 2차 세계대전 후 주간(州間) 간선도로가 발전되기 전까지는 견줄만한 것이 없었던 독보적인 것이었다. 빗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가운데 부분이 약간 더 높았으며, 도로 양 끝에는 도랑과 연석을 놓았다. 로마의 도로는 폭이 최소 8피트였고 평지에는 대개 10-12피트의 폭이 일반적이었고, 대도시로 진입하는 도로의 폭은 30-40피트였다.
여행을 위해 통행증이 발급되었는데, 특히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제한되었다. 여행을 위한 숙박시설로 여관이 잘 발달되었지만, 대개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집을 숙박 장소로 이용했다. 여행 날씨는 5-10월 사이가 선호되었다. 그리스인과는 달리 로마인과 유대인은 해상여행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배로 여행하는데 9-27일이 소요되었는데, 바람과 일기에 따라 결정되었다(참고. 앨버트 벨, 2001:469-481). 참고로 holy internet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복음서를 특정 공동체로 한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헬라어가 사용되는 모든 지역에로 전달되는 그 범위가 수신자의 범위로 본다. 하지만 특정 수신자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이 주장이 설득력 없이 보인다.
6. 서신의 특성
a. 성격상 인격적(personal)이나 사적(private)인 것이 아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아주 사적인 것도 있기는 하다. 공적인 헬라 시대의 사업 서신(business letters)은 아니지만 교회에 주어 보내어진 것이기에 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의 경우 그의 동역자들을 공동 송신자로 언급함으로 공적인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고전 1:2; 고후 1:1; 갈 1:1; 참고. 크리스천 베커, 1998:43).
b. 대화와 현존 (먼저 편지로 만나고 조속한 시기에 실제적 방문-현존- 롬 15:22; 빌레몬서 21절): 마치 송신자가 독자 가운데 있는 것처럼 말하는 방식을 택한다. Koskenniemi가 주후 400년까지의 헬라 편지를 연구하여 이 두 요소를 강조했다. 대화적 특성이 있지만 더 나아가 문학적인 기교와 세련됨으로 정제된 대화이기에 일상 대화 보다 더 문학적이다.
c. 설교체: 강한 감정과 애정, 목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d. 계획적이지만 형식주의적이지 않다: 보통 헬라 편지의 중요한 한 가지 특성은 전형적이고 비인격체적인 특성이다. 심지어 가장 친근한 가족과 친구 간의 서신에서도 의식적이고 상투적인 틀을 유지했다. 반대로, 신약 서신에서는 건조하고 의미 없는 형식을 제거해 버린 것을 새로운(기독론적인) 내용으로 본다.
7. 서신서 해석의 원칙
(1) 사회-문화-정치-종교-역사적 상황을 본문과 보조 자료를 사용하여 재구축하라. 주로 저자와 수신자(유대인인지 헬라인인지)와의 친분관계, 그리고 수신자가 처한 사회문화적-교회적 형편에 주목하라. 이때 성경 사전이나 주석, 그리고 신약 서론 책을 참조할 수 있다(특히 유용한 것은 Martin, R.P. 1997.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IVP와 Hawthorne, G.F. 1993. Dictionary of the later New Testament and its developments. IVP).
(2) 기초적인 역사적 배경을 숙지한 후 편지를 전체로 읽는 것 즉 쉬지 말고 두 번 정도 완독하여 전체의 감과 맥을 잡아야 한다. indicative(예. 롬 1-11장 상황 진술, 권면, 책망 등)→ imperative(예. 롬 12장)→ promise(롬 16:25-26)를 고려하라.
(3) 논리의 흐름을 따라 사고의 시작과 마감이 분명한 좀 더 세부적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라.
(4) 문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즉 핵심 단어와 반복되는 용어,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을 중심으로 연구하라.
(5) 신학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구약의 인용을 통한 계시사의 전진, 그리고 기독론적인 은유 혹은 그레코-로마의 문화에 반하는 기독교적 강조 등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6) 유비를 통한 적용을 해석(hermeneutics가 아니라 interpretation)의 마지막 단계로 해야 한다. 서신 역시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영감 된 말씀이기에 모든 시대의 교회에 그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
(6) 단계와 연관하여 서신서 메시지의 현대로의 적용의 원칙을 살펴보자- what it meant에서 what it means로 넘어오는 다리: 실제로 학자들이 1세기의 의미를 연구하는 데서 그치고 그 현대적 적용에 대해서 소홀히 했기에 교회 안에서 서신서를 통해서 제기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모호함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적용은 더 어렵고 기도를 요하는 작업일 수 있다.
이 작업을 윤리학자들의 몫으로만 남겨 둘 수 있는가? 오히려 적용이 성경적 원리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오지 않고, 교회-교단의(신학적) 색깔-전통 혹은 한국적인 유교적 관습 등에 지배받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에 진리와 규범이지만 문화적 상대성(cultural relativity)으로 인해서 1세기 서신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21세기에 적용할 때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아래의 두 예를 보아도 적용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안다:
(1) 딤전 5:23: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이것을 음주를 허용하는 본문으로 볼 수 있는가?
(2) 고전 14:34-35/ 딤전 2:9-15: 지금도 여성이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 혹은 여성 안수를 금지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고 적용을 위한 몇 원칙들을 살펴보자:
(1) 1세기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 속에 우리가 산다면 그 본문의 신학적 내용과 윤리적인 명령들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예. 고난 중에서도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서신서에서 일관되게 죄로 규정하는 것(음란, 동성애, 방탕…)은 여전히 늘 죄이다. 하지만 지나친 확대 적용은 금물이다. 고전 6:1-11에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는 것을 두 크리스천의 사업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2) 유사성이 아주 약하거나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가? 갈 5:2-6에서처럼 성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한국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 이 말씀은 21세기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이때는 what it meant에 근거하여 적용의 구체적인 유비가 아니라 성도의 삶에 주는 원리를 도출해야 한다.
이 원리는 지역, 시간, 상황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무차별적으로 이 원리를 아무 상황에 적용할 수 없고, 그래도 유사한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하다. 예를 들면, 바울이 이방 신전의 축제에 참여하거나 거기에 바쳐진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할 때, 이것은 귀신과 사귀는 것이기에, 21세기에는 한국 교인들의 삶 중에서 점성술, 사술, 사주팔자, 심령술 등에 적용할 수 있다.
사실은 여기서도 유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와 장소에 규범적인 문화를 주시지 않아서 이런 적용은 아주 애매할 때가 많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낙태나 인터넷 범죄를 위해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 수 있나? 이때 우리는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완성이라는 성경적인 세계관 혹은 교리의 도움을 받아서 전체적인 성경에서 먼저 보고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는 지혜도 필요하다.(이상 목사님의 글)
다음에는 서신서 구성과 저자 그리고 수신자에 대한 다른 분의 글과 수신자들이 있는 지도를 올립니다.
<신약 개론>(이하의 내용은 제가 정리한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의 글을 그대로 옮김)
1. 신약의 짜임 ㉠4, 1, 13, 1, 7, 1
1) 4(사복음서), 1(사도행전), 13(바울서신), 1(히브리서), 7(일반서신), 1(요한계시록)
2) 27권, 260장, 7957절(친구 옳치)
3) 공관복음 : 마, 막, 눅
4) 옥중서신 : 엡, 빌, 골, 몬
5) 목회서신 : 딤전, 딤후, 딛
6) 교리서신 : 롬, 고전, 고후, 갈
7) 회람서신 : 롬, 갈, 엡, 골
8) ‘요한’이라는 말이 붙은 책(요한계 문헌) : 요, 요일, 요이, 요삼, 계 (5권)
9) ‘서’가 붙은 책 : 21권
10) 비바울서신 : 히브리서
11) 한 장으로 된 신약의 책 : 몬, 요이, 요삼, 유
12) 세 장으로 된 신약의 책 : 살후, 딛, 벧후
13) 네 장으로 된 신약의 책 : 빌, 골, 딤후
14) 다섯 장으로 된 신약의 책 : 살전, 약, 벧전, 요일
15) 여섯 장으로 된 신약의 책 : 갈, 엡, 딤전
<서신서의 발신자, 수신자, 전달자>
1. 발신자가 바울인 서신 : 롬, 갈, 엡, 딤전, 딤후, 딛 ㉠롬갈엡,딤전후딛
2. 발신자가 바울과 디모데인 서신 : 골, 빌, 고후, 몬 ㉠고후,빌골몬
3. 발신자가 바울과 소스데네인 서신 : 고전 ㉠고전 바쏘!
4. 발신자가 바울과 실루아노 디모데인 서신 : 살전, 살후 ㉠살빠실디
5. 발신자가 ‘장로’인 서신 : 요이, 요삼 ㉠장로(5) = 요이(2) + 요삼(3)
※벧전 : 장로가 장로에게(벧전5:1)
6. 발신자 수신자가 없는 서신 : 히, 요일 ㉠이 요일에는 편지 안써!
7.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는 서신 : 딛, 빌, 롬 ㉠종 디빌놈!
8. 공동서신에서 ‘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서신 : 약, 벧후, 유 ㉠약벹어유!
9.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표현하는 서신 : 살전, 살후, 몬, 빌을 제외한 바울서신
㉠살살 못 빌 사도는 없지요!
10. 공동서신에서 ‘사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서신 : 벧전, 벧후
11.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가 되었다고 표현하는 서신 : 고전, 고후, 엡, 골, 딤후 ㉠고전후,엡골딤후
서신 | 발신자 | 수신자 |
롬 | 예수 그리스도의 종/사도/ 복음을 위하여 택정(1:1) ㉠종사택 |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1:7) |
고전 |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1:1)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1:2) |
고후 | 바울과 형제 디모데(1:1)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1:1) |
갈 | 바울(1:1) |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1:2) |
엡 | 바울(1:1) |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1:1) |
빌 |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1:1) |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1:1) |
골 | 바울과 형제 디모데(1:1) |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1:2) |
살전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1:1) | 데살로니가인의 교회(1:1) |
살후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1:1) | 데살로니가인의 교회(1:1) |
딤전 | 바울(1:1) |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1:2) |
딤후 | 바울(1:1) |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1:2) |
딛 | 바울(1:1) |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1:4) |
몬 |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1:1) |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1:1~2) |
히 | × | × |
약 | 야고보(1:1) |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1:1) |
벧전 | 베드로(1:1) |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택하심을 받은 자들(1:1~2) ㉠본갈갑아비나택 |
벧후 | 베드로(1:1) |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1:1) |
요일 | × | × |
요이 | 장로(1:1) |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1:1) |
요삼 | 장로(1:1) | 사랑하는 가이오(1:1) ㉠삼가시오!(요삼) |
유 |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1:1) | 부르심을 받은 자(1:1) |
계 | 요한(1:4) |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1:4) |
<편지전달자>
1. 뵈뵈 : 로마서(16:1)
2. 두기고 : 엡(6:21)/골(4:7~8)/딛(3:12)/몬(골4:9)
3. 디모데 : 빌(2:9)
4. 오네시모 : 몬/골(골4:9)
<교회 책임자>
1. 디모데 : 에베소교회
2. 에바브로디도 : 빌립보교회
3. 에바브라 : 골로새교회
4. 아볼로 : 고린도교회
5. 디도 : 그레데교회
6. 빌레몬 : 골로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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