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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것이 저 물과 같아 밤낮을 쉬지 않는 구나!” 2천여 년 전 공자는 냇가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흘러 2010년, 중국은 ‘공자 열풍’ 속에 있다. 세계 각지에 ‘공자학원’이 설치되고 있고,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영화 ‘공자’도 개봉했다. ‘공자’ 일색에 중국이 떠들썩하다. 하지만 정작 유구한 유교문화는 없고, 단지 정치적인 ‘조화’를 꿈꾸는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야욕만 엿보일 뿐이다. 만약 공자의 영혼이 하늘에 있다면, 인간 세상의 ‘공자 열풍’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 “공구(孔狗)라고 할 땐 언제고…” 공자탄생 기념행사를 구경하러 온 관광객 을 바라보는 공자상이 서글퍼 보인다. ⓒ China Photos/Getty Images
40년 전 ‘공자 타도 열풍’
40년 전 중국에서 발생한 ‘공자열풍’은 한차례 재난이었다. 중국인들에게 2천여 년 동안 가장 존경받는 성현이었던 공자는 “복고광(復古狂), 정치 사기꾼, 백성을 가장 기만하고 억압한 자”로 불렸다. 1966년 11월 베이징 사범대학의 조반파 두목 탄허우란(譚厚蘭)은 중앙문화혁명 소조의 명의로 200여 명을 이끌고 산둥성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점(孔家店)’을 찾아가 파괴했다. 그는 현지 조반파와 연합해 철저하게 공자점을 파괴하는 ‘혁명조반연락소’를 만들고 공자점을 철저히 파괴하는 만인대회를 소집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라는 비석을 부쉈다.
이들은 취푸에서 29일 동안 2700여 권의 고서와 900여 점의 각종 서화(書畵)를 불태웠는데, 이중에는 국가 1급 보호문물 70여 건 및 1700여 권의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파괴한 문물 중에는 공자의 묘비를 포함한 1천여 개의 역대 비석 외에도 공자묘(孔廟)와 공자(孔子)의 직계 장자와 장손이 사는 저택 공부(孔府), 공림(孔林), 서국(書國) 옛터를 파괴했다. 또, 천보다(陳伯達)의 비준을 거쳐 공자묘를 갈아엎고, 공자묘를 지키던 76대 후손 쿵링이(孔令貽)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비판했다. 당시 유가 경전만을 연구하던 저우위퉁(周予同) 교수는 끌려나와 자신의 손으로 공자의 무덤을 파헤쳐야 했다. 현지 각급 지도자, 간부 및 1962년 ‘공자토론회’에 참가했던 가오짠페이(高贊非) 등의 학자들이 공자상을 들고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공산당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직접적인 지시 하에 이루어졌다. 이는 당시 공산당의 정치투쟁과 정치운동의 필요에 의해 취해진 조치였다.
▲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이 공자상을 파괴하고 있다. 이는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문화혁명소조의 지시였다.
정치 선전 구호된 ‘공자’
최근 중공 관영 CCTV가 강력하게 지원하는 ‘백가강단(百家講壇)’이란 프로그램에서 위단(于丹)이 ‘논어’ 열조를 일으켜 돈과 명예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자신이 공자를 연구하는 국학대사(國學大師)임을 자처하는 학자들이 대학 강단과 TV방송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는 정치적인 형세와 경제적인 필요에 영합한 일련의 일들이다.
물론 현재 파괴됐던 공자묘와 공자의 위패는 회복됐다. 공자에게 올리는 향도 왕성하게 타오르고 있고, 중공의 각급 고위관리들도 사람들을 따라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같은 행동도 장쩌민의 ‘삼개대표론’이나 후진타오가 주장하는 ‘과학적 발전관의 지도방침’을 따라 착실히 추진된 일종의 정치 임무에 불과하다.
공자는 각종 영화와 TV 드라마까지 등장하게 됐다. 역설적인 것은 공자를 비판하고 타도했던 중공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공자를 영화로 제작, ‘대하 서사시’로 떠받들고 있다는 것이다.
1월 22일 영화 ‘공자’가 각지에서 상영되기 전 관방에서는 대대적인 홍보에 나서는 한편, 행정명령을 동원해 블록버스터 ‘아바타’ 2D상영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각종 반응을 종합해보면 공자의 흥행은 썩 낙관적이지 않다. 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관중들이 이미 이 영화가 중공이 이용하는 도구임을 직접 지적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산둥성 정부에서는 공자를 널리 알리는 것을 정치임무로 삼아 미리 각 지역 기관과 초중고교 및 기업 공회(公會)에 연락해 ‘조직적인 관람’을 명령했다. 이 때문에 산둥성의 ‘공자’ 좌석점유율은 67%에 도달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공자’의 흥행은 극히 미미하다. 소식통에 따르면 개봉 첫날 상하이는 관람객이 겨우 수백 명에 그쳤고, 쓰촨성의 한 극장에서는 관람객이 겨우 3명에 불과했다.
포성 없는 전쟁 ‘공자학원’
중공 관방 통계에 따르면, 2009년 10월까지 이미 87개 국가에 282개의 공자학원과 272개의 공자학당이 설립됐다. 중공 관방매체 런민왕은 “해외 공자학원에서 모두 베이징 공자학원 본부에서 제공하는 수업방식, 교과과정 등을 주교재로 사용해 통일적인 교육과정을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중공의 감시와 통제를 받는 공자학원의 교재가 해외 각지 중국어 학교에서 광범위하게 채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중국어 교사로 있는 야오저(堯哲)씨에 따르면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도 공자학원의 교재를 직접 사용하고 있다. 중공이 중국어 학교라는 명분으로 사용하는 교재의 내용에 ‘공산당을 사랑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전제주의 문화와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간체자 교재를 가르치는 거의 모든 중국어 학교에서 이런 교재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교재가 배우는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에 ‘소프트 냉전’이자 ‘포성 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해외 공자학원은 중공의 해외정보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2년 전 미국 국토안전국 전임 국장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스파이로 활동하는 중국어 교사를 대량 검거해야한다”고 할 정도였다.
‘공자’는 슬프다
지난 2500여 년 동안 중국은 유교문화가 근본이었다.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의 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 이래 한 고조 유방은 유가의 예절을 채용해 조정의 예의범절을 만들었다. 한 무제는 제자백가 중에서 오직 유가만을 존중했고, 당태종은 공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증했다. 청나라 강희제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직접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현판을 써서 공자묘에 걸게 했다.
이처럼 중국 역대 왕조를 거치며 공자는 늘 추서되거나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으며 심지어 몽골족이 지배했던 원나라 때도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대됐다. 공자의 영향은 일찍이 국경을 넘어 일본, 한국, 월남 등 아시아 국가에 유가 사상의 깊은 영향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유명한 계몽철학가 볼테르조차 공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하지만 중공 정권은 공자를 반대하며 일어섰다. 일찍이 중국 공산당이 건립되기 전인 1919년, 천두슈(陳獨秀: 나중에 중공 최초의 총서기가 됨)는 잡지 신청년에 ‘민주를 옹호한다면 공자교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을 발표했다. 문화혁명이 발발한 후 중공은 ‘공자점 타도’ 운동을 일으켰다. 나중에는 마오쩌둥이 직접 나서 ‘공자비판운동’을 일으켰다.
일찍이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을 강조했던 공자는 중공에 의해 “일체 낡은 이론의 사표이자 악 세력의 영혼”으로 매도됐다. 또, “사람이 생긴 이래 실로 공자만큼 죄악이 크고 위선적이며 대다수 사람들의 공적(公敵)이 된 인물을 없었다. 앞으로는 인류가 모두 일어나 공격하게 될 것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상가들의 언행 중에서 공구(孔狗: 공자에 ‘개 구’자를 썼다)가 가장 황당무계하다”고 비판당했다. 리밍(黎鳴)이란 학자는 “중국인들은 왜 반드시 철저히 공자를 비판해야 하는가?”, “공자는 중국문화를 사악으로 이끈 제일의 마귀이다”는 일련의 문장을 발표해 공자를 비판했다.
하지만 중공은 ‘조화사회’가 필요할 때가 되자 다시 공자에 대한 제사활동을 거행해 사회 조화를 실현하려 한다. 대외적으로는 공자학원을 설립해 공자의 이름을 이용하는 동시에 중국어를 교육하는 방식으로 중공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있다.
한 누리꾼은 “중공이 진심으로 공자를 신앙하는 것이 아니며 중공 정치과목에서 말한 것처럼 공자와 맹자는 모두 통치계급이 노동인민을 우롱하기 위해 이용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유행하는 중국의 ‘공자열풍’은 단지 중공이 공자를 이용해 노동인민들을 우롱하는 도구로 삼은 것에 불과하다.
만약 공자가 인간세상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할 말을 잃고 비탄에 잠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중공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할 뿐이며, 소위 ‘공자열풍’이란 이 시끄러운 연극은 진실로 자신과 무관하며, 유학(儒學)과도 무관하고 전통문화와도 무관함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