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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4월 26일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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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학과 사회 27 / 2013. 08
청교도적 산 믿음의 복음전파자 서서평선교사 ❉
유태주 (한일장신대학교 / 조직신학)
국문 초록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따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으며, 그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함을 전파하였다. 청교도들의 신학과 신앙의 요약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산 믿음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단순히 교리적인 고백문서가 아니라,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당시 부패한 교회와 정치 현실 속에서 참된 믿음을 고백한‘산 믿음의 신학’의 결정체이다. 즉 개혁자 칼빈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청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고백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의롭다함과 거룩함을 입어 구원에 이르는 산 믿음의 신학을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진면목은, 산 믿음의 신학적 교리를 삶으로까지 연결시키는데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개인과 가정에서의 경건생활과 교회개혁과 나아가 사회와 국가개혁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서서평선교사는 그가 다니던 장로교회로부터 장로교 헌법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배우고, 뉴욕 성서사범학교에서 청교도적 전통의 학자인 화이트박사로부터 성경교육과 함께 청교도신앙과 신학을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서서평선교사를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생명보다 귀하게 여겨 선교사로 헌신하게 한 것은, 성경과 사도들이 제시하는 신학과 신앙과 구원관을 17세기에 재현한 청교도적 산 믿음의 신학과 신앙 때문이었다고 결론짓게 된다.
청교도적‘산 믿음’의 복음전파자로서 서서평선교사는 성경말씀의 권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전파와 더불어, 내적이며 개인적인 절제와 경건훈련,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성경학교 설립과 여전도회조직과 활동극빈자 구제 등을 통한 교회봉사, 그리고 대한간호협회를 국제간호협의회(ICN)에 등록시키는 운동을 통한 독립운동 등 사회봉사적인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산 믿음의 복음전파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지금 21세기의 교회와 사회 현실은 목적지를 모르고 날아가는 비행기와 같은 혼돈의 시대이다. 이 혼돈을 극복하기위하여 우리가 서서평선교사로부터 들어야할 메시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마태 5:18, 딤후 3:16)와 성경말씀이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딤전 2:5)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이다. 둘째는 산 믿음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이다. 그는 산 믿음의 증거인 성화의 열매를 가난한자 구제와 환자 치료, 그리고 여전도회를 통하여 교회를 주님 안에서 섬김의 공동체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는 신학자, 목회자, 사회 지도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로서 섬김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그 섬김의 목표는 죽어가는 영혼 구원에 있다.
주제어: 청교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산 믿음의 신학, 서서평선교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 성공이아니라 섬김, 영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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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제1회 한일장신대학교창립자 서서평선교사기념학술대회’(일자: 2013년 5월 2일, 장소: 한일장신대학교 봉사교육관 중부홀) 발제원고를 다듬은 것입니다.
머리말
주후 2013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를 위하여 주후 1922년에 서서평(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徐舒平, 1880~1934)선교사가 설립한 한일장신대학교가 91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며, 교육부로부터 간호학과 설립 인가를 받은 뜻 깊은 해이기도하다. 서서평선교사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중심한 청교도신학에 바탕을 둔 미국장로교회가 파송한 간호선교사로서,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Korean Nurses Association)를 조직하고 9년 동안 회장으로 봉직하였으며, 가장 기본적인 분야의 간호학교과서들을 번역 집필하였고, 1) 조선간호부회를 국제간호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Nurses; ICN)에 가입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조선간호부회가 창립한지 불과 6년 안에 ICN에 준회원으로 가입시키는 2) 등 서서평선교사는 한국간호학 분야의 선구자였다. 마침내 서서평 의료선교사가 91년 전에 세운 한일장신대학교에 간호학과가 신설되어, 내년(2014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게 될 때를 계기로, 서서평선교사 기념세미나를 갖게 된 것은 늦은 감이 있으나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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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Practical Nursing ”, “ Historical Outlines Showing the Relation of Nursing History ”, “ Short History of Nursing ” 등 간호학 분야의 중요한 교과서들을 한국어로 번역 집필하였다.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Miss E. J. Shepping - An Appreciation”, The Korean Mission Field , (Seoul,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October 1934), 218.
2) 백춘성, 천국에서 만납시다 , (서울: 대한간호협회출판부, 1996), 42.
한일장신대학의 기초를 닦은 서서평선교사는 청교도적인 ‘산 믿음’ (living faith)의 헌신적인 복음전파자로서, 타협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도와 함께, 가난한자와 고아, 과부 및 병든 자를 돌보고, 이웃나라에게 국토를 강탈당하고 온 국민이 노예로 사로잡힌 우리 나라의 민족 해방을 위하여 교육자로서 한국민족의 등불이 되어주었 다. 특히 대한간호협회의 전신인 조선간호부회를 창설하고, ICN 정회원으로 가입시키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상 일본에 정면으로 맞선 독립운동으로서 강도만난자의 이웃이 되어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청교도적 산 믿음의 복음전파자로서 서서평선교사를 조명하였다. 먼저 1장에서 영국 청교도신학의 결정체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 신앙고백서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장로교회를 세우고 그 신학의 중심원리를 이룬 사실을 약술과 함께 서서평선교사가 접한 청교도신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2장에서 서서평선교사가 한국에서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산 믿음의 열매를 어떻게 나타내었는가는 경건훈련과 교회사역과 사회봉사 등을 복음전파로 이어졌음을 진술하였다. 마지막 3장에서 서서평선교사의 청교도적인 산 믿음의 신학에 충실한 선교활동의 목표가 영혼구원에 있음을 밝히고, 21세기 혼합주의적 인본주의 늪에 빠진 신학계와 교계 그리고 사회 현실에서 서서평선교사의 발자취가 오늘 한일장신대학교와 한국교회 및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았다.
먼저 서서평선교사에게 영향을 준 청교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3) 의 핵심인 ‘산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한다.
I. 청교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핵심인 ‘ 산 믿음 ’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따라 첫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말씀과, 둘째 복음에 합당한 개인적 사회적 열매로서의 산 믿음(living faith)을 전파하였다. 4) 청교도들의 신학과 신앙의 요약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산 믿음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미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이 된 역사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에서 의회파와 청교도 측이 유리하게 정권을 잡은 동안 장기의회의 결의에 따라 5) 준비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가 1647년 4월 29일에 의회에 보고되었다. 그리고 소요리문답(The Shorter Catechism)이 완성되어서 의회에 보고된 것이 1647년 11월 5일이었고, 대요리문답(The Larger Catechism)은 1648년 4월 14일에 보고되었다. 1648년 3월 22일에 상하 양원의 협의회가 개최되어, 신앙고 백에 대한 견해들을 비교 검토하였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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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태주, “청교도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한국교회”, 「 신학과 사회 」 , 제23집 2호.2010, p. 126-129.
4) 청교도신학을 산 믿음(living faith)이라함은, 칼빈의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이중은혜로서 칭의와 성화를 겸한 구원신학을 청교도들이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산 믿음”이라는 신학용어는 칼빈의 구원론을 계승한 요한 웨슬리가 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5) “1643년 6월 12일에 국회는 한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그 제목은 ‘영국교회의 치 리와 예배형식을 결정하며 그 교리에서 거짓된 비평과 해석을 일소하기 위하여 의회의 상하양원의 자문기관으로서 성직자들과 기타 인사들로 된 대회를 소집하는 법안’이었다. 감독들이 교회를 치리하던 제도가 없어졌어도 영국교회는 남아 있었으므로, 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될 대회를 소집할 권위로서 보편적으로 인정 된 것은 의회뿐이었다. 법안에서 지명된 대회구성원들은 그 시대 교회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A. A. 하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해설 . 김종흡 옮김, (경기도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30.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국의 정치상황이 청교도를 지지하던 의회파에서 왕당파로 넘어가게 됨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는 것을 포함한 의회의 결정들이 정치적 지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1662년 8월 24일에는 찰스2세에 의해서 2,000명 이상의 장로교 목사들이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지지한 이유로 그들의 교회로부터 면직되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앙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그때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도 함께 가지고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미국의 처음 지방 노회가 이 지방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채택한 것이 1729년이었다. 7) 20여 년 동안의 청교도 통치는 분열로 실패하여, 왕정이 복고되었지만,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서 다시 꽃피기 시작하여 오늘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가 이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1. 성경에 기초한 구원의 복음 제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산 믿음의 신학으로서 그 목표를 구원에 두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단순히 교리적인 고백문서가 아니라,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당시 부패한 교회와 정치 현실 속에서 참된 믿음을 고백한 산 믿음의 신학의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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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A. A. 하지, Ibid., 30.
7) Ibid., 31.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 있어서 산 믿음의 신학으로서 두 가지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라 할 수 있다. 첫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성경의 권위를 중요시한다. 신구약의 “이 모든 책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 8) 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 문에 성경말씀은 가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됨을 고백한 것이다. 9) 또한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 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된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 10) 고 진술함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하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계획”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진술함으로 11) , 성경이 산 믿음의 확고하고 유일한 원천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데 그 권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하나님에 대하여 진술한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언행심사(단 3:34,35; 시 135:6; 행 17:25,26,28; 욥38,39,40,41)를 보존하시고(히 1:3), 감독하시고, 처리하시고, 통치하시되,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마 10:29-31) 그렇게 하시며,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섭리에 의하여(잠 15:3; 시 104:24; 145:17), 그의 무오한 예지와 그 자신의 의지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결정을 따라서 하신다(엡 1:11; 시 33:10,11). 이로써 그의 지혜, 능력, 공의, 선하심, 그리고 자비의 영광을 찬미케 하신다(사 63:14; 엡 3:10; 롬 9:17; 창 45:7; 시 145: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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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 Edition Three, (London: the Company of Stationars, 1647), Chapter 1, 2). 다음부터는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를 WCF로 표기하기로 한다.
9) 눅 16:29,31; 엡 2:20; 계 22:18,19; 딤후 3:16.
10) WCF., 1, 5).
11) Ibid., 1, 6).
2.‘산 믿음’의 구원을 위한 신앙고백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신앙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의 그리스도, 즉 구주이심을 우리는 의심치 않 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통하여 죄사함과 거룩하게 됨을 얻음으로 구원도 또한 주시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13) 그런데 칼빈의 가르침을 받은 청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고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의롭다함과 거룩함을 입어 구원에 이르는 산 믿음(living faith)의 신학을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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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Ibid., 5, 1).
13) “We do not doubt Jesus is our Christ, that is, Savior. But as we obtain through him forgiveness of sins and sanctification, so also salvation has been given, in order that we may at last be led into God's kingdom, which will be revealed on the last day.”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 at Basel in 1536, Trans. F. L. Battles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6) 2:2, p.43.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주님의 공로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두 가지 은혜는 칭의와 동시에 성화임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진술하고 있다. 이는 칼빈의 견해(Double Grace through faith)와도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14) .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가 조화를 이루는 산 믿음의 신학을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산 믿음의 열매로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진면목은, 이 신앙고백의 배경이 말해주듯 단순한 교리를 진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산 믿음의 신학적 교리를 산 믿음의 삶으로까지 연결시키는 데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삶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이는 이 신앙고백의 당사자들인 청교도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생활에서의 ‘산 믿음으로서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청교도의 산 믿음의 열매는 개인과 가정의 경건생활과 교회개혁과 사회 개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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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유태주, “칼빈의 이중은헤론의 의미와 적용”, 「 한국기독교신학논총 」 Vol. 77. 2011, p. 53-82.
1) 경건생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가정생활에서 경건생활 훈련으로서 믿음의 열매로서의 삶을 추구하고 있다.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도록(the mutual help) 제정되었다(창 2:18). 또한 합법적인 자손들을 통하여 인류가 번성하고, 경건한 씨를 통하여 교회가 번성하고(말 2:15), 부정(不貞)을 막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고전 7:2,9). 15) 가정은 우선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봉사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가 정생활을 통하여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인류에 봉사하도록 하는데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선언한 것이다. 동시에 가정은 “합법적인 자손들을 통하여 인류가 번성하고, 경건한 씨를 통하여 교회가 번성하고 (말 2:15), 부정(不貞)을 막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는 규정은 동성애나 동성혼 같은 합법적인 자손을 기대할 수도 없는 비윤리적인 혼인을 거부하는 규정이기도하다. 그러므로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 금지와 같이 기존의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문화와 윤리에 심각하게 반하는 조항을 법률로 규정하는 것은 도리어 사회적인 갈등과 혼란을 야기할 것” 16)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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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WCF., 24, 1).
16) 차별금지법에 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성명서, 2013년 4월 8일.
2) 교회개혁
교회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는, 먼저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은혜와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영광 안에서 주님과 교제를 갖는다(요일 1:3; 엡 3:16-19; 요 1:16; 엡 2:5,6; 빌 3:10; 롬 6:5,6; 딤후 2:12). 그리고 성도들은 사랑 안에서 서로 연합되어 있는 까닭에, 각자가 받은 은사와 은혜 안에서 교제한다(엡 4:15,16; 고전 12:7; 3:21-23; 골 2:19). 또한 피차 덕을 세워 사람에게 안팎으로 유익되게 하는 의무들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살전 5:11,14; 롬 1:11,12,14; 요일 3:16-18; 갈 6:10). 17)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교제를 강조한 것은, 이른바 교황을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로 삼는 자들과 이와 유사한 제도의 영국 국교회에 대하여 단호한 개혁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그들 상호간에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다른 신령한 봉사를 하는 일과, 또한 그들의 각양의 능력과 필요에 따라 물질로 서로 도와주는 일에 있어서, 거룩한 교제와 교통을 유지해야 한다(히 10:24,25; 행 2:42,26; 사 2:3; 고전 11:20). 이와 같은 성도들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대로 어디에서나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것이다(행 2:44,45; 요일 3:17; 고후 8:9; 행 11:29,30). 18)
그러나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두 가지 잘못되기 쉬운 점을 신앙고백은 경계하고 있다. 먼저 그리스도와 성도의 교제라하여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갖는 이 교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리스도의 신격의 본체를 소유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어느 면에서든지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긍정한다면 그것은 불경건하고 신성 모독적인 것이 된다(골 1:18,19; 고전 8:6; 사 42:8; 딤전 6:15,16; 시 45:7; 히 1:8,9). 19) 이러한 경계는 에덴에서의 타락 이후 인류 역사 속에 침투한 교만하고 교활한 인본주의사조의 교회침투를 막는 고백으로서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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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WCF., 26, 1).
18) Ibid., 26, 2).
또한 성도들 상호간에 갖는 교제로 인하여, “각자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재산의 소유권이 상실되거나 결코 침해되는 것은 아니다(출 20:15; 엡 4:28; 행 5:4)”고 고백함으로, 성경적인 기독교의 사회봉사는 자본주의 (Capitalism)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몇몇 부자의 독선으로 가도 안되겠지만, 공산주의(Communism) 이데올로기에 넘어가 기업(heritage)을 상실함으로 국민 모두 거지가 되는 불행을 막아주는 혜안을 17세기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제시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본다.
3) 사회개혁
국가위정자로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직자로 임명될 때에 공직을 맡아 수행하는 것은 적법하다(잠 8:15,16; 롬 13:1,2,4). 그 직분에 종사함에 있어서 각 나라의 건전한 법률에 따라 특별히 경건과 공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시 2:10-12; 딤전 2:2; 시 82:3,4; 삼하 23:3; 벧전 2:
13). 20) 그러나 국가위정자로서 반드시 기억할 것은, “온 세상의 최고의 주(主)요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위정자들을 세우셔서 자기 아래 두시고 자기 자신의 영광과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그들에게 무력을 허용하였으니 이는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격려하는 한편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벌하기 위함이다(롬 13:1-4; 벧전 2:13,14)” 21) 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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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Ibid., 26, 3).
20) Ibid., 23, 2).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정교의 분리를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즉 “그들이 조금이라도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간섭해서는 안 된다.” 22) 그러나 국가 위정자는 양육하는 아버지와 같이 우리의 참된 교회를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그럴 때에 참된 교회의 어느 한 교파를 다른 교파들보다 우대하지 말고, 모든 교역자들이 그 신성한 직책을 완전히 자유롭게 수행하며, 폭력이나 위협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사 49:23). 23) 이러한 규정은 17세기 당시 영국국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횡포에 대한 개혁인 동시에, 21세기 우리나라 국회에서 문제되고 있는 이른바 “차별금지법안”을 통하여 건전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실상 기독교 복음전파를 막고자하는 악법에 대한 경고가 되는 규정이기도 하다. 그 차별금지법안들이 담고 있는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조 항은 종교간의 변증과 건전한 비판까지 막아서 결과적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게 될 것이다.” 24)
그리고 국민과 교회 및 종교단체가 국가공직자를 위한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신중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위 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딤전 2:1,2)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주며(벧전 2:17), 조세와 그 밖의 공과금을 바치고(롬 13:6,7) 그들의 적법한 명령에 복종하고 양심을 위하여 그들의 권한에 복종하는 것은 백성들의 의무이다(롬 13:5; 딛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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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Ibid., 23, 1).
22) Ibid., 23, 3).
23) Ibid., 23, 3).
24) “차별금지법에 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성명서”, Ibid.
신앙생활을 하지 않거나 신봉하는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그 위정자의 정당하고 적법한 권위를 인정치 않거나 순종치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벧전 2:13,14,16).” 25) 이때 “교회의 직분 맡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롬 13:1; 왕상 2:35; 행 25:9-11; 벧후 2:1,10,11; 유 8-11). 하물며 위정자들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때에 교황이 그들에 대하여, 또는 그들의 백성에 대하여 어떤 권한이나 사법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만일 교황이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거나 또는 기타의 다른 구실로 그들의 통치권이나 생명을 빼앗을 권한이 전혀 없는 것이다(살후 2:4; 계 13:15-17).” 26)
그러면 청교도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서서평선교사에게 어떠한 경로로 영향을 주게 되었는가?
3. 서서평선교사가 접한 청교도 신학과 신앙
청교도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을 교회기본헌법으로 받아들인 미국장로교회에서 신학과 신앙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된 서서평선교사가 청교도 신학과 신앙과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먼저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서서평선교사가 청교도 신학과 신앙을 받아들이고 선교사로 결심한 연유를 알 수 있다.
1) 서서평선교사의 청교도적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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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WCF., 23, 4).
26) Ibid., 23, 4).
서서평선교사(Missionary, Miss Elisabeth. J. Shepping, 1880-1934)는 1880년 9월 26일 독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된 어머니는 3살 난 서평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갔다. 27) 개구쟁이였고 춤추기를 좋아했던 서평을 할머니는 로마 카톨릭 교구학교에 입학시켜주었다. 초라한 옷차림으로 따돌림 받던 학교생활도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중단하고, 11살 때 인 1891년 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28) 장래 할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던 차에, “예수를 본받아라!”는 영감을 받고, 교육과 전도와 병자치료(마태4:23)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1901년 뉴욕시립병원 (New York City Hospital)에서 간호학을 전공하였다(21세 전). 29) 간호사가 된 후, 뉴욕시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즉 이탈리아 이민자수용소와, 유대인 요양소에서 부자와 가난한자 모두를 간호하며 일한 경험이, 한국민족을 위한 그녀의 헌신적 삶에 밑거름이 되었다. 30) 서서평선교사는 어느 주일 아침에 동료간호사의 초청으로 개신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명쾌한 구원관에 매료되었다. 그 때 받은 감동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과거의 명목적인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로마교회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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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백춘성, Ibid., 23. 양창삼, 조선을 섬긴 행복 , (서울: Serving the People, 2012), 84-85. “서평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극복해야할 깊은 정서적 상처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 첫 번 째가 그가 태어난 직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서평을 할머니에 게 맡긴 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다. ― 할머니는 서평을 맡게 되었고, 서평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났다.”
28) 백춘성, Ibid., 22-24.
29) Ibid., 24-26.
30)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Miss E. J. Shepping - An Appreciation”, The Korean Mission Field , 218.
그는 장로교회에 다니며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였다. 31) 서선교사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되고 나서, 그녀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화이트박사(Dr. Wilbert Webster White, 1863-1944)의 지도를 받아 뉴욕 성경사범학교(Bible Teachers' Training School, 현 New York Theological Seminary)를 1912년에 졸업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열정으로 선교현장에 생명을 드리고, 그들에게 생명의 빵을 먹이고자, 32) 같은 해 3월 20일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하는 간호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광주선교부에 배속된 그는 맨 먼저 한국말과 한국풍습을 익히면서 이름도 한국식으로 서서평(徐舒平) 이라고 지었다. 33) 바울처럼 서서평은 전심전력하여 사명 감당에 일생동안 열심히 일하였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1912년 한국에 도착하여 1934년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 비록 병약한 몸이었 지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초지일관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하여 일하였다. 34)
그녀는 제중병원(기독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간호하면서 특별히 나병 환자들을 정성을 다해 돌봤으며, 길에서 여자 나병환자나 거지들을 만나면 집에까지 데리고 와서 목욕시키고 밥을 먹여서 자기의 옷을 나누어 입혔기 때문에, 평생 두벌 옷을 갖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언제나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녀가 죽을 때, 집에는 옥수수 두 홉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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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양창삼, Ibid., 88.
32)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8.
33) 정해송, 새로쓴 한국교회사 , (서울: 미문커뮤니케이션, 2010), 261.
34)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8.
서서평선교사는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금주, 금연운동을 전개했고,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전개했다. 이일학교를 설립하고 가난한 여학생들이 자력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명주, 모시, 마포, 무명, 베 등의 천에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해서 번 수익금으로 학생들의 학비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제한되어있을 때, 이일학교는 호남지역 여성교육기관으로서 교회와 사회의 많은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36) 이일학교가 발전하여 오늘의 한일장신대학교가 된 것이다.
서서평선교사는 1922년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광주제일교회인 금정교회에 부인조력회(여전도회)를 조직하여 복음전도와 성경교육과 여성인권신장운동 등 목회 협동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지금의 성미제 도는 그 때 만들어진 것이다.
서선교사는 많은 간호학교과서를 한국어로 번역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그녀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1923년에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1925년의 입회청원과 1926년 가입청원 문의와 외국 간호협회와의 유대 등 맹렬한 활동으로 조선간호 부회를 국제간호협의회(ICN)에 준회원으로 입회시켜 정회원을 준비시킨 사실이다. 37)
서선교사는 평생을 가난하고 미약하며 꺼져가던 등불 같던 처지의 한민족의 영혼구원을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헌신의 삶으로 전해주고 1934년 6월 26일 54세를 일기로 광주 선교사 자택에서 일생을 마쳤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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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정해송, 새로쓴 한국교회사 , 261-262.
36) Ibid., 262.
37) 백춘성, 천국에서 만납시다 , 39-40.
2) 서서평선교사가 만난 청교도 신학
서서평선교사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가 세운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청교도 신앙에 입문하게 되었다. 미국장로교회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을 근간으로 세운 교단이다. 그러므로 미국장로교회에 출석하게 된 장래 서서평선교사는 자연스럽게 청교도신학과 신앙의 분위기에 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녀가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되고나서, 열성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성경책을 가까이하였다.” 39) 그 결과 서서평선교사는 성경사범학교에 들어가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으며, 그녀를 가르쳤던 화이트 박사로부터 철저한 성경교육과 청교도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40) 화이트박사는 무디의 학생자원운동(SVM)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적 전통의 학자로서, 귀납적 성경연구 방법을 최초로 개발하였다. 41) 서선교사가 이때에 배운 성경교육은 한국에서 확장주일학교와 이일성경학교 교육에 적절히 활용되었다고 본다.
요약하면 서서평선교사는 어린 시절에는 로마교회의 환경에서 자랐으나, 미국에 건너가 장로교회에 출석하면서 청교도적 바른 신앙과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한국선교사로서 영혼구원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서서평선교사를 이처럼 새롭게 한 것은 청교도적 신학과 신앙(성경과 사도들이 제시하는 신학과 신앙과 구원관을 17세기에 재현한) 때문이었다고 결론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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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23년 동안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육가로, 사회봉사자로 선교를 수행하다가 1934년 6월 영양실조로 죽었다.” 임희모, “선교사 서서평과 한일장신대학교의 선교적 영성”, 「 본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 주방란 ․ 하달리 ․ 황인복 교수 정년 퇴임기념논문집, 2009, p. 256.
39)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8.
40) Ibid., 218.
41) 양창삼, Ibid., 91.
Ⅱ . 청교도적 ‘ 산 믿음 ’ 의 복음전파자 서서평선교사
서서평선교사는 어느 날 친구를 통해서 한국에 갈 간호사 의료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부에 찾아가 지원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채용 되어 간호사 자격으로 의료선교사로서 1912년부터 1934년까지 22년 동안 한국선교에 생명을 바치기까지 헌신 하였다. 42)
서서평선교사는 청교도적 산 믿음의 복음전파자였다. 즉 청교도적 산 믿음은 성경의 권위를 중요시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복음의 메시지이며, 그 믿음은 칭의와 성화의 열매들로 나타났다. 그런데 서서평선교사도 성경말씀의 권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전파와 더불어, 내적이며 개인적인 절제와 경건의 열매와 간호사로서 사회봉사와 한일장신대 전신인 이일성경학교 설립과 한국 독립운동 등, 외적이며 사회적인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산 믿음의 복음전파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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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강택현, 사명자의 길 , (전주: 선명출판사, 2013), 97.
1. 구원의 복음말씀 전파자로서 전도와 교회활동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 금정교회(제일교회)를 도우면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내외에 전파하였다. 교회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선교부로부터 받은 보수의 절반을 교회에 헌금하였고, 그가 세운 이일학교 학생들과 금정교회에 봉사하면서 교회부흥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1932년 6월에 금정교회는 서서평 선교 20주년을 기념하는 예식을 거행 하였으며, 그가 창설한 교회여성신앙운동인 조력회에서는 그의 선교 20 주년 기념비를 만들어 이일학교 교정에 세웠다. 43)
1) 교회 여전도회 창설
한국교회에서 여전도회의 역할은 막중하다. 교회에 여성도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국민통계에서 여성인구가 많아서라기보다 전도부인 또는 여전도회원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에서 여전도회의 움직임이 평양등지에서 있어왔으나, 본격적으로 그 기틀을 마련하고 조직화한 인물은 바로 서서평선교사이다. 지금은 부인전도회, 여전도회, 여선교회 등 다양하게 불리지만 초기엔 부인조력회 (婦人助力會 Women’s Auxiliary)라 하였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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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비석은 이일학교가 전주 한예정학교와 병합을 함으로 전주한일신학교 교정 (중화산동)으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학교가 완주군 신리로 옮겨가매 한예정의 매균여사의 기념비와 함께 신리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았으니, 지금까지 한일장 신대학교 선교기념홀 앞뜰에 있다.” 강택현, Ibid., 105-106.
부인조력회 조직의 동기는 이렇다. 미국장로교 부인조력회 W.C. 윈스보로 회장이 1920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주, 군산, 목포, 순천을 거쳐 광주 오원 기념각에서 10일간 사경회를 하였다. 이때, 윈스보로 회장이 서서평선교사에게 한국교회에도 부인조력회를 조직하여 보라는 권고를 받아들여, 서서평선교사는 부인조력회를 시작하였다. 45) “윈스보로 부인의 제안은 경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지만, 서평양의 생각에도 이일은 너무도 성경적이었다. 예수님과 열 두 제자로 조직된 전도단도 부인들의 조력에 의해서였던 것이고 보면(눅 8:1-3), 오늘날 전도의 사명을 띤 교회도 부인들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서평양은 사경 회에 모인 부인들을 기반으로 각 교회에 부인조력회를 조직할 것을 결 심했다.” 46)
서서평선교사는 그의 지도를 받은 김필례 47) 조아라 48) 등 한국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부인조력회를 조직해 나가기 시작했다. 조력회를 어떻게 조직해 나갈 것인가 기도하던 중, 우선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인 사람들에게 한글 보급운동을 펼치는 동시에 성경을 가르쳤다. 그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부인조력회, 곧 여전도회의 시작이다. 1922년 12월 26일에 첫 번째 한국 여전도회가 서평의 주도로 광주 금정교회에서 조직되었다.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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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양창삼, Ibid., 167-168.
45) 백춘성, Ibid., 76-79.
46) Ibid., 79.
47) 김필례는 정신여학교와 일본청산학원과 미국유학을 마친 다음 해방 후까지 광주 금정교회 부인조력회를 이끌었고,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교감, 그리고 해방 후에는 수피아와 정신여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양창삼, Ibid., 172.
48) 조아라는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이일학교 교사로 봉직하였고 서평의 선교 사업을 적극 도왔으며, 광주민주화운동 지도자로도 알려져 있다. 양창삼, Ibid., 172.
서서평선교사는 금정교회에서 부인조력회를 조직한 다음 각 지역교회를 순회하면서 이를 조직해 나갔다. 여전도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일학교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이 금정교회에 출석하면서 이일을 도왔고, 부인조력회사업을 전남지역으로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 였다. 50)
1925년 전남노회는 여전도회를 공식적으로 인준했다. 광주에서 시작 된 여전도회는 전국으로 확장되어나갔다. 여러 지방 여전도회를 모아 전국연합회로 만들어나갔다. 전국연합회 결성에도 공로를 세운 것이다. 1927년 원산에서 모인 제17회 장로회총회의 허락을 받아 11개 지방위 원회가 모여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결국 1928년 제17회 총 회에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조직을 승인받게 되고, 1933년에는 대한 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이를 공식으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서선교사의 조력회 계획과 프로그램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51)
조직당시 전국여전도회연합회의 목적은 ‘그리스도 복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총회 내외지 전도부 사업을 찬조하는 것’이었다. 여전도회가 이름그대로 총회를 협조해 나가는 단체가 되어야 하며, 결코 경쟁적인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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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양창삼, Ibid., 169. 부인조력회 조직에 대한 장애물들이 안팎으로 많았고, 선교사 측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왔고 보았고’그동안 수많은 반대와 무시와 조잡하게 주의 일과 교회의 사업을 행하는 방식을 ‘정복하였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9명의 임원들과 함께 한 개의 장로회 조력회를 그날 시작하였습니다.”, 양국주,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 이야 , (서울: Serving the People, 2012), 182.
50) Ibid., 172.
51) Ibid., 174-175.
이런 의미에서 나온 운동이 ‘성미운동’이다. 경제력이 미약한 가정주부로서, 매 식사 때마다 가족별로 쌀을 한 숟갈 씩 떠내어 모은 것으로 주님의 사업을 하고 교회를 도울 수 있었다. 주린 나그네와 걸인을 먹여주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성도들을 대접하는 일도 성미로 할 수 있었다. 53)
여전도회 활동은 낮은 자리에서 교회의 모든 기관을 섬기는 역할을 통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였던 여자 성도들의 수가, 오늘과 같이 여성신자가 거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 주된 원인이라 하겠다. 그리고 여전도회는 세계선교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 확장주일학교운동
서서평선교사가 광주주변 20리 안팎 마을마다 주일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을 확장주일학교라 한다. 주일학교라고 해서 교사(校舍)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정 방이나 마당 아니면 사랑방 등을 빌려서 모인 것이다. 54)
확장주일학교의 선생은 처음에는 이일학교 학생들과 어비신선교사가 교장인 농업실습학교(현 호남신학대학교) 학생들로만 했으나, 차츰 확장 해 감에 따라서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상급생들과 선생들까지 동원하여 예비 공부 후 부락마다 파송하였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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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Ibid., 174-175.
53) 백춘성, Ibid., 91-92.
54) Ibid., 96.
55) Ibid., 96.
아이들을 모으는 데는 농업실습학교 학생들이 나팔을 불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예쁜 그림엽서를 한 장씩 주어 보내면서, 다음주일에는 다른 아이들도 많이 데려 오라고 일러주고, 새 학생을 인도한 학생에게는 성적에 따른 상을 주었다. 그러면 다음주일에는 마을 어린이들이 아침 일찍부터 떼를 지어 마을 어귀까지 나와 선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56)
그 당시 주일학교협회 상무이사였던 정인세(전 귀일원 원장)는, “그때 주일학교 수가 45내지 47개처였는데, 기성교회(금정, 양림, 중앙, 구강 정, 진다리, 소태리, 중흥리)가 있었고, 확장주일학교는 약 40개소 쯤 되었을 것이다”고 말한바 있다. 57)
이렇게 서서평선교사는 확장주일학교운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한국 땅에 널리 전파하였다.
3) 조랑말 전도와 제주도 선교
서서평선교사는 영문전도지를 한글로 번역했고, 복음전하는 일에도 혼신의 힘을 다 했다. 전도대를 편성하여 전라도 일대를 다녔으며, 추자도를 비롯한 섬에도 전도했다. 58)
당시만 해도 교통수단이 열악해서 ‘스파르타’라는 조랑말을 타거나 조랑말이 끄는 달구지를 타고 시골지역을 전도했다. 조랑말 이름도 스파 르타 외에 양키(Yankee), 점박이(Spot) 등 여러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 다. 이는 조랑말을 여러 이름으로 부를 가능성도 있지만, 그의 오랜 전도사역에 여러 조랑말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육로와 해로로 여행하면서 그가 이룬 전도와 교육의 열매는 실로 놀랄 만한 것이었다. 59) “주형옥 목사는 서서평을 여걸선교사라고 부른다. 서평이 키가 큰데다 당시 호랑이도 있고, 강도들이 난무하던 화순 너릿재를 조랑말을 타고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이 뒤따랐어도 그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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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Ibid., 96.
57) Ibid., 96.
58) 양창삼, Ibid., 155.
한번은 서서평선교사가 조랑말로 순회전도 하면서 어느 시골 마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마을 바로 뒷마을에 산다는 한 상인이 찾아와서, 자기 동네 부인들도 외국선교사가 와서 예수님 말씀을 들려주셨으면 한다는 예기를 전해 듣고, 밤에 한국인 소년 원달이를 조랑말이 끄는 마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61) 어둠 속에서 좁고 거칠은 자갈길을 한 4마장 (1.6km)정도 갔을 때, 맹수의 소리에 놀란 조랑말이 도망친 일이 일어 났다. 원달이는 말을 찾으러 보냈고, 서평선교사는 그 마을을 찾아가는 데 6마일 정도 걸어야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비바람마저 강하게 불어 진흙탕 계곡으로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계곡에서 간신히 나온 서 선교사는 바람이 잔잔해지고 쉴 수 있는 집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마침내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주인은 친절히 맞아주었는데, 비좁은 방에서 7명의 가족들 틈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찢기고 상처 난 그를 위해 가마를 불러주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는 자기를 기다리는 11명의 부인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쳐 주었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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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Ibid., 155.
60) Ibid., 156.
61) 백춘성, Ibid., 80-81.
62) 백춘성, Ibid., 81-86. 양창삼, Ibid., 156.
이처럼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서평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을 찾아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복음을 멀리 그리고 널리 전하였다. 그는 그 많은 어려움을 기쁨으로 견뎌냈다. 순회전도를 통해 서선교사는 가을과 겨울 농한기에 시골 교회를 두루 다니며 성경을 가르쳤다. 부인회선 교사들과 함께 전도했던 이교환 목사는 서선교사를 가리켜 1000명분의 일을 혼자서 하는 분이라고 그 열성과 근면을 칭송하였다. 63)
서선교사는 제주도와 추자도 복음 선교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와 마찬가지로 남장로교회 선교부 관할 지역이었 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여름 한달 동안 지리산으로 피서를 가는데, 서선교사 만은 제주도와 추자도 전도에 힘을 쏟았다. 다른 선교사들의 손길이 닿지 못한 곳을 방문하곤 했다. 그에게는 일이 휴식이었다. ‘아 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항상 충실하고자했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모슬포를 중심으로 부인조력회와 확장주일학교에 전 력하였다. 64)
1908년 봄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복음전도를 시작한 이래, 1914년에 전라노회가 모슬포에 윤식명 목사를 파송하였다. 1917년 전라노회가 전북과 전남 두 노회로 분립되면서 제주 북부지방은 전북노회가, 남부지방은 전남노회가 구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주 본도에는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추자도는 미전도 개척지로 방치되어 있었다. 1920년 서선교사는 타마자 목사와 54시간의 긴 항해 끝에 모슬포에 도착하였고, 목사사택에 머물면서 전 교인을 5개 반으로 나누어 성경공부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서선교사는, 1922년에 추자도 출신으로 모슬포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원용옥을 추자도에 확장주일학교 선생으로 파송하였다. 이로 인해 추자도에 교회가 서고, 원용옥의 삼촌 원상건을 초대전도사로 파송하였다. 서선교사도 자주 왕래하였다.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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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양창삼, Ibid., 156.
64) Ibid., 158.
서서평선교사는 서거 한해 전인 1933년 병약한 몸으로 생애 마지막 2주간의 사경회를 인도했다. 동행했던 서로득 부인이 극구 말렸지만 “건강이 회복된 다음에 하자면 하나님 사업은 언제 하겠는가? 약속한 일이니 기어코 가야한다”며 병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그녀의 간호를 맡 았던 변마지 선교사(Missionary Margaret F. Pritchard)는 “위독하다 할 정도로 병세가 어려웠는데도 ‘죽었으면 죽었지, 목숨이 붙어있는 이상 가지 않을 수 없다’며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하였다. 66)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자기 생 명보다 귀한 것임을 보여준 참된 목회자 상을 볼 수 있다.
서서평선교사는 제주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150리 또는 200리나 되는 먼 거리에서 모여든 해녀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는데 옷조차 남이 입혀주어야 할 만큼 쇠약한 몸에 더운 물주머니를 허리에 얹고 침상에 누워서 가르쳤다. 67) 그녀는 2주간의 모슬포 사경회가 끝난 후에도, 나귀를 타고 10개 교회와 전도소를 순회하려고 하였다. 이처럼 서선교사의 불타는 선교 열정에 감동한 동역자 서로득 부인은 “찢겨지고 조각난 날개를 가지고도 더 큰 비상을 계획하고 있는 정열이 얼마나 아름다운 봉사의 비전이며 승리인가! 용맹스럽고 순수한 영웅적인 자질에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다.” 68) 고 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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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Ibid., 159.
66) Ibid., 160-161.
67) Ibid., 161.
68) Ibid., 161-162.
2. 산 믿음의 열매로서 실천적 선교사역
믿음은 성령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령의 열매인 성화를 동반한다. 성령의 열매는 내적(인격적) 열매와 외적(사회적) 열매를 동 반한다. 내적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를 중심한 인격적 열매이며, 외적 열매는 소금과 빛의 직분을 중심한(마 5:13-16, 행 1:8) 대 사회적인 열매인 것이다.
1) 내적인(인격적인) 성령의 열매
서서평선교사는 스스로 처녀로서의 경건과 청빈한 삶을 통하여 성령의 내적인 열매를 맺는 데 힘썼다. 특히 그녀의 급한 성품을 다스리는 경건의 훈련을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서선교사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사명을 감당하느라 동분서주하다가 결국 몸져눕게 되었다. 1934년 2월 27일,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멈추었다 잠시 후 깨어난 적이 있는데, 그 때 신비스런 체험을 하였다. 그녀를 보살펴 주던 박해라에게 가느다란 말로, 천국 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당신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믿음을 가졌는데 왜 못 들어간다는 것인가?’ 따져 물었더니. ‘당신은 그 성급한 성질을 고치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찬란한 천국만 바라보고 할 수 없이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69)
이 극적인 체험은 서서평선교사가 평소 인격적인 경건훈련에도 얼마나 힘썼는가를 보여주는 일화이기도하다. 서선교사의 경건훈련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픔, 성지에서 얻은 풍토병의 고통 등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내하며 말씀과 기도로 정금 같은 70)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성화시켜 나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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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강택현, Ibid., 108.
그러므로 서서평선교사는 결국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하나님 앞에 갔다. 그녀의 최후가 다가온 듯하자, 각처의 선교사들과 제중병원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모여왔고, 가족같이 함께 해준 박해라와 그녀의 아들들이 함께 모여 서선교사의 운명의 시간만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서서평선교사는 주위 사람들을 돌아가면서 보고는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갑니다. 이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먼저 가니 하늘나라에서 다 시 만납시다(Let’s meet in heaven).”하고 오른손을 들어 할렐루야를 외치고 손을 내려놓으면서 활짝 웃는 얼굴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71) 실로 서서평선교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청빈과 절제와 자신의 생명까지도 사명을 위하여 바치기까지,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격적인 열매(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72) 를 맺은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
2) 외적인(사회적인) 성령의 열매
서서평선교사는 성령의 내적인 열매와 더불어 성령님의 외적인 열매로서 사회봉사, 교육사업, 독립운동 등에도 심혈을 기우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역들의 목표는 영혼 구원에 있었다. 73) 이러한 사회적 활동도,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오직 믿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믿음의 증거인 성화로서의 열매였던 것이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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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71) 강택현, Ibid., 108.
7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1) 사회봉사; 가난한자 구제, 간호사 활동 등
서서평선교사는 구제를 중요시했다. 그는 1928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조선간호부회 총회 설교에서도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 떻게 될까요?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 까요? 구제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 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터질 만큼 예수를 부르짖고 기독교신자라고 자처한다고 해도 구제 가 없다면 그것은 참 기독인이 아닙니다.”라고 구제를 강조하였다. 75) 서선교사가 동역했던 금정교회는 1930년도 전체 예산의 15%가 구제 비였다. 성미도 매달 3가마 이상을 거두어 가난한 자와 환자들을 구제 하는 데 사용하였다. 서선교사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지 않고는 견디 지 못하였다. 구호대상자를 파악하는 일을 부인조력회가 맡도록 하고, 보고 받은 대로 구호품을(의복, 양식, 때로는 감귤 등) 차에 싣고 처지와 형편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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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8.
74)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은 이중의 효과를 가지는데 칼빈은 이를 이중은혜(double grace) 내지 이중용납이라 한다. 첫째는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의 칭의를 직접 이끌어 낸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시각에서 신자가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신자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된 신자의 선행을 하나님께 서는 신자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시고 상 주신다. Jean Calvin,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559).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Corpus Reformatorum vol. XXX. Ed., Guilielum Baum (New York and London: Johnson Reprint Corporation, 1864), Ⅲ, xi, 1.
75) 양창삼, Ibid., 182.
1929년 5월 조선간호부회 제7차 총회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렸는데, 서선교사는 ‘예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설교 전 그는 회원들과 함께 구제에 관련된 “마 10:8, 눅 18:18-25, 롬 12:8” 성경말씀을 세 차례나 읽었다. 77)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 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 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 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눅 18:18-25)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 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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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Ibid., 182.
77) Ibid., 183.
1930년 8월 7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 선교보고서에서,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여성들이 담배 에 사용하는 돈만으로도 영적으로 많은 생명을 구할 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한센 환자들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78)
서선교사는 한국에는 사회봉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한 없이 많 다고 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극빈자,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자, 자신이 받은 혜택에 적절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자 등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극빈자와 일용노동자를 우선적인 사회봉사 대상으로 보았다. 79) 그는 자신의 생필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조리 주었고, 심지어는 덮고 잘 이불까지도 내어주었다고, 서선교사의 간호를 전담하며 임종을 지켜 본 변마지(M. Pritchard) 선교사는 증언한다. 80) 서서평선교사는 서로득 부인(Mrs. Martin L. Swinehart)의 말대로, 마지막 병고로 쓰러질 때까지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시간과 마음과 그의 소유 전체를 한국인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한 오직 한길만을 걸었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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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Ibid., 183-184. “(서울에서) 광주로 다시 내려간 서평은 제중원 간호부장이 된 다. 당시 그는 한센환자 간호에도 힘썼다. 1922년 당시 한국의 한센 환자 수는 12,000명에 육박했다.” 양창삼, Ibid., 126.
79) Miss Elsie J. Shepping, “District Nursing II”, The Korean Mission Field , (Seoul,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October 1920), 206.
80) 양창삼, Ibid., 187.
81) 서서평선교사 서거 소식에, 서선교사의 한국인을 위한 헌신의 생애는 세상 사 람들도 감동이 되어, 동아일보는 “위대한 인류애, 서서평씨 영전에”라는 사설 (1934년)로 답하였다. “서평양의 일생은--동족의 비참한 생활에는 눈을 감고 오 직 개인향락주의로 매진하고 있는 수많은 조선 신여성들의 양심에 과연 어떠한 자극을 주고 있을까? 서서평씨의 일생은 조선의 신여성 대중 앞에 거화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국의 여성으로써도 이러하거든 조선의 여성으로써 그 뒤를 따 를 자 그 몇몇 이뇨!” 양국주, Ibid., 239.
(2) 교육사역; 여성인권 운동, 성경과 신학교육
광주 이일학교는 한국최초의 여자신학교이다. 서서평선교사는 한일장 신대학교의 전신인 광주 이일성경학교를 설립한 설립자이다. 동시에 서 서평선교사는 전주 한예정성경학교 설립과도 연관된다. 그가 군산 구암 병원에 근무할 때 전주에 단기성경학교를 개설하여 1년에 1개월부터 2,3개월 과정으로 성경공부를 시키다가 점차 6개월 코스로 늘려간 것이 한예정성경학교로 발전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82) 결국 이 두 학교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로 합병되어 83) 오늘의 ‘한일장신대학교’(Hanil University an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로 발전하였다. 3.1 만세운동에 가담하면서 서울에서 신변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서 선교사는 광주로 내려가 제중원 간호사로 일하면서, 전도부인(Bible Women) 양성학교를 1922년 6월 22일에 광주 양림동에 설립하였다. 부 모의 반대로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여인들, 가난하여 학교에 갈수 없는 여인들, 결혼하였으나 아이가 없어 소박당한 여인들 등 불우하고 기회를 놓친 다양한 계층의 여인들을 84) 대상으로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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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양창삼, Ibid., 137.
83) “1961년 4월 4일; 전주 한예정성경학교와 광주 이일성경학교가 병합하여 개교예 배 드림. 4월 19일; 양교 합동 축하예배 드림”, 이순례, 한일신학대학 70년사 (전북 완주: 전주 한일신학대학 출판부, 1997), 403.
84) 서서평 선교사는, 링컨의 말(Lincoln said that the Lord must love the common people because He made so many of them, and certainly there are plenty of them.)을 인용하면서, 수많은 한국여성들(가나한 가정이나 부유한 가정 출신을 막론하고)을 어떻게 다른 기독교국가 생활수준과 한국여성들 생활수준 사이의 틈을 메꾸도록 다리를 놓아줌으로, 청결하고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기독교교육이 당면한 문제라고 보았다. Miss Elsie J. Shepping, “Korean High School Girls”, The Korean Mission Field , (Seoul, Christian Literature Society of Korea, March 1928), 54.
이 학교는 서선교사의 좁은 안방에서 시작했다. 학생들은 세례교인으 로서 목사나 지역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입학했다. 학생들을 모집할 땐 자신도 멀리는 평양까지, 교통이 불편한 고흥지방까지 조랑말을 타고 갔다. 86) 여러 절차를 거친 후 1923년 9월 4일 남장로교선교부는 광주 와 전주에 ‘여성 성경학교’를 열도록 하였다. 초대 교장으로 광주에는 서서평선교사가, 전주에는 최의덕(Tate) 선교사가 임명되었다. 서서평선 교사는 광주여성성경학교를 발전시켜 1926년에 후원자 니일(Lois Neel) 양의 이름을 따라 광주이일학교(光州李一學校, the Neel Bible School) 라고 이름 지었다. 전주에도 후원자 해밀턴(Mr. & Mrs. Thedres Hamilton) 부부의 이름을 따라 한예정성경학교가 세워졌다. 87)
이일학교는 여성들의 문맹퇴치와 계몽을 위하여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3년제 사립학교였다. 이일학교에는 초등학교교과과정으로 비기 독교인의 입학도 허락되는 보통과와, 기독교복음전도자 양성을 위한 성 경과를 두었다. 서서평 교장은 병을 미리 예방해야한다는 차원에서 건 강 및 가정위생, 아이와 어머니의 영양 및 교육론, 상처치유법, 세균 전 염병 예방 등 의학 및 간호에 관한 과목도 가르쳤다. 성경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여성들을 계몽하고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일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예외 없이 기 독교인이 되었다. 서 교장은 학교에 들어올 때 예수를 믿지 않던 학생 들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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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양창삼, Ibid., 137-138.
86) Ibid., 138.
87) Ibid., 139-140. 88) Ibid., 140-141.
서선교사는 이일학교를 설립하고 1934년 서거하기까지 교장으로 활 동하면서, 대여섯 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1922년에서 1935년까지 이일 학교의 졸업생 수는 265명이었다. 1932년 당시 성경과에서 36명, 보통 과에서 37명이 졸업했고, 1932년에는 93명이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1931년에서 1933년까지 이일학교 한국인 교사로 봉직한 조아라 선생에 따르면, 그때 보통과는 70-80명의 학생들이 공부했고, 성경과는 30여명 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15세에서 40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입학했다. 배유지부인 엘리자베스, 페이슬리(J.I.Paisley)부인, 리바이(J.K.Levie) 부인, 리(Lee)양 등이 여선생님으로 활동했고, 김윤식, 박해라, 엄현숙, 김용순, 조아라, 주형옥, 장은순 등이 한국인 교사로 활동했다. 89) 서 교장은 하루에 6시간씩 가르치며, 일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렸다. 90)
한일은 본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설립하셨다. 하나님 자신의 복음사역 을 위해서 설립하신 것이다. 한국에 설립한 것은 한국여성들을 위해서 그리고 한국민의 복음화를 위해서 설립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 랑이 한국에 그리고 한국여성들에게 베풀어진 증거이다. 하나님의 무조 건적인 복음적 사랑이 우리 민족 특히 불우한 처지에 있었던 여성들에 게 베풀어진 대사역이시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서 당시의 처지는 물론이고 오늘날 까지도 불우한 사람들, 그리고 불우한 여성들 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특히 한국에 이 사랑이 부어진 것 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의 사 역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 91)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사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다.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 희생을 조건으로 한 사랑이 무조건적으로 한국에 그리고 한국여성들에게 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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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Ibid., 141-142.
90) Ibid., 142.
91) 강택현, Ibid., 358-359.
이 십자가의 희생정신을 부여받은 서서평선교사는 자기의 일신을 한국과 한국의 여성들을 위해 서 모조리 제물로 바쳤다. 그래서 설립된 학교가 광주의 이일이요 전주 의 한예정이며 오늘의 한일장신대학교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학의 뿌리에는 십자가의 정신 서서평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제물 된 헌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대학이 설립될 수도 없고 운영될 수 도 없었다. 92)
“오늘의 한일장신대학이 신리 새 캠퍼스에 우뚝 서 있음은 우연이 아 니다. 한일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대 학을 설립한 분이 서서평선교사라면, 폐교위기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 로 한일을 소생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기우린 분이 고인애(Dr. Cora Wayland; 1920-2007)선교사이다.” 93)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일을 중흥시켜 오늘의 한일장신대학교가 되도록 헌신한 분은 강택현 전 학장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강택현 학장은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한일의 가족 들에게 부탁하고 있다. “오직 한일은 하나님의 사랑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 - 서서평선교사의 헌신 - 고인애의 희생정신이 그 건물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있다. 이 정신이 한일의 전통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떠나면 한일은 망한다. 의미가 없어진다. 이 정신을 따르면 한일은 만 세에 빛날 것이다. 한일의 사람들은 총장 이하 모든 교수들, 모든 직원 들, 모든 재학생들, 그리고 모든 졸업생들 할 것 없이 이 전통을 굳게 간직하여야 한다. 특히 졸업생 목사들 전도사들이 그리고 교회의 사역 자들이 이 전통을 굳게굳게 지켜야한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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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Ibid., 359.
93) Ibid., 359.
서서평선교사는 십자가 복음의 기초위에 한일장신대학교 95) 의 기초를 닦았으니, 한일에서 배운 모든 학생들은 전공을 초월하여 선진들이 세운 이 복음의 터 위에 서서 각자 맡은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3) 간호사역과 국제간호사협회를 통한 대한독립운동
서서평선교사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무력과 권모술수로 무장한 일 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신음하던 한국민족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라 회복운동을 직접간접으로 도운 우리나라와 민족의 선한 사마리아사람이 었다. 그는 직접 독립운동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조선간호부회를 조직 하여 일본과 동등하게 국제간호협의회(ICN))에 등록시킴으로 조선의 독 립을 지원하고자하였다.
실제로 그는 1919년 3.1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서선교사는 1919년 까지 세브란스에서 간호사 교수로 일하고 있을 때, 1919년 3.1 독립운 동을 하다가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해주면서 조선인들의 아픔에 동 참하게 되었다. 96) 또한 서선교사는 삼일독립운동으로 형무소에 있던 최 흥종목사 등 독립운동가들을 옥바라지 했다. 형무소에 있는 믿음의 가 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에게 기미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는 트집을 잡아 서울에 거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97) 이로 인하여 서선교사는 건강상의 이유와 함께 다시 광주로 선교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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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Ibid., 359.
95) 현재 한일장신대학교는 대학(신학부, 사회복지학부, 음악학부, 인문학부, 상담 학부), 신학대학원(M. Div 과정), 아태국제신학대학원, 기독교사회복지대학원, NGO정책대학원, 상담심리대학원(Ph. D, Th. M, 과정)을 둔 신앙과 학문의 명문 종합대학으로 발전하고 있다.
96) 양창삼, Ibid., 125. 97) Ibid., 125-126.
서서평선교사의 의료선교사역은 병든 자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료 하기위한 것이 첫째 목적인 것은 사실이다.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장 김모임은 서서평 초대 대한간호협회회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서서평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간호를 바탕으로 선교에 힘을 쓰셨으며 40여개의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 육아사업, 부인조 력회와 금주동맹 조직과 운동 그리고 윤락여성과 빈민 구제사업을 하 셨으며 우리나라 개화기 가난과 병마에 허덕이는 특히 여성들을 해방 시키기 위하여 여성이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그리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개화시키고 여권신장에 기여한 분으로 당시 누구도 이분을 능 가할 분이 없었다. 98)
그러기에 서서평선교야말로 “한국여성운동의 개척자이며, 사랑의 사도이신 ‘나이팅게일’의 참 후예” 99) 라고 극찬한다.
그러나 서서평선교사가 조선간호협회를 조직하고 일제치하에서 조선 간호부회를 국제간호사협의회에 정회원으로 등록을 추진 한 것은, 조선 을 침략국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 세우고자하는 하나님의 공의실현의 차 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모임은 이렇게 말한다. “이분(서서평 초대간호협회 회장)을 통해 1923년 조선간호부회가 조직된 것은 전문직 업인 단체로서의 본연의 기능보다는, 침략자 일본에게 강점당한 조국의 운명을 국제간호사협의회에 가입함으로써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함이 었다.” 100) 조선간호부회가 ICN에 정회원으로 가입하면, 조선의 국위가 선양될 뿐만 아니라 숙원인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01) 더구나 “한국인이 아닌 서서평님이 회장으로서 이 목적을 달성하기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02) 는 사실에 더욱 감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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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김모임, Ibid., 백춘성, Ibid., 14-5.
99) Ibid., 15.
100) Ibid., 14.
서서평선교사는 국제간호사협의회(ICN)에 한국간호협회를 가입시킬 목적으로 1923년 자신의 발의로 조선간호부회 103) 를 조직하여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런지 3년 만인 1926년 ICN으로부터 한국간호협회와 다 른 간호협회는 1929년에 캐나다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가입케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104) 조선간호부회는 1929년 7월 8일부터 13일까지 5일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ICN총회에 대표 3인(서서평, 이효경, 이금 전)을 파견하게 되었다. 그때는 일본의 방해로 정회원 등록이 무산되었 으나, 서서평 회장의 끈질긴 노력 끝에 ICN에 우선 준회원으로 입회하 게 된다. 105)
서서평 대한간호협회 초대회장은 영문으로 된 간호학 교과서들 (“ Practical Nursing ”, “ Historical Outlines Showing the Relation of Nursing History ”, “ Short History of Nursing ” 등) 106) 을 한국어로 번역 하여 세브란스를 비롯하여 선교부 소속 모든 병원과 학교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107) 저서로는 <간호학 교과서>, <실용간호학전서>, <간호요강>, <간이 위생법> 등이 있으며, 여러 편의 기고논문들이 있다.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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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양국주, Ibid., 79.
102) 김모임, Ibid., 백춘성, Ibid., 14.
103) “1923년에 창립된 조선간호부회는 1945년까지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1946 년에 조간호협회로 명칭을 바꾸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따라 1948년 8월 명칭을 대한간호협회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국주, Ibid., 80.
104) 백춘성, Ibid., 35-36.
105) Ibid., 39-40. 대한간호협회는 1949년 6월에 서서평선교사가 소원했던 ICN의 정 회원이 되었고, 2012년 현재 30만 명의 간호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양국주, Ibid., 6, 79.
106)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8. 107) 백춘성, Ibid., 41.
간호사로서 서서평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기에 힘썼다. 1933년 광주 제중병원에 불이 나서 본관병동에 불 이 붙었을 때, 의사, 간호사, 직원들은 각자 자기 소지품 끌어내기에 바 빠서 입원환자 구출은 뒷전이었다. 환자친지들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 을 뿐이었다. 그때 서서평간호사만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말리는데도 뿌리치고, 화염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를 구출해 냈다. 그때 서 선교사는 다음해 1934년 6월 26일 병사하기전의 나이 53세 때였다. 화 재 진압 후 구출된 환자와 가족들과 목격자들의 칭송에 서선교사는, 형 제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는 것 외에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일 뿐이며, 특히 자기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답하 였다. 109)
이러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서서평선교사의 마음과 행동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서선교사는 의료선교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섬김의 삶을 살았으며, 한국민족이 나라를 잃고 교활한 강대국들의 호위 속에서 일본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을 때, 조선 간호부회를 일본을 제치고 국제간호사협의회에 정회원으로 등록시켜서 한국의 독립을 앞당기고자, 사랑의 사도로서 동분서주 했던 것이다. 요약하면 서서평선교사의 사역은 내적인 성령의 열매와 외적인 성령 의 열매가 조화된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외적인 열매가 풍성하 더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경우 즉 내적인 인격적 열매가 결여된 경우,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도무지 얼지 못하니 불법 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고 선언하셨다. 그러나 서선교사는 외적인 열매(사회봉사, 사회정의, 전도의 열매 등)는 물론, 내적인 열매(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등; 벧후 1:5-7)를 맺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그리스 도와 연합) 산 믿음의 경주에 죽도록 충성을 다한 것이다(빌 3:13-14, 계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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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양국주, Ibid., 272-273.
109) 백춘성, Ibid., 53.
Ⅲ . 서서평선교사가 21 세기 교회와 사회에 주는 메시지
지금 21세기의 교회와 사회 현실은 착륙할 목적지도 모르고 음속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종사에 해당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 정치인들이 그 목적지도 모르고 조종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앉아있는 승객들(학생들, 교인들, 국민들)의 생명은 어 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 일제의 탄압 속에서 가난과 무지로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한국민족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특히 여성들을 일깨운 서서평선교사(복음전도자, 신학교수 겸 학장, 간호사 겸 간호학교수, 독립운동 애국자)의 청교도적인 신앙과 신학과 삶은, 우리 에게 나아갈 방향을 바르게 제시하고 있다. 먼저 목표를 상실한 21세기 신학과 교회와 사회의 현실을 간단하게 진단하여 보고, 21세기 신학계 와 교회와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서서평선교사의 청교도적 산 믿음의 삶에서 찾고자한다.
1. 목표를 상실한 21세기 신학과 교회와 사회의 현실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나아갈 때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여 신자들이 바른 신앙을 소유하고 말씀에 합당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인위적인 신학의 늪으로 빠질 때는,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지 못함으로 신자들이 바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 하여, 110) 세상도 혼돈의 역사를 걸어왔다. 111)
1) 신학계에 침투한 인본주의사조
초대교회의 성경관 내지는 구원관이, 중세 암흑기를 제외하고, 종교 개혁시대까지는 큰 변화 없이 계승되어왔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주님 의 증언을 따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확무오함을 가르쳤다. 성경을 가감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한 성경관과 성경이해에서 나 온 그리스도관은 당연히 오직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유일한 인 류의 중보자이심을 확신하였다. 초대교회는 성경말씀대로 예수 그리스 도를 머리로 하여 성도들의 공동체를 이루는 진정한 교회의 생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랑이 넘쳤고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게 된 것이다. 중세 암흑기를 지나, 종교개혁시대에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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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유태주, “신학과 신앙 및 삶의 어제와 오늘”, 강성열 엮음, 은혜로운 말씀 생명과 평의화의 길 , (서울: 한들출판사, 2011), 290-291.
111) “서양신학계에서는 정치신학, 해방신학 등 각종 사이비 사회과학이론을 창안하 여 인류문화의 진로를 혼미케 하여 왔습니다. 1971년 WCC의 Bangkok의 “Salvation Today” Conference나 1895년 Geneva의 “Church and Society” 대회가 전혀 역사의 흐름을 착각한 세계대회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리하여 모택동의 중공을 인류의 희망으로 찬양했던 것이 얼마나 역사를 잘못 본 것이었습니까? 그러므로 이 분야 즉 세상의 것(earthly things, Institution . I. 17)을 다루는 일은 과학의 각 분야에 맡기고, 신학이 사이비 사회과학을 만들이 않도록 해야 할 줄 압니다. 동시에 과학의 각 분야가 사이비철학에 빠져서 반 신앙적 입장을 제멋대로 취함도 허락해서는 안 되는 줄 압니다.”, 한철하, 21세기 인류의 살 길 , (경기 양평: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출판부. 2004), 85.
그러나 오늘의 시대사조는 하나님의 자리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차지하려는 오만의 극치인 소위 인본주의(humanism)시대이다. 그 외형 은 모더니즘(modernism)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두 형식의 옷을 입었으나, 그 내용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 상으로 양자가 본질적으로 같다(딤후 3:1-5). 인본주의의 뿌리는 에덴의 타락(창3:5)에서 시작되었고, 큰 거짓선지자 칸트(Kant, 1724~1804)를 선두로 현대인본주의신학사조는 교회에 침투하여 신학의 주류(main stream)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인본주의는 자유주의, 신정통 주의, 신자유주의, 종교다원주의 등 여러 이름으로 교회의 신학에 자리 잡고 있다. 113)
2) 인본주의에 물든 교회에 따른 세계위기
21세기에 접어든 세계는 전반적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우리는 평화상실의 근본 원인을 세상의 소금과 빛을 감당하지 못한 교회의 신 앙과 신학의 변질에서 찾는다. 신학의 변질은 현대 진보주의 신학과 현 대 보수주의신학을 망라하여 구원신학의 상실과 혼란에서 야기되었다고 본다. 문제는 한국교회도 이러한 신학의 변질에 따른 신학적인 위기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복음을 부수적 가치관으로 대체시킨 진보주의와, 분산된 신학방법론상의 문제와 함께 신학의 내용 인 믿음에 있어서 산 믿음을 제시하지 못하는 보수주의의 문제이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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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유태주, Ibid. 290-291.
113) Ibid., 290-291.
114) Ibid., 290-291.
사도들과 개혁자들이 가르쳐준 바른 성경관을 버리고, 성경관의 변질 에서 시작된 인본주의사조는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한국교회의 신앙과 삶을 병들게 만들고 있다. 치료해야할 교회의 병리현상들 중에 는 최근 성경번역의 심각한 오류문제와 부정부패로 얼룩진 각 교단의 선거풍토 및 교회사역자들의 자질과 도덕성 확립문제 등이라 할 수 있다. 115)
3) 반기독교 사회세력의 등장
이처럼 신학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메시지를 거부하고 인 본주의사조가 신학계와 교계를 휩쓸고 있는 틈을 타서, 사회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송두리째 잘라버리려는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 중 하 나가 이른바 ‘차별금지법안’이라는 망령된 법안이 일부 몰지각한 국회의 원들에 의해서 국회에 제출된바 있다. 116) 이 법안은 각종 차별을 금지 한다는 취지에서는 좋아 보이나, 독소조항들이 숨어있다. 동성애와 동 성혼을 정당화시키는 비도덕적인 규정은 물론, 특히 종교간 차별금지를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을 선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헌 법이 보장하는 신앙야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악법인 것이 다. 117) 이러한 문제제기는, 대한민국 해방과 전쟁 등 민족수난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져 온 나라임을 배은망덕하게도 망각한 반 기독교세력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며, 그들의 주장들 중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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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Ibid., 290-291.
116) 이른바 3개의 ‘차별금지법안’ 중에서 두 법안은 반대여론에 못 이겨 일단 제안자들이 취소하였으나, 다른 하나는 그대로 입법절차를 밝고 있다.
117) “법안들이 담고 있는 종교적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은 종교 간의 변증과 건전 한 비판까지 막아서 결과적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도리어 불필요한 종교간의 분쟁을 유발할 요소가 될 것입 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성명서(제1항), 2013년 4월 8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손달익 목사.
그러나 이러한 혼돈을 극복하기위하여 우리가 들어야할 메시지가 있 다. 지난 20세기 초반 우리 한국민족이 나라와 말과 모든 것을 빼앗기 고, 나아갈 방향을 잃고 해매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의 복 음을 들고 한국에 와서 우리민족의 영혼을 구출하기위해 자신의 모든 지식과 재물과 젊음과 생명을 바쳐 사명을 감당하다 간 서서평선교사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2. 21세기 신학계와 교회와 사회에 주는‘산 믿음’의 메시지
이렇게 신학과 교계와 사회가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져서, 신학은 교 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 을 상실하여가고 있으며, 사회는 교회에 적대행위를 하고 있는 이때에, 한국 신학계와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고 생명 까지 희생하고 간 서서평선교사가 21세기 신학계와 교회와 사회에 주 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일장신대학교의 설립자로서 교수와 직 원과 학생들과 동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학교는 그 설립자 의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 그 설립정신은 당연히 그 학교의 정통적 정 신이 되어야하고, 그 설립정신을 이어받음으로 학교의 역사는 더욱 빛 나고 그 존속이 의미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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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강택현, Ibid., 100.
1)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 회복
서서평 선교사는 조랑말을 타고 한국의 시골과 도시와 섬을 방방곡 곡 누비며 복음을 전한 일, 여전도회 조직, 확장주일학교운동, 그리고 한국간호협회창설과 국제간호협의회(ICN) 준회원 등록, 이일성경학교를 세운일, 가난한 여성들 구제와 인권회복운동 등 한국인을 위하여 아주 연약한 육체를 이끌고도 생명을 다하는 초인적인 일을 하였다. 119) 그런 데 “그녀의 이 모든 열정은 영혼구원과 생명을 살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120)
21세기 신학은 이미 영혼구원의 진리를 폐기시키고, 학자들의 주관적 인 학설논쟁을 위한 사소한 담론의 유희들로 가득 채우고 있다. 교회 역시, 목회자들의 자기 영달을 성취하기위한 수단으로 동료목회자들을 모아 정치집단화 시키고, 순진한 양들을 이용하는 등, 사이비 정치꾼들 의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정치인들은 하 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전파를 막으려, 소위 차별금지법이라는 반사회윤리적인 입법을 시도하는 등 국민의 공의와 행복보다는 소속당 파와 입신출세를 위한 정치놀음에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우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서서평선교사처 럼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에 생명을 건 121)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 다. 서선교사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신뢰하고 가르쳤으며,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유일성을 부인하는 이른바 현대주의 신학사조를 단호히 배격하였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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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이일학교, 여전도회, 주일학교 사역, 조선간호부회 사역을 하면서 아주 연약한 육체를 지탱해야하는 어려움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후원자 여러분들과의 지 속적인 연락을 하지 못 하였습니다 만--”, “엘리제 J. 쉐핑, 이일성경학교 교장, 1931년 6월 3일, 아시아, 조선, 광주.”, 양국주, Ibid., 61.
120)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9.
121)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언제나 주의 것입니다”, 양국주, Ibid., 156.
따라서 서선교사가 그토록 많은 일을 한 목적은 단순하다.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서선교사의 청교도적인 산 믿음의 신앙과 신학을 물려받은 우리는, 오 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말씀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마태 5:18, 딤후 3:16)와 성경말씀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유일성(딤전 2:5)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이다.
2) 산 믿음의 신학 추구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고, 그 믿음은 산 믿음이어 야 한다는,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신학은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구원의 원리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 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 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 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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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학식이 넉넉하지 못한 그녀(이일학교 학생으로, 섬에서 70여명의 주일학생을 지도하고 있는)가 사람들을 이끄는 것과, 학식 있는 미국인 현대주의자를 비교 할 때, 저도 ‘하늘에 앉으신 이가 웃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신뢰 하는 ‘모든 자’가 행복합니다!” “엘리제 J. 쉐핑, 이일성경학교 교장, 1931년 6월 3일, 아시아, 조선, 광주.”, Ibid., 59-60.
그런데 이러한 산 믿음의 구원원리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시는 칭의와 성화 즉 이중은혜로서, 오직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즉 신자의 아무리 큰 선행이라도 하나님 보시기 에 추하고 더러울 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보 시고, 산 믿음의 증거로 삼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상도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산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며 가르친 분이 바로 서서평선교사 이다. 서선교사는 산 믿음의 증거인 성화의 열매를 가난한자 구제와 환 자 치료, 그리고 여전도회를 통하여 교회를 주님 안에서 섬김의 공동체 로 성장시켰다. 비록 우리가 서선교사처럼 다양한 일은 못한다 하더라 도, 각자 주어진 일터와 분야에서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3) 섬김으로 사명 감당
서서평선교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어 섬기며 가르치던 신학자요, 교회 여전도회를 통하여 교회를 섬기던 목회자며,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부터 세계적인 지성인들에 이르기까지 간호하고 섬김으 로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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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존 니스벳(John Samuel Niesbet, 1907-1940; 전주와 목포에서 사역)선교사는 쉐핑의 장례식에 참석하던 날, 거실에 놓인 쉐핑의 좌우명을 보고나서 충격과 감회를 친구 그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장례를 위해서 수의가 입혀진 미스 쉐핑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거실로 들어가자, 벽에 붙여진 좌우명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 Ibid., 231-232.
서서평선교사가 21세기 한국의 신학자, 목회자, 사회 지도자들에게 선배로서 주는 당부의 메시지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 이다. 123) 그런데 서선교사는 이 모든 섬김의 지도력을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 이니라”(마태 20:28). 그러므로 서선교사가 조랑말을 타고 한국의 시골과 도시 섬을 방방곡곡 누 비며 복음을 전한 것과, 여전도회를 조직하며, 확장주일학교운동, 그리고 한국간호부회 창설과 국제간호협의회(ICN) 정회원등록 추진, 이일성 경학교 설립, 가난한 여성들 구제 등 한국인을 위하여 생명을 다하는 섬김으로 일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그 섬김의 목표는 죽어가는 영혼 구원에 있었다. “그녀의 이 모든 열정은 영혼구원과 생명을 살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124) 서선 교사는 영혼구원을 위한 이 섬김의 사명 감당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 게 여겼다. 그리고 영혼구원의 최종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유언이 “천국에서 만납시다!(Let’s meet in heaven!)”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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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Mrs. M. B. Knox and Mrs. E. E. Talmage, Ibid., 219.
맺음말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따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으며, 그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함을 전파하였다. 청교도들의 신학 과 신앙의 요약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산 믿음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단순히 교리적인 고백문서가 아 니라,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당시 부패 한 교회와 정치 현실 속에서 참된 믿음을 고백한 ‘산 믿음의 신학’의 결정체이다. 즉 개혁자 칼빈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청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고백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의롭다함과 거룩함을 입어 구원에 이르는 산 믿음의 신학을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진면목 은, 산 믿음의 신학적 교리를 삶으로까지 연결시키는 데 있다. 특히 그 리스도인이 개인과 가정에서의 경건생활과 교회개혁과 나아가 사회와 국가개혁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서서평선교사는 그가 다니던 장로교회로부터 장로교 헌법인 웨스트민 스터신앙고백을 배우고, 뉴욕 성서사범학교에서 청교도적 전통의 학자 인 화이트박사로부터 성경교육과 함께 청교도신앙과 신학을 받아들였음 이 분명하다. 서서평선교사를 예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생명보다 귀 하게 여겨 선교사로 헌신하게 한 것은, 성경과 사도들이 제시하는 신학 과 신앙과 구원관을 17세기에 재현한 청교도적 산 믿음의 신학과 신앙 때문이었다고 결론짓게 된다.
청교도적 ‘산 믿음’의 복음전파자로서 서서평선교사는 성경말씀의 권 위를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전파와 더불어, 내적이며 개인적인 절제와 경건훈련, 한일장신대학교의 전신인 이일 성경학교 설립과 여전도회조직과 활동극빈자 구제 등을 통한 교회봉사, 그리고 대한간호협회를 국제간호협의회(ICN)에 등록시키는 운동을 통한 독립운동 등 사회봉사적인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산 믿음 의 복음전파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지금 21세기의 교회와 사회 현실은 목적지를 모르고 날아가는 비행 기와 같은 혼돈의 시대이다. 이 혼돈을 극복하기위하여 우리가 서서평 선교사로부터 들어야할 메시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신뢰(마태 5:18, 딤후 3:16)와 성경말씀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 도 복음의 유일성(딤전 2:5)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이다. 둘째는 산 믿음 을 회복하라는 메시지이다. 그는 산 믿음의 증거인 성화의 열매를 가난 한자 구제와 환자 치료, 그리고 여전도회를 통하여 교회를 주님 안에서 섬김의 공동체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는 신학자, 목회자, 사회지 도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로서 섬김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그 섬김의 목 표는 죽어가는 영혼 구원에 있다.
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답답하여보여도, 우리는 신앙의 스승이 요 선배인 서서평선교사로부터 새 소망의 빛줄기를 본다. 서선교사는 자기 자신의 절망적 현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소망의 복음으로 극복하였다. 그리고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던 한국에 와서 그리스 도의 생명의 복음을 몸소 산 믿음으로 실천하며 보여주었다. 그는 승리 의 길을 갔다. 서선교사의 마지막 말 “천국에서 만납시다!”는 그분이 주 님과 동행한 승리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한다.
이제 우리도, 서서평선교사께서 자신이 한 알의 밀알처럼 희생함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섬기는 삶으로 우리에게 들려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각자에게 주어진 전공영역과 달란트를 따라 담대하게 생명을 내걸고 한국과 아시아와 온 세계에 나아가 선포해야 하지 않겠는가?
SOLI DEO GLORIA!
참고문헌
<1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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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as a Missionary of the Living Faith
Yu Tae-Ju (Hanil University &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 Systematic Theology)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1880-1934) overcame the difficulties in her life through the love of Jesus Christ and came to Korea as a medical missionary in 1912. At that time there were many needs in Korea including inadequate public health. Through her medical work she demonstrated the living faith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until she completed her service in 1934.
Through her life and work she has given an important message to those of us living in the 21st. century with all of its problems and challenges. First, we need to restore our faith that Jesus Christ is the only one way to God. Second, her example of living faith and Christian mission work can serve as our guide today. Third, her powerful message "Not success but service!" is teaching us who are theological scholars, church ministers, and social political leaders. In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we can find an example of living faith that is relevant for our times.
Key Words: Puritan,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living faith, Miss Elisabeth Johanna Shepping, Jesus Christ is the only one way to God,“Not success but service”, the saving of sou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