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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티베리우스 황제
(제위 : 서기 14년 9월 17일 ~ 37년 3월 16일)
<카프리 섬>
- 아우구스투스가 나폴리에 이스키아 섬을 주는 조건으로 취득한 황제 개인 사유지.
- 섬 북부 해안에서 조금 올라간 고지대에 아우구스투스별장 위치.
- 티베리우스의 별장은 해발 350미터의 동쪽 끝 벼랑위에 세워짐.
서기 27년부터 10년간 여기에서 로마 제국을 통치.
인간을 혐오하게 되긴 했지만 인간을 통치하는 책무는 다 함.
<황제 즉위>
-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연인 외손자 가이우스는 서기 4년, 루키우스는 서기 2년에 사망.
- 서기 4년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맞아들여 "호민관 특권"을 부여하게 함.
티베리우스에게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삼게 해 자기 핏줄 후계자 구도를 구축.
- 서기 14년 9월 17일 티베리우스가 제일인자가 되어 제2대 황제에 즉위.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의 선출장을 민회에서 원로원으로 옮김.
게르마니쿠스에게도 로마군 최고통수권을 주자고 요청하여 실현시킴.
<군단 봉기>
- 북아프리카에서 타쿠팔리나스가 이끄는 반로마 봉기가 시작됨.
- 판노니아에서 로마군이 반란을 일으킴.
티벨리우스는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아들 드루수스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
<게르마니쿠스>
- 게르마니아 군단에서 반란이 일어나 게르마니아를 황제로 추대하려고 함.
- 게르마니쿠스가 갈리아에서 수습하러 저지 게르마니아로 달려 감.
새 황제 티베리우스가 보내온 메시지인 것 처럼 위조 문서를 만들어 병사들을 달램..
저지 게르마니아 군단은 겨울철 숙영지인 쾰른으로 떠남.
- 게르마니쿠스는 고지게르마니아 겨울철 숙영지인 마인츠로 감.
사령관 시리우스 등에게 새 황제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음
- 게르마니쿠스는 다시 저지 게르마니아의 겨울철 숙영지인 쾰른으로 달려감..
원로원 사절단 때문에 오해가 생겨 폭동이 재발됨.
게르마니쿠스는 아내 아그리피나를 갈리아로 피난시키려 함.
병사들이 "갈리쿨라"를 갈리아로 보낼 수는 없다며 폭동 주동자들을 처단.
게르마니쿠스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백인대장들을 재편성함.
- 게르마니쿠스는 크산텐으로 향함.
크산텐의 사령관 카이키나에게 자기가 도착하기 전에 주모자를 처단하도록 지시함.
밤중에 자행된 유혈숙청 끝에 저지 게르마니아의 반란도 진압됨.
가을에 게르마니쿠스는 아그리피나와 아들 갈리쿨라를 데리고 새 임지로 떠남.
<공중안전>
- 로마 북동쪽에 상설 기지를 만들어 근위대를 수용 본국의 질서 유지를 담당토록 함.
- 공명정대(유수티티아)를 꾀하기 위해 중요한 재판에는 티베리우스가 몸소 참석함.
<긴축재정>
- 티베리우스는 시종일관 세금 인상만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임.
- 종교 행사를 겸해서 열리는 구경거리 외에는 일체 후원을 하지 않음.
- 요직의 선출을 원로원에서 하게 되어 선거 운동이 사라짐.
- 황제의 하사금 완전 폐지.
- 단 소맥법에 의해 빈민에게 밀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제도는 폐지하지 않음.
<게르마니아 철수>
- 서기 15년 봄에 게르마니쿠스는 6만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인 게르마니아 정벌에 나섬.
라인 강을 건너 적장 아르미나우스(헤르만)의 아내와 장인을 사로잡았다.
- 서기 16년 게르마니쿠스가 8만 대군을 이끌고 게르마니아로 쳐들어 갔다.
회전에서 아르미나우스 군대를 격파하고도 돌아오는 길에 악천후로 고생을 함.
- 서기 17년 5월 26일 케르마니쿠스가 개선식을 거행함.
게르마니쿠스의 다음 임지가 오리엔트로 결정됨.
티베리우스는 28년에 걸친 게르마니아 전쟁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고 라인강 방위체제를 정비함.
티베리우스의 요구에 따라 원로원은 게르마니쿠스에게 최고통수권을 부여함.
<라인 강 방위 체제>
- 서기 17년부터 북쪽 방위선은 다시 라인강이 되었다.
- 라인강 서쪽 연안 군단 기지를 분산시킴.
본 이북의 저지 게르마니아에서는 전에는 4개 군단을 베테라(오늘날의 크산텐 부근)와 콜로니아(오늘날의 쾰른 부근)의 두 기지에 배치했지만 이것을 4개 기지에 분산 배치.
노비오마구스(오늘날 네델란드의 네이메겐)
베테라(오늘날 독일의 크산텐)
노바이시움(오늘날 독일의 노이스)
본나(오늘날의 본)
그리고 콘플루엔테스(오늘날의 코블렌츠)에서 남쪽으로 뻗어있는 "고지 게르마니아"를 지키는 네 개 군단은 대부분 전처럼 모곤티아쿰(오늘날의 마인츠)를 기지로 삼음. 다만 마인츠 서쪽에 있는 빙굼(오늘날의 빙겐)이나 북쪽의 아쿠아 마티아카이(오늘날의 비스바덴)에는 대대 규모의 병력을 분산 배치함.
- 라인강 동쪽 연안 일대를 무인지대로 만듬.
동생 드루수스가 몇 개의 성을 쌓고 배치 해놓고 있던 중대 규모의 수비 병력을 모두 철수 시킴.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라인 강 동쪽 연안의 몇몇 부족을 동쪽 연안으로 이주 시킴.
<동방(오리엔트) 문제>
- 로마제국의 동방문제는 파르티아 문제임.
- BC21년 유프라테그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에서 평화조약을 조인.
조인자는 아우구스투그의 대리인으로 파견된 티베리우스 였다.
서기 2년에 1차 조정: 황태자 가이우스가 파견됨
제2차 조정할 시기가 닥아와 황제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를 파견하게 됨.
<게르마니쿠스 오리엔트로>
- 서기 17년 가을에 게르마니쿠스는 아내 아그리피나와 아들 갈리쿨라를 데리고 새 임지로 떠남.
- 서기 18년 1월 케르마니쿠스가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 곳을 방문함.
- 아르메니아 왕위 분쟁
아르메니아 국민들이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으로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른 노노네스를 쫓아냄.
폰토스 왕의 아들이자 오리엔트식 군주인 제노네스(아르탁시아스)를 왕으로 삼음.
티베리우스는 제노네스도 로마 우호적인 사람임을 알고 이름을 아르메니아식 이름으로 바꾸는 조건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을 인정하고 케르마니쿠스를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탁사타에 보내 새로 즉위한 아르탁시아스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함.
- 티베리우스는 소아시아의 소왕국 카파도키아와 콤마케네를 속주로 삼기로 함.
게르마니쿠스에게 주어진 임무 중 두번째 임무.
카파도키아의 왕은 반 로마적 행위를 하여 이탈리아에 억류 중..전 집정관 벨라니우스 총독 부임.
콤마케네 왕의 자연사. 후계자가 없음...법무관 세베루스를 초대 총독으로 파견.
이 지역에서 속주세기 들어오게 되자 로마 본국의 매상세를 1%에서 0.5%로 낮춤.(한정적)
<피소 총독>
- 시리아 총독으로 피소가 파견됨.
-게르마니쿠스와 피소 사이에 불화가 생김. 부인들 사이도경쟁이 뜨거워 짐.
- 이에 염증을 느낀 게르마니쿠스 이듬해까지 이집트를 여행.
- 이집트에서의 게르마니쿠스 행동에 티베리우스가 불만을 표시.
<도나우 강 방위 체제>
- 서방(오키덴트)에서는 드루수스가 티베리우스 정략대로 방위선을 확립.
- 티벨리우스는 도나우 강 너머에 있는 케르마니아 땅으로 진격하는 것을 꺼림.
마르코만니족 족장 마로보두스를 북이탈리아의 라벤나에 망명 시킴.
다음 족장이 카두아르다스도 남프랑스의 포룸율리(오늘날의 프레쥐스)로 망명을 받아 줌.
그 다음 족장 바니우스는 로마제국의 친구(아미쿠스)로 인정하고 동맹관계를 맺음.
게르만 족의 영웅 아르미니우스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 옴.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 서기 19년 봄 게르마니쿠스가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돌아와 팔미라로 감.
- 여름철의 사막 여행을 끝내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오자마자 케르마니쿠스는 고열로 쓰러짐.
- 10월 10일 게르마니쿠스 말라리아로 사망.
- 피소가 자신을 독살한 것으로 믿었던 게르마니쿠스는 가족들에게 복수해 달라는 말을 남김.
- 아그리피나가 남편의 유골을 안고 두달이나 걸려 로마에 도착.
- 자연발생적으로 국장이 이루어 지고 있었으나 티베리우스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음.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친어머니 안토니아의 간호 때문에 불참.
한 달 이상 로마가 휴업 상태에 놓이자 티베리우스가 포고령을 내려 모두 일상으로 돌아감.
- 피소를 재판정으로 끌어내라는 여론은 식지 않고 있었다.
<피소 재판>
-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알고도 바로 로마로 가질 않고 임지인 안티오키아로 감.
- 군단 병사들을 회유하느라 시간을 보내고 로마로 돌아가니 너무 늦게 됨.
-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재판정 피고석에 서야만 했음.
-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독살 혐의는 면할 수 있었음.
그러나 게르마니쿠승게 불복종한 죄는 면하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자결을 택함.
- 피소의 생사에 관계없이 원로원의 판결은 내려졌다.
- 티베리우스는 자기가 가진 권한인 "대법원 판결"을 통해 대부분의 형벌을 면제 시켜줌.
후세의 로마인들에게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삼.
미망인 아그리피나의 가슴에 증오심을 심어주게 됨.
"게르마니쿠스의 신화"의 형성을 방지하기 위해 고발자들을 제사장으로 중용함.
카이키나, 벨라니우스, 비텔리우스
<아그리피나>
- 서기 21년 티베리우스가 아들 드루수스와 같이 집정관에 선출이 됨.
-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황제 계승이 위험해 질까 두려워함.
"아그리피나파"라고 해도 좋을 여자들만의 당파를 형성.
-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에게 시정을 맡기고 나폴리 교외에서 1년을 보냄.
- 북아프리카와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남.
평화유지는 황제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폴리에 머물면서 원격 조정만 함.
<사막 민족>
- 로마군의 경험이 있는 타쿠팔리나스가 사막 민족을 이끌고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킴.
- 티베리우스는 북 아프리카는 원로원령이라 문무를 겸하는 총독을 선임해 줄것을 원로원에 요청.
- 서기 21년 브라이수스를 선임 받아 북 아프리카로 파견.
- 서기 23년타쿠팔리나스의 전사로 북아프리카 문제가 해결됨.
<드루이드교>
- 갈리아 동부(장발의 갈리아)에서 고금리에 반발한 반란이 일어났다.
- 여기에 사법권과 교육을 빼앗긴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오툉의 학생들을 민족저결을 내세워 부추김.
- 로마의 라인 강 방위 군다니 즉시 진압에 나섰다.
- 드루이드 교 사제들은 영국으로 쫒겨 났으나 오툉의 학교는 폐쇄되지 않았다.
<종교관>
-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내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예수가 태어나고 끝날 무렵 십자가에 못 박힘.
- 예수 그리스도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라고 말함.
- 티베리우스는 어떤 종교를 믿든지 자유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끌어 들여 피헤를 주지 않게 함.
- 서기 19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 사는 유대인을 일시작으로 이탈리아에서 추방함.
기부금이 상식을 넘어서서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는 이유로 이집트의 이시스트교도도 추방됨.
- 소아시아 남서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남.
사르데스, 마그네시아, 필라델피아가 완전 파괴되고 에페수스까지도 피해를 입음.
-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대책을 기다릴 수 없다며 대책위원회 설치를 요구.
위원회에 티베리우스의 재해대책을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 긴급히 복구됨.
이후의 로마 황제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음.
<아들의 죽음>
- 서기 22년 티베리우스가 아들 드루수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부여해 달라고 원로원에 요청, 동의.
- 서기 23년 드루수스 급사.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더욱 증오하고 오만해지기까지 했다.
아그리피나파에 남자들도 가세.
티베리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들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
- 티베리우스는 아들의 죽음 후 제국의 책임자로서 전보다 도욱 바쁘고 충실한 시기를 보내게 됨.
<안전보장(세쿠리타스)>
- 티베리우스 제국 전체의 방위체제에 대한 손질을 실시한다.
라인강과 도나우 강 방위 군단과 임무를 정비함.
군단병의 결원을 보충하고 보조병의 정원을 정함.
<가족과의 관계>
-클라우디아 풀크루스의 간통 죄를 무마해 달라고 아그리파아가 티베리우스에게 항의.
- 아그리피아의 병문안을 간 티베리우스에게 남편을 구해 내라고 떼를 씀.
- 티베리우스가 아그리피아를 생각해 건넨 과일을 먹어 보지도 않고 시녀에게 주어 버림.
<원로원과의 관계>
- 카이사르는 황제 주도 체제 유지.
일방적으로 원로원에 법안을 제출하다 나중엔 친한 원로원 의원의 이름으로 법안을 제출.
-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주도 체제를 유지했으나 원로원이 반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제출.
- 티베리우스는 제일인자와 원로원이 서로 협력하여 국가 경영을 담당해야 한다고 확신.
원로원을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시키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
원로원의 통치 능력에 환상을 품지는 않았지만 희망이 너무 컸다. 거기에 티베리우스가 능력있는 원로원 의원들을 국경으로 파견해 버리고 나니 원로원에 남은 으원들은 기득권을 누리는 것 밨에는 관심이 없어 티베리우스는 실망과 배신감을 느낌.
- 서기 27년 68세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여러 해 동안 가슴 속에 품었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카프리 은둔>
- 서기 27년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했다.
완벽한 주거 설비를 갖춘 저택을 지은 다음 분위기가 험악한 가정을 버리고 진지하게 국사를 논하지 않는 원로원도 버리고 카프리 섬에 은둔.
티베리우스는 위선(hypokrisia)행위는 상급이든 하급이든 전혀못하는 성격이 결점이었다.
※ 하급 위선은 겉치레로 보이는 선행이고 상급 위선은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임.
상급 위선자로는 페리클레스나 아우구스투스를 들 수 있다.
- 티베리우스가 은든한 후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신속 정확한 대응을 함.
로마 근교의 소도시 피데네에서 검투사 시합장의 관람석이 붕괴하여 50명의 사상자를 냄.
로마의 첼리오 언덕이 화재로 전소됨.
- 서민들은 황제에게서 버림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원로원은 본래의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됨.
티베리우스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기 시작함.
<세야누스>
- 티베리우스 수족 가운데 우두머리인 근위대장.
서기 14년 티베리우스가 황제에 즉위하자 기사계급인 세야누스 아버지와 함께 근위대장이 됨.
서기 15년 세아누스의 아버지는 이집트 장관으로 승진, 세야누스가 유일한 근위대장이 됨.
- 티베리우스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아그리피나 주변 인물들을 국가 반역죄나 간통죄로 하나씩 배제.
함정 수사를 활용하기도 하고 고발자로 언제나 원로원 의원을 내세움.
- 아그리피나의 맏아들인 네로 카이사르와 둘째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이간질 하는데도 성공.
- 서기 28년 라인 강 하류의 동쪽 연안에 사는 게르만 민족의 한 부족이 로마에 반기를 듬.
진압 과정에서 900명의 전사자를 냈으나 복수를 목표로 진격하는 것을 말림.
- 서기 29년 티베리우스의 생모이자 아우구스투스의 미망인인 리비아가 사망.
티베리우스는 바쁜 국사가 많아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함.
<아그리피나 일당 소탕>
- 리비아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티베리우스가 원로원에 서한을 보냄..
아그리피나가 자기에게 집요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함.
23세인 네로 카이사르의 방탕한 생활과 남색 취미를 개탄
- 서기 29년 말 아그리피나와 맏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유죄가 확정됨.
아그리피나는 벤토테네 섬, 네로는 폰차 섬에 유배 됨.
-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국가 반역죄로 황궁안 지하실에 유폐됨.
- 네로 카이사르 유배지에서 사망.
<세야누스의 몰락>
- 서기 31년 1월 1일 근위대장 세야누스가 티베리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했다.
- 세야누스가 "가까운 에스파냐 속주의 총독 루키우스 아렌티우스를 직권남용과 부정행위로 고발.
티베리우스의 반격을 받음.
임기중에 속주 총독을 고발할 수 없다는 법률이 성립됨.
- 티베리우스가 집정관을 임기중에 사임을 함으로써 세야누스도 사임을 해야만 하게 됨.
- 그후 티베리우스는 은밀히 세야누스를 근위대장에서 해임하고 마크로를 후임에 임명.
- 10월 18일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세야누스를 국가반역죄로 고발하는 서한을 보냄.
- 원로원은 세야누스를 사형 판결을 내리고 그날로 집행함.
- 세야누스의 아내 아피카타는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자살함.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드루수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드루수스의 아내 리비아와는 애인 사이였다고 폭로하고 8년전에 드루수스가 급사한 것도 세야누스와 리비아가 공모하여 독살한 것이라고 폭로함.
-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나머지 자식들도 다 살해하고 리비아에게 자살을 강요함.
- 세야누스 일파로 지목된 원로원 의원들 그리고 노예들까지도 모조리 살해를 당함.
- 이후로 티베리우스의 분노가 원로원을 공포 분위기로 몰게 됨.
-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서민들에게까지 티베리우스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됨.
<뜬 소문>
- 카프리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티베리우스가 저지른 음행과 악행에 대해 뜬소문이 남.
<금융위기>
- 고령의 티베리우스가 최고 권력자로서의 냉철한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준 사건.
- 서기 33년 속주에서 고리대금을 하고 있던 한 원로원 의원이 고발 당함.
- 금융 불안과 땅값 하락으로 로마의 일대 금융 위기가 발생함.
- 티베리우스가 공공자금 투입을 비롯한 여러가지 대책을 내 놓아 위기를 일단 진정시킴.
-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시아스의 죽음을 계기로 파르티아가 개입함.
- 이듬해인 서기 34년 티베리우스는 비텔리우스를 시리아로 파견.
볼모로 잡고 있던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힘.
- 비텔리우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관저가 있는 안티오키아로 감.
- 서기 36년, 10년간 유대 장관을 지낸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를 무능력자로 해임.
- 서기 36년 로마의 아벤티노 언덕에서 대화재가 일어남.
티베리우스는 즉석에서 피해자 구제와 복구대첵을 실행에 옮김.
<마지막 나날들>
- 피로의 조짐이 니티남.
서기32년 티베리우스의 친구인 원로원 의원 코타가 식탁에서 나눈 대화로 고발당함.
카프리 섬의 티베리우스가 절망감의 토로와 자기 연민의 서한을 보냄.
- 서기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는 니폴리 만 서쪽 끝의 미세노곶에 있는 별장에서 사망. 향년77세.
- 차기 제3대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
45세의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
24세의 게르마니쿠스의 셌째 아들 칼리굴라
16세의 티베리우스 직계 손자인 게멜루스
- 3월 18일 원로원은 케르마니쿠스의 셋째 아들 칼리굴라에게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
- 칼리굴라 제3대 황제에 즉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