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생기의 우리학교 VOL.12 야마구치(山口) 조선초중급학교
(글 박수화)
저항으로 이어온 민족교육
야마구치 조선초중급학교는 2016년에 학교 창립 60주년, 민족교육실시 70주년을 맞는다. 학교 폐쇄 명령에 대한 항의 데모, 학교폐쇄 기간에도 계속된 민족교육에는 야마구치 동포들의 저항의 역사가 보인다.
- 조련 시모노세키 초등학원 제2회 졸업식(1948년 3월 18일) -
야마구치 동포들의 민족교육 투쟁
야마구치 조선초중급학교가 위치한 곳은 식민지 시대에 사용했던 형무소, 화장터, 연병장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처럼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장소에 ‘똥 굴 동네’ ‘새 동네’ ‘대밭 동네’로 불린 3개의 조선인 부락이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현내 각지에 국어강습소가 개설되어, 46년 4월에 이 강습소들을 통합 개편한 조련 시모노세키(下関) 초등학원이 창립된다.
장소는 현재 야마구치조선초중급학교 바로 옆에 있던 <구 쇼와칸(昭和館)>이다.
<구 쇼와칸>은 1928년에 시모노세키시 오오츠보(大坪)에 건설되어 일본의 패전까지 ‘내선융화시설’로 사용되었다.
48년 1월 24일, 문부성으로부터 ‘조선인설립학교의 취급에 대해’ 통달이 내려왔고, 야마구치 현에는 같은 해 3월 31일을 기한으로 현내 모든 조선인학교에 폐쇄령이 통고된다. 폐쇄기한 날에는 야마구치현청 앞에 약 1만 명의 재일조선인이 모여 폐쇄에 반대하는 시위를 했다.
당시 소학교 4학년이었던 김교중씨(77)는 이때의 경험이 이후 50년 동안 민족교육에 종사하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 야마구치 현청 앞 1만인 동포 집회(1948년 3월 31일) -
“심야에 소방차 2대가 달려와서 바닥에 앉아있는 동포들에게 물을 뿌려댔어. 항의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는데, 모여든 동포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어. 아침이 되자 지역 동포들이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주었어. 꿀맛 같았던 그 맛이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나.”
- 구 쇼와칸이 있던 자리에서 당시 모습을 설명하는 김교중씨 -
이 항의활동으로 동포들은 현으로부터 3월 31일을 기한으로 한 통달을 보류한다는 양보 회답을 얻는다. 5월 25일, 조련 야마구치현 본부의 최민환(崔民煥)위원장과 현교육부장 간의 협의가 이뤄져 8월 7일에 조련 시모노세키 소학교(히코시마(彦島), 오즈키(小月), 니시이치(西市), 도노이(殿居)분교, 소노다(園田), 나라사키(楢崎)분실을 포함)가 각종학교로 인정되었다.(현 전체로는 4개교, 16개 분교, 5개 분실이 허가를 획득)
「야마구치현사 사료편 현대2 현민의 증언 청취편(2000년)」에는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야마구치현 지사를 역임한 다나카 타츠오(田中龍夫)씨의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현청의 무리들은, 모두 ‘넘치는 투지’로 조선인학교를 폐쇄하러 나갔죠… 야마구치 뿐만이 아니었어, 현 부장도, 과장도 모두 조선말이 유창했으니까. 그 때까지 조선총독부에 근무하고 있던 이들이 부장이 되고 다른 직책도 맡았으니까.”
(그래서 학교를 폐쇄한 경우에 조선인 아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아이들은, 끝까지 일본인과….
이른바, 그 폐쇄를 당한 경우엔 일본학교로 가면 됐으니까, 조선학교에 못 가게 되었으니.
분명히 일본에는 소학교도 중학교도 있었으니까, 일본 학교로 가면 된다고 했어.”
현청 간부들의 ‘넘치는 투지’라는 말에서 야마구치현청 간부들의 의식 바닥에 존재하는 조선인에 대한 우월감, 높은 자존심, 멸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 1956년 당시 2층 교사 -
폐쇄 후에도 계속된 민족교육
같은 해 12월 3일, 조련 시모노세키초등학원에서 열린 조련 현본부결성 3주년대회에서 북한의 인공기가 게양 되었고, 그 깃발의 철거를 요구한 경찰에게 저항한 사건 등 그 후에도 혼란이 계속되었다.
“언제 학교에 경찰이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지역을 돌며 동포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여름방학 기간에는 학교에서 자면서 동향을 감시하기도 했지요.(김교중씨)
49년 9월 8일에 일본정부와 GHQ가 조련을 비합법단체로 규정해 해산시키자 10월 19일에는 조련이 경영하는 조선학교에도 ‘학교 폐쇄명령’이 내려졌다. 야마구치현에서는 모든 조선학교 건물이 경찰에 접수되고, 반항하는 교원들은 공무집행방해로 체포되었다.
구 쇼와칸(昭和館)에 관해 정리한 사료 「그 후의 쇼와관」(야마구치현 지방사연구 제69호, 1992)에 따르면 학교가 없어진 조선인 아동과 학생들은 지역의 일본학교로 분산해 입학시켰으나, 조선인 아동과 학생들이 일본학교로 입학신청을 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김씨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각 지역의 분회나 인가를 받지 않아서 폐쇄를 면했던 중급부 교실 등으로 나뉘어져 남아있는 교원들이 민족교육을 계속했다고 한다.
결국 아이들은 일본학교로 집단 전학을 해야 했지만, 거기서도 일본어로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지 않는 등 저항했다.
49년 12월 19일, 조선인 아동들만 다닐 수 있도록 무카이야마소학교(向山小学校) 오오츠보 분교가 <구 쇼와칸>에 개교하는데, 거기서도 조선인 아동·학생들은 일본인 교원이 교실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아서거나 <구 쇼와관> 뒤에 있는 방공호 안으로 도망 다니면서 저항했다고 한다. (김교중씨)
또 다시 개교
야마구치현에서는 52년에 이와쿠니(岩国) 조선초급학교(당시 <야마구치 조선 제2초급학교>)가, 59년에는 우베(宇部)조선초급학교가 개설되고, 그 후에 각각 중급부가 병설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는 개교식을 거행한 56년 4월 15일이 현재의 야마구치 조선초중급학교의 창립기념일이 되었다.
- 현 2층 교사가 건설될 당시 모습,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3층 옛 교사(1962년) -
시모노세키의 동포 엄윤철(嚴潤徹 63)씨의 아버지는 당시 조선학교 건설에 온 힘을 쏟은 한 사람이다. 엄씨는 시모노세키 조선초급학교 교사가 세워지는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 산을 넘어가니 1세 어른들이 노래를 부르며 교사를 세우고 있었어요. 4살 때라 모든 걸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 눈에 들어온 광경은 굉장했죠. (엄씨는 1996년 11월 시모노세키 초중급학교 3층 건물 새 교사(현재 학교)건설에 건설위원회위원장으로서 온 힘을 쏟았다)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57년 북에서 보내온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이 힘이 되어 58년부터 교사 증축사업이 개시된다. 60년에는 2층 교사 옆에 3층 교사(옛 교사)가 완성된다. 62년에는 최초에 건설된 2층 교사가 새 교사로 다시 태어났다.(현재의 2층 교사)
그 후 야마구치 조선고급학교(1972년 창립)가 2004년에 휴교되었고, 또 우베초중급학교가 2008년에, 도쿠야마초중급학교가 2009년에 시모노세키 초중급학교로 통합되어, 이 학교는 현내 유일한 조선학교가 되었다. 교명은 2008년에 <야마구치 조선초중급학교>로 개칭되었다.
* 월간<이어> 2015년 12월호에서.
첫댓글 아~~ !! 작은 외할아버지 그리고 작은 외삼촌!!
빨리 통일이되어 두분의 민족교육에 대한 정성이 헛되지 않기를 바랍니다.ㅜㅜ
삼촌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여기서 함자를 접하니 넘 반갑습니다.^^
두 어르신께서 야마구치학교와 인연이 깊으셨군요. 하루빨리 자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인사 남겨주시니 정말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