韻府羣玉有曰姜太公之孫讓國居崔邑因爲崔氏其後居淸河博陵並爲著姓云
崔孤雲所撰僧慧昭碑略曰崔氏之先本漢之冠盖族也世居山東隋煬帝東征時將士多沒高句麗濊貊之地爲其遐氓自後爲我東之民至唐囊括四州沿爲全州金馬之人
今之全州金馬貫者皆其後也云爾{慧昭俗姓崔氏○濊貊卽今之春川江陵等地也}
<운부군옥>에 이르기를 강태공의 후손이 나라(임금 자리)를 사양하고 최읍(崔邑)에서 살면서 성(姓)을 최씨라고 했는데 후손이 청하에서 살고 박릉에서 살면서 유명한 성씨가 되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이 지은 <혜소스님비문(1)>에 이르기를 최씨의 선조는 본래 한나라에서 벼슬 하던 사람들이다.
대대로 산동에서 살다가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살수대첩) 참전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고 또 포로가 되어 고구려 예맥 땅에서 살아 우리 백성이 되었으며, 뒤에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네 개의 주(州)로 나눌 때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지금 전주나 금마로 본관을 사용하는 사람은 모두 그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혜소는 속성이 최씨이다. 예맥은 지금의 춘천, 강릉 등지이다.}
해설(10) : <최씨본원>의 수록 배경.
<운부군옥>은 중국 원나라 사람 음시부(陰時夫)가 지은 백과사전인데 “최(崔, cui)”라는 글자에 관한 설명에
“제나라 강태공의 후손이 나라를 사양하고 최읍에서 살았는데 그리하여 성이 만들어졌고 후손이 청하에 살고 박릉에 살면서 유명한 성씨가 되었다.”(2)
라고 적혀 있다.
- 운부군옥 3권 97페이지 -
또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에는
“선사의 법휘는 혜소요 속성은 최씨이다. 그 선대는 한족으로 산동에 있는 명문가 출신으로 수나라가 요동을 칠 때에 예맥에서 많이 죽고 뜻을 굽혀 그곳 백성이 된 자가 있었으니, 당나라에 이르러 우리나라를 네 개의 군(郡)으로 나눌 때 지금의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는 최창원인데 비록 재가신자 이지만 출가자와 같은 행실이 있었다.”(3)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 -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대웅전 앞
전주최씨의 유래에 관하여 두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조상이 중국에서 들어와 전주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른바 당최론(唐崔論)으로 <최씨본원>의 내용과 같은 것이고, 또 하나는 경주최씨 최언위가 전주에 옮겨와서 살아 전주최씨가 되었다는 이른바 토최론(土崔論)으로, 모든 최씨는 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 후손이라는 이른바 “최씨경주대동기원설(4)”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문성공계와 문열공계가 가문 통합을 검토할 때 문성공계는 당최론을, 그리고 문열공계는 토최론을 주장하였는데, 문열공계 가문에서는 1567년(명종 22) 전라 관찰사 최홍한(崔弘僩)이 <융경보>를 만들면서 서문에 토최론을 근거로 한 <최씨정시조사적(5)>을 수록하고 최언위(崔彦撝)를 원시조, 그리고 최순작(崔純爵)을 중시조로 기록하였으므로 문성공계는 <건륭보서문>에 문열공계의 <최씨정시조사적>과 대비되는 <최씨본원>을 수록하여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문성공계에서는 <최씨본원>을 조상의 유래에 관한 공론(公論)으로 인정하여 이후에 발행된 모든 족보 서문에 수록하여 왔으며 4대파 모든 가문의 현대에 발행된 족보들도 <최씨본원>을 한글로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
* 각주.
(1)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
(2) 齊太公孫讓國居崔邑因氏其後居淸河居博陵並爲著姓.(3) 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蓋山東隋師征遼多沒驪貊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聖唐囊括四郡今爲全州金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
(4) 崔氏慶州大同起源說.
(5) 崔氏定始祖事蹟. 최씨가 시조를 정하게 된 사적.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