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의 개혁 의지가 강해질수록 반혁명 세력의 저항도 점차 거세져 갔다. 선전포고는 차베스가 먼저 단행했다. 1년간 대통령에게 법안을 승인하는 권한을 주는 수권법Enabling laws이 만료되는 2001년 11월, 차베스는 49개의 개혁 법안을 갑작스럽게 공포했다. 이 개혁법안은 토지 보유 기간과 석유 산업의 생산과 과세, 수산업 조업 규제, 사회보장 제도의 민영화 계획 취소 등을 골자로 신헌법이 지향하는 목표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49개 법안은 사실 급진적이라기보다 온건한 진보적 개혁조치에 가까웠다. 석유 산업은 이미 1976년부터 국유화되었고, 토지개혁 조치는 국유지와 유휴지를 유상으로 분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첨예한 갈등을 빚은 탄화수소법은 단지 석유 산업에 참여하는 사기업에 이전보다 높은 30퍼센트 이상의 로열티를 부과하고 외국 기업과의 합작에서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가 51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소유하는 내용이 추가됐다.
그러나 나라의 부를 200년 동안 통제해 온 베네수엘라 과두 세력은 이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49개 법안을 단순한 개혁조치가 아니라 ‘혁명의 씨앗’으로 인식했다. 여기서 차베스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대중 의식화와 노동자, 도시빈민, 영세 농민들의 조직화 등 모든 종류의 혁명적 흐름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혁명에 대한 공포는 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다.
반혁명 세력의 반란
49개 개혁 법안 공포를 신호로 정국은 급격하게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차베스 진영에서 어중간하게 자리를 차지했던 기회주의 세력도 발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했다. 탄화수소법에 반대했던 국영석유회사 사장 과이카이푸로 라메다 장군이 해고되어 반차베스 진영으로 자리를 옮겼고, 차베스에게 좀더 온건적인 개혁 노선을 요구했던 내무장관 루이스 미킬레나도 반대파에 합류했다. 베네수엘라는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 간의 계속되는 시위로 내전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구체제의 열매를 마음껏 향유하던 과두 세력은 비록 신헌법 제정으로 영향력이 급격히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정부의 중간 관료층을 장악했고 미국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과 군부 일부에 분명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엇보다 대중 여론을 조성하는 수많은 민영 TV 등 언론사는 반차베스 전선의 선봉에 섰다. 되돌아보면, 1999년 12월 15일 71.8퍼센트의 찬성으로 통과된 신헌법 국민투표 결과의 이면에도 투표 보이콧을 주장했던 반대파가 조직한 기권율은 55.6퍼센트에 달했다. 이는 차베스가 1993년 선거 보이콧 운동을 펼쳤을 때의 기권율 40퍼센트를 훨씬 상회하는 비율이다.
반면 차베스의 지지 세력은 군과 오랫동안 베네수엘라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다수 빈민들이었다. 빈민들은 그동안 집권 세력의 정치적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차베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빈민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부패와 빈곤 척결을 약속하고 볼리바리안 헌법의 정신과 가치, 그리고 그가 그리는 새로운 대안 사회를 역설해 나갔다. 자생적 활동 조직인 볼리바리안 서클은 바리오(빈민촌) 곳곳으로 찾아 들어가 민중을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돌려놓기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반차베스 세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 지위가 낮았지만, 분명 베네수엘라 국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2002년 4월 7일 PDVSA 고위 관료 7명을 차베스가 해고하자, 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와 베네수엘라 노동조합총연맹CTV 그리고 전체 시장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민영방송국들이 주축이 된 반차베스 진영은 반혁명 쿠데타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미국은 2001년 11월 국무부와 국방부, 국가안보국이 베네수엘라 관련 합동 회의를 열고 “베네수엘라를 외교적 고립 상태에 몰아넣겠다”고 발표한 이후 반차베스 세력이 꾸민 음모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청했다.
치밀하게 사전 기획되어 발생한 4월 11일 차베스-반차베스 진영간 유혈 충돌은 미디어가 진실을 어떻게 왜곡하고 조작하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차베스 지지 세력이 평화적인 반차베스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권총 사격을 가하는 장면으로 조작된 이미지는 민영방송 채널을 통해 반복해서 반영되었고, 퇴역 장성들은 카메라 앞에서 차베스의 하야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쿠데타군이 대통령궁을 향해 다가오자, 결사 항전을 결심했던 차베스는 카스트로의 조언을 받아들여 나중을 기약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조건부 사임 입장을 정하고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할 것, 헌법을 존중할 것, 대통령궁 내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것, 모두의 출국을 보장할 것”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쿠데타 측이 조건 수용 입장을 번복하고 ‘무조건 사임’을 요구하자 다음날 차베스는 사임을 거부했고 쿠데타 세력에 의해 군사기지로 압송되었다. 이 모든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4월 12일,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대표적인 반차베스 민영방송국인 베네비전Venevision을 통해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새 대통령을 갖게 되었습니다”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아침 인사를 듣게 된다.
대통령궁을 장악한 쿠데타 세력은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려 놓았다. 신헌법을 부정하고, 국호에서도 ‘볼리바르’라는 명칭을 삭제했다. 국회와 대법원의 기능을 정지시켰으며, 49개 개혁 법안 또한 무효로 선언했다. 1998년 차베스의 집권 이후 빈민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진행되었던 각종 개혁의 성과들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정치의 중심으로 불려왔던 민중은 다시 변방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고, 곳곳에서 우익 세력의 난동과 테러가 시작되었다. 오직 민영방송국만이 평화롭게 쿠데타를 칭송하는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내보낼 뿐이었다. 뒤에서 웃음 짓던 미국은 곧바로 새 정부를 승인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어서는 민중, “민중이 단결하면 못할 게 없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차베스도 1973년에 칠레의 아옌데가 그랬듯이 또 한 명의 비극적 정치 지도자 정도로만 역사에 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베네수엘라 혁명의 독특한 여정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민중들이 지난 3년 동안 차베스가 그들에게 보낸 신뢰에 답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민촌이 몰려 있는 언덕 위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구름처럼 밀려 내려왔다. 그들은 대통령궁과 차베스가 억류된 군사 기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 민중들이 손에 든 볼리바리안 신헌법의 제333조에는 “이 헌법은 여기에서 규정된 방식 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해 폐기되거나 강제적 힘에 의해 기능이 정지되어도 효력을 잃지 않는다. 그럴 경우 모든 시민들은 헌법의 효력을 복구하는 데 협력할 의무를 지닌다”고 씌어 있다. 헌법을 부정한 쿠데타 세력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헌법적으로’완전히 정당했다. 반차베스 진영에 속한 카라카스의 경찰들이 빈민들에게 발포해 5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런 식의 진압은 분노한 민중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미국식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흥과 도덕적 정당성으로 촉발된 볼리바리안 혁명은 점차 계급적 성격을 띠어 갔다. 민중은 반혁명 과정을 겪으면서 차베스의 정책이 바로 그들 자신의 혁명이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결국 반혁명 기도는 거대한 민중들의 저항과 차베스에게 동조한 군인들의 역쿠데타로 인해 3일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4월 14일 카스트로의 물밑 지원을 받은 최정예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출되어 대통령궁으로 돌아온 차베스는 “민중이 역사를 창조했다”며 벅차오르는 감격 속에 반혁명 세력을 향한 귀환연설을 시작했다.
“나를 반대 하십시오. 나는 당신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헌법을 반대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민중의 책입니다. 공동체의 책입니다. 당신들은 이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헌법 복원을 선언한 이 메시지는 볼리바리안 혁명의 극적인 복귀를 선포한 것이었다. 쿠데타가 좌절된 이후에도 구체제의 과두 세력들은 여전히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은 차를 타고 다녔지만, 새로운 베네수엘라에서 그들은 분명 비주류가 되어가고 있었다.
2002년 4월 쿠데타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반차베스 세력의 반란이 실패한 사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여러모로 베네수엘라 혁명의 이행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먼저 군에서는 장성 약 60여 명이 강제 예편을 당했고, 나중에 400명의 우익 장교가 추방되었다. 이는 군대가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이자 집행자로 거듭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02년 4월 쿠데타 이후에는 반혁명 세력의 다양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장교도 호응하지 않았다. 평화적인 방식으로는 쉽지 않았던 군과 관료 체계 내 반혁명 세력의 인적 청산이 이들의 쿠데타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반혁명은 혁명을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바뀐 점은 볼리바리안 혁명에서 민중이 가지는 지위였다. 그동안 빈민들은 차베스 개혁의 수혜자로서 그를 열렬히 지지하는 수동적인 역할만을 수행했었다. 그러나 반혁명 세력의 쿠데타를 목격하면서 민중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헌법 체계에서 획득한 모든 게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단순히 차베스를 지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혁명을 구현하고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02년 4월 반쿠데타 시위에 참여한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차비스타Chavista(차베스 지지자)가 아닙니다. 우린 혁명가예요. 우리는 이 정부를 옹호해야 합니다만,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를 주장합니다. 우리가 차베스를 옹호하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의 대통령들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를 우리 투쟁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중들은 그를 우리와 대등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어요.”12
차베스가 시작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점차 민중들이 주체가 된 아래로부터의 혁명으로 변화되어 갔다.
사장들의 파업, 반혁명이 혁명을 강화시키다
쿠데타가 끝난 뒤 민중들의 혁명 의지는 날로 높아 갔지만, 차베스는 오히려 일련의 유화 조치를 시도했다. 경제팀을 덜 급진적인 장관들로 대체했고, PDVSA에도 좀더 온건한 인사들을 선임했다. 심지어 해고된 경영진을 다시 되돌려 놓기도 했다. 많은 지지자들이 이러한 조치에 반대했지만, 그는 조금 속도를 늦추더라도 모든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지지하는 볼리바리안 혁명을 원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이런 시도가 소용없는 짓이었고, 좀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던 민중이 옳았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증명되었다.
반혁명 세력은 차베스의 유화 조치에 직장 폐쇄로 응답했다. 대법원이 석방한 쿠데타 주모자들은 ‘민주연합’Coordinadora Democratica이란 이름으로 세력을 규합하여 2002년 12월 2일부터 다음해 2월까지 총파업을 벌였다. 이는 ‘사장들의 총파업’ 혹은 ‘석유 파업’으로도 불렸는데 베네수엘라 GDP의 3분의 1, 정부 재정의 75퍼센트, 수출 총액의 80퍼센트를 넘게 차지하는 석유 산업을 마비시킴으로써 차베스의 항복을 얻어내려 한 일종의 ‘자해 행위’였다.
2002년 12월 6일 반차베스 시위대 세 명이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은 후에 반차베스 성향의 경찰과 연계된 포르투갈 사람들의 소행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파업을 지속시키는 데 효과를 발휘했다. 반혁명 세력들은 계속해서 석유 정제소를 파괴하고 가축을 죽이고 우유를 강에 버리는 등 사회 혼란을 부추겼다. 공장 폐쇄에 적극 참여한 민영방송국은 4월 쿠데타 당시 그랬듯이 약 700개의 반차베스 성향의 광고를 내보내며 파업을 지원했다.
또한,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화가 바닥나 외채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고 볼리바르 화폐가 평가절하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중소 상인으로 하여금 매점매석에 들어가게 했다. 사회 불안과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악의적 선전은 공장 폐쇄 기간 내내 계속되었다.
물론 반혁명 세력의 파업은 효과가 있었다. 그 당시의 파업으로 인해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수입해야 했고, 전체 GDP는 24.9퍼센트나 하락했다. 물가 상승률은 20퍼센트에 달했으며 실업률은 17.8퍼센트를 기록했다. 차베스에 대한 지지도는 한때 2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식량이 없었다. 아마도 1973년 칠레 아옌데정부가 그랬듯이 보통의 정부라면 민심 이반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4월 쿠데타의 경험은 하층 민중들로 하여금 고통을 감수하게 했다. 파업 기간 중 빈민촌을 방문한 차베스에게 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차베스, 내 집에는 의자가 남아 있지 않아요. 우리는 가구, 지붕을 뜯어서 불을 피울 겁니다. 우리는 문도 떼어낼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요리를 할 거예요. 하지만 절대 물러서지 마세요, 차베스.” 4월 쿠데타의 경험을 통해 민중들은 이것이 차베스와 반차베스 세력 간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들과 반혁명 세력 간의 투쟁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직장 폐쇄는 볼리바리안 혁명에 또 하나의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 석유 파업 당시 쿠바에서는 콩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주었고 브라질에서도 식량이 들어왔다. 또한 콜롬비아로부터 우유, 고기, 석유를 구입해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연대는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중남미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듯이 미국 중심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볼리바르 대안을 강조하는 차베스의 구상을 강화시켰다. 직장 폐쇄 이후 추진된 각종 국제적 지원과 2006년 7월부터 착공에 들어간 베네수엘라-브라질-페루-볼리비아-콜롬비아-우루과이-아르헨티나-칠레를 잇는 1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대규모 가스관 공사도 헌법 전문에 명시된 중남미 통합 구상과 관련이 깊다.
국제 연대에 관한 차베스의 구상은 남미 대륙의 범위에 머물지 않는다. 2006년 9월 20일 차베스가 유엔 연설에서 부시 미 대통령을 “악마”라고 호칭하고 국제적인 반미 전선 구축을 명분으로 유엔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온 힘을 기울였던 노력에서 보듯이 볼리바리안 대안은 국제적 성격을 계속 강화해 나가고 있다.
결국 반차베스 세력은 또다시 반혁명 기도에 실패하여 4월 쿠데타 실패로 잃은 것보다 더 많이 잃었다. 차베스는 석유 파업이 없었다면 쉽게 진행시키지 못했을 PDVSA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고위 경영진은 물론 과잉 고용 상태에서 석유 이익의 독점에만 눈이 멀었던 특권적 노동자 1만 8000여 명을 연속 62일 동안 피고용자 의무를 방기한 혐의로 노동기본법 102조의 규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해고했다. 자본 총파업의 좌절과 PDVSA에 대한 정부의 지배권 확립은 베네수엘라의 정치 이행 과정이 더욱 급물살을 타는 계기로 작용했다. 거액의 오일 달러가 49개 개혁 법안을 추진할 재정적 토대가 되었다. 반대파는 차베스에게 도전하면서 차례차례 자신들의 무기를 혁명 세력에게 넘겨주었다.
차베스는 4월 쿠데타 때와 달리 좀더 엄격하게 대응했다. 그는 이제 양보와 타협을 통해 전국민의 통합을 추구하는 전략을 포기하고, 분명한 자기 기반을 중심으로 구체제의 기득권 세력과 투쟁하려는 전략을 분명히 했다. 반혁명 세력의 군사 개입과 직장 폐쇄는 민중들에게 혁명 주체로서의 의식을 자각시켜준 동시에 볼리바리안 혁명을 더욱 급진화시켰다.
민중들은 이런 정책을 추진하게끔 만든 동인이자 차베스가 가진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차베스는 더 이상 구체제의 기득권층과 빈민들 간의 화해를 억지로 모색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확실한 민중의 ‘사령관’이 되었다.
민중을 위한 임무 : 볼리바리안 혁명의 전진
직장 폐쇄 때문에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지만, 차베스는 고유가를 바탕으로 한 석유 산업의 수익을 국가의 전면적인 체질 개선 사업에 투자했다.
차베스는 2003년 4월, 매우 중요한 일련의 미션들을 시작한다고 선언했다.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빈민촌으로. 의료복지 사업), 미션 메르깔(빈민에 대한 식품 지원), 미션 로빈슨(문맹 퇴치), 미션 리바스(중등 교육), 미션 수크레(고등 교육-대학), 미션 부엘반 카라스(실업자를 대상으로 한 취업 훈련 프로그램. 리바스, 수크레 수료자를 대상으로 시행), 미션 사모라(농민 문제), 미션 피아르(광산 문제), 미션 과이카이푸로(원주민 권리 보장), 미션 아비타트(주택 문제) 등 사회적 공공성 확보를 기치로 한 전 사회적 체질 개선 사업은 볼리바리안 혁명의 가치를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다.
각종 미션 사업은 지금도 계속 확대 중인데 최근에는 빈민들에게 무료로 개안 수술을 해주는 미션 밀라그로와 안보, 재난 방지, 사법, 보건 등의 영역 확대를 위해 16개의 개방 대학과 8개의 기술 대학 연구소를 건설하려는 미션 알마 마스터, 그리고 빈민들에게 틀니를 제공하려는 미션 스마일 등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는 쿠바와 베네수엘라 간의 연대와 협력으로 가능하게 된 의료복지 사업이다. 차베스 집권 이전인 1997년 12월 신자유주의적인 복지 정책인 ‘종합사회보장체계법’에 따라 ‘베네수엘라 사회보장청’Instituto Venezolano de los Seguros Sociales(IVSS)이 해체되면서 베네수엘라 전체 국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었다.
석유 파업이 겨우 진정되었을 때 시작된 미션 바리오 아덴트로에 참여하기 위해 베네수엘라에 도착한 58명의 쿠바 의사들은 반차베스 민영방송국으로부터 ‘카스트로의 선발대’라는 조롱을 받았으나 2003년 8000명, 2004년 1만 3000여 명의 쿠바 의사들이 약 5000명의 베네수엘라 의료 보조원들과 함께 의료 사업을 벌여 전체 인구의 약 70퍼센트에 해당하는 1700만여 명의 국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었다.
물론 이 과정이 수월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2003년 아라구아 주에서 한 명의 쿠바 의사가 살해당했고, 카라카스의 페타레 지역에서는 쿠바 의사의 베네수엘라 인 보조원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반차베스 세력은 가두집회가 있을 때마다 노골적인 반쿠바 정서를 드러내며 “쿠바 의사를 죽이고 애국주의자가 되자”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15 그러나 쿠바와 베네수엘라 민중 간의 국제적 연대는 어느 때보다 굳건해 지고 있었다. 차베스는 쿠바의 이런 헌신적 노력에 감사하는 의미와 중남미 연대의 뜻으로 저렴한 가격에 원유를 제공하고 있다.
무력과 자본을 이용한 도전에 모두 실패한 반대파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소환을 통해 차베스에게 다시 도전하지만, 그것은 이미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반대파의 몽니일 뿐이었다. 여러 논란 끝에 2004년 8월 15일 진행된 소환 투표에서 반대파는 약 398만 9000명의 소환 찬성표를 조직해냈지만, 대대적인 유권자 등록 운동을 통해 2백에서 3백만 명의 신규 유권자를 만들어낸 차베스가 약 580만 명의 지지표를 조직해냄으로써 또 다시 패배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31일 결과가 확정된 도지사 선거에서 친차베스 후보는 22개 주 가운데 20개 주를 차지했고, 2005년 12월 4일 치러진 베네수엘라 총선에서는 친정부 후보들이 89퍼센트의 득표로 총 167개 국회 의석을 모조리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카스트로가 지적했듯이 이제 차베스 반대파가 차베스를 제거할 방법은 암살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