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원장 시절--하섬서 「정전대의」와 「교리실천도해」구상
[506호] 1987년 12월 16일 (수) 원불교신문
단단한 돌은 깨지기가 쉽다.
그러나 가장 부드럽고 연한 물은 깨지는 법이 없다.
어느 곳에서나 적응이 쉽다.
공중사도 마찬가지다.
강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
부드러운 물 같은 조화로 섭렵하고 수용하면서 그 가운데 옳은 판단으로 이끌어야 한다.
원기 38년 4월 나는 교정원장 자리에 앉게 되었다.
순서나 역량으로 보아 그때 공산 대봉도님께서 대임을 맡으셔야 할 차례였다.
그런데 공산 대봉도님께서는 극구 사양하시면서
『나는 외교밖에는 못하니 내가 교단 외교는 맡겠소. 동생이 이 일은 맡아 하소』라고 하셨다.
사양하는데도 한도가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참으로 교정원장직에 앉을 마음이 없었지만 공산 대봉도님의 간절한 바램 앞에
더 이상은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어 내가 그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6년 동안 교정원장으로서 교단의 행정을 맡았지만
특별한 역량도 없어 주위의 동지들 도움으로 큰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 후 원기 44년부터 3년 동안은 중앙선원장직에 잇게 되었다.
이 무렵 정산종사님께서 자주 편찮으셨다.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시기까지 되셨다.
전 교도의 한결 같은 염원 속에 간병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때 한남동에 있으면서 간병을 하였다.
정산종사님께서는 평소 신도안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다.
원불교 학과생들 소풍도 신도안으로 가라고 하시어 가기도 했다.
어느 때는 충산법사님에게 지세를 보라고도 하시어 둘러보기도 하셨는데
이때 충산법사님께서는 별 것 아니라고 하시어 굉장히 꾸중을 하셨다.
그래서 그 후 충산법사님은 다시 계룡산 상봉에 올라가 보시게 되었고
비로소 대지라고 말씀하시어 정산종사님께서 굉장히 기뻐하셨다.
신도안은 대종사님 당시 구타원 법사님과 함께 다녀오신 곳이다.
「불종불박」이라 새겨진 바위를 보시고 빙긋이 미소를 지으셨다고 한다.
이처럼 신도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던 정산종사님께서는
간호차 드나드는 나를 보시고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내려가 땅 준비를 하라』고 하시어 총부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재무부장 이셨던 성산종사님과 나는 몇 분 어른들을 모시고 신도안에 갔었다.
신도안에는 「남선교당」이라는 간판을 붙인 교당이 있었지만 그 교세는 너무너무 빈약했다.
심익순 교무가 주재하고 있으면서 피나는 고생을 했다.
좁쌀 밥으로 연명하면서 산에 가 땔나무를 해오는 등
정말 교역자의 사명이 아니었으면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곳을 둘러보고 와 그때부터 한 평 두 평 터를 장만하기 시작했다.
처음 정산종사님께서 제 일차로 시봉금 일부를 하사하셨고
보화당과 시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땅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부시책에 의해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한동안 하섬 수양원에 들어가 머물게 되었다.
그 동안 대종경 초안을 하면서 「정전」에 대해서도 연마하였던 것을 총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정산종사님께 내 나름대로 10여 년 동안 궁굴려 연마했던
삼학팔조에 대한 해설을 보여드렸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나의 교리해설을 보시고 앞으로 교리해석을 그런 식으로 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섬에 들어가게 되었고 「정전대의」에 착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교리실천도해」도 그곳에서 구상하게 되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뒷발 후진들이 교리의 정수를 바르게 파악하여
외지에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내게 이런 일을 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내가 이곳 하섬에 머무는 동안 우물을 파게 되었다.
사흘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일하던 사람들이 그만 포기하려고 했다.
나는 사흘만 더 파면 물이 나올 것 같아 그렇게 해보라고 했는데
정말 삼일 째 되는 날 생수가 땅속 깊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은생수」라고 명명했다.
생수가 없어 곤란을 겪었던 하섬에 그로부터 식수해결이 되었다.
나는 「정전대의」와 「교리실천도해」를 여러 동지들과 함께 하섬에서 초안을 하고
다시 총부로 돌아왔다.
원기 44년부터는 중앙선원일을 보게 되었다.
나는 중앙선원장직에 있으면서
영산 정관평 재방언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그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물론 실무를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종사님 당대에 이루어 놓았던 언답을
다시 넓혀 이룩하는 일에 기초라도 세워야 했기에 참여하게된 것이다.
원기 46년에는 정산종사님의 유시를 받들어 정화사 감수위원으로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토록 교단발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심초사 하셨던 정산종사님께서
날로 건강이 안 좋아 지셨다.
아직도 창립기를 벗어나지 못한 초창기 교단실정은
얼마나 정산종사님의 경륜과 포부가 절실했는지 모른다.
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속 깊은 마음공부를 위해서 배우며 또 가르침을 받들어야 했다.
그러나 원기 47년 1월 24일 우리 교단의 슬픈 날이 다가왔다.
서울대 병원에서도 효험을 못 보시고 총부로 퇴원하신 정산종사님께서 열반에 드시게 되었다.
임종을 하시기 직전 정산종사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모인 대중에게 「삼동윤리」를 설해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가 받들었던 삼동윤리 법문을 다시 말씀드렸다.
그리고 정산종사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언제까지나 모시고 살 것 같았는데 떠나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