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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1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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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는 남학생만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여학생도 받아들이게 되어 1학년 2반은 여학생반이다.
사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여학생반은 아무래도 좀 부담스럽다.
특히 세계사 시간에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이 아주 곤란했다. 그래서 본명을 이야기하지 않고 한고조 또는 패공으로만 이야기하고 슬쩍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학생 가운데 결손가정의 비율이 아주 높다는 것이었다.
생활기록부를 놓고 한번 꼼꼼하게 조사해보니 한 학급에 거의 열 명 정도가 결손 가정이었다. 바닷가 어촌 마을의 특징을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높았다. 또한 학생들의 기초 학력이 너무 낮았다. 한번은 학기말 성적 처리를 위해 성적 전표를 가지고 집에 와서 계산을 하는데, 집사람 왈 얘들 성적이 말로 듣던 것처럼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은 기말고사나 중간고사의 성적이 아니라 중간과 기말고사 성적을 합산한 성적을 보고 한 말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의 웃기는 전통은 수업시간에 떠들던 아이들이 질문을 하면 조용해지고 혹시 지적을 당할까봐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혹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서 나오는 질문은 두 가지 밖에 없다.
1. "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될까요?" 아니면 "물 좀 먹으러 다녀와도 될까요?"
그래서 농담 삼아 아이들에게 말하고는 했다. 우리학교가 바로 개그콘서트의 생방송 봉숭아 학당이라고
그런 저런 사건과 사고를 거치며 또 한해가 지나고 교직생활 3년차가 되고 이번에는 3학년 담임을 맡았다.
고 3쯤 되면 머리통이 굵어져 가끔 맞먹으러 대드는 놈이 있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 일주일에 따라 한해가 조용하게 넘어가기도 하고 처음에 학생들을 잡지 못하면 정말 다사다난한 한해가 된다.
문제는 상습적으로 결석을 하는 놈들을 휘어잡기가 만만찮다.
그래서 흔히 쓰는 수법이 학부모에게 사전에 말씀을 드리고 학생과 같이 학교에 오시게 해서 학생 앞에서 자퇴 원서를 작성해서 미리 받아 보관하면서 앞으로 한번만 더 무단결석을 하면 자퇴 원서를 처리해 자퇴 처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사전에 학부형과 손발을 맞춰놨기에 기끔은 연기력이 뛰어난 학부형은 학생 앞에서 대성 통곡을 하는 경우도 있고 이런 경우는 효과가 백퍼센트이다. 대체로 고3 쯤 되면 속된 말로 본전 생각을 할 때이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조금 힘들더라도 졸업은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잘먹히는 방법으로 대체로 2학년 2학기부터는 아주 효과가 좋은 방법으로 내가 자주 써먹던 방법이다.
우리학교 학생들은 정말 순진하다
한번은 보건소에서 소변 검사를 나왔다
그 기회를 이용해서 흡연자를 파악하고 겁을 주기 위해서 아침조회 시간에 소변검사를 하는 목적이 흡연자를 파악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솔직하게 자수를 하는 학생들은 검사결과 흡연자로 판명이 되더라도 용서를 하겠으며 앞으로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검사 결과를 없는 것으로 하겠지만 솔직하게 자수하지 않은 놈은 검사 결과 흡연으로 판명될 경우 학생과에서 흡연으로 처벌하고 생활기록부에도 기재하겠다고 은근히 협박을 하자 흡연자의 대부분이 솔직하게 자수를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이런 저런 사건 사고와 같이 또 한해가 지났고 새 학년이 되어 올해는 2학년 담임이 되었고 2학년은 가을에 2박3일간 야영을 가게 되어 있었다.
그해에 잊히지 않는 ㅅ건은 여학생 몇명이 학교에 나오지 않아 학생들에게 수소문해보니 가출을 하겠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삼척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던지 아니면 인근 동해역에서 기차를 타는 방법이 있었다.
우선 터미널에가서 보니 없었다. 바로 차를 몰고 동해역으로 갔다.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아이들이 대합실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 나를 보자마자 뒤로 돌아서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나는 신발도 실내화 차림이라 도망가는 아이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몇 걸음 따라가다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열심히 도망가던 아이가 이름을 부른 즉시 그 자리에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를 차에 태우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다.
그아이 아버지는 오징어 잡이 배를 타고 거의 울릉도에 있거나 포항에 서있다가 일이 없을 때에 삼척 집에 오시는데 뱃사람들의 생활이 거친 것처럼 거의 집에서는 술로 시간을 보내시는 편이었다.
그래서 1살위인 오빠와 둘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가 생활비도 거의 주시지 않아서 형편이 어려운데다가 아버지의 행패까지 겪다보니 가출까지 결심를 했다가 실행에 착수 했는데 내가 뒤따라오면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말을 했다.
사실 이 아이의 사정과 어려 운 형편은 알고 있었고, 밤에 몰래 아이가 살고 있는 집에 가서 1. 우선 눈에 잘 띄는 연탄이 충분하게 있는지와 쌀독에 쌀이 떨어지지 않았는지를 몇번 살펴 본 적이 있었다. 사실은 가정에서 뒷받침만 되고 잡념없이 공부에만 열중할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진학도 가능한 가능성이 있는 아이 였는데, 여러가지로 공부에 집중할수 없는 처지가 참 안타까운 아이였다.
그래서 다시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가출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가출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마무리 했다.
그해 겨울에 또 문제가 있었다. 아빠는 배를 타고 나가셔서 집안이 조용해 졌는데 한 살 위인오빠가 큰 사고를 친 것이다.
그렇게 해서 3학년에 진급을 했고 3학년에는 내가 담임을 맡지 않았다. 3학년이 된지 한달 정도가 지났을때 아침에 집으로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그 아이의 목소리로" 선생님 아빠가.. 아빠가..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하고 출근전에 집으로 찾아가봤다 아이의 말이 아빠가 포항에서 술에 취해 길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할 방법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아이 말은 이미 경찰조사 결과 행려병사자로로 처리되어 무연고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로는 딱히 어떻게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주며 힘내라고 격려하고 주머니를 뒤져보니 20여만원정도가 잡히기에 전해주고 학교로 출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그 아이는 조금 침울한 기색이었지만 학교에 잘나오고 있어서 조금 마음이 쓰이기는 했지만 멀리서 지켜보며 1년을 지내게 되었다.
다음해. 1월에 졸업식을 마치고 2월이 되었을때 다시 집으로 전화가 왔다 그래서 집으로 찾아가 그 아이를 만나보니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등록 마감은 5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나로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에 방송국에 피디로 근무하는 고향ㅇ선배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 메스컴을 통해서 한번 호소해보자고 했다.
그 대신 그 아이의 사진이나 인적 사항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역시 매스컴의 위력은 대단했다. 도와주겠다는 독지가가 나타나 무사히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속초에 생활 기반이 없고 한 상태에서 방을 구할 돈도 없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학교기숙사에 입사해야 학교에 다닐수 있었다.
학교 측에 알아보니 이미 기숙사는 마감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학교 담당교수를 찾아가서 사정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학교에 같이 찾아가보니 우리 학교를 담당했던 교수가 부학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만나서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하니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했다.
은행 마감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정말 초조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처에 근무하는 직원 한분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명을 말하며 자기 조카가 우리학교 졸업생이라고 말하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사정을 이야기하니 자기가 은행에 전화를 해놓을테니 일단 기숙사비를 은행에 입금하라고 했다. 시내에 나가 은행을 찾아가보니 이미 정문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그래서 건물 옆에 있는 쪽문으로 가서 문을 두드리니 안네서 사람이 나와 학생처 직원의 이름을 말하니 전화를 받았다며 들어오라고 해서 겨우 기숙사비를 입금할 수 있었다
정말 여러가지 도움이 모아져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를 태우고 삼척으로 돌아와 우선 집에 차를 세우고 시내에 있는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일을 무사히 마무리한 자축연을 가졌다 안도감과 더불어 정말로 술이 잘받는 날이었다
학교 생활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2002년에 생겼다.8월 31일 금요일 오후부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듯이 비가 억수로 퍼붓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5시간 동안 800밀리미터라는 기록적인 집중 호우가 내린 것으로 바로 그유명한 태풍 루사의 영향이었다. 시내의 모든 도로는 물로 한강이 되었고, 맨홀 뚜겅은 수압을 이기지 못하고 쏫구쳐 올라왔으며 전신주의 변압기는 침수되어 터지는 폭발음이 시내 사방에서 들려오고 동사무소와 소방서에서는 비상 싸이렌을 우리며 경고 방송을 하고 있었다. 우리집 주차장도 침수되어 세워두었던 차가 반 이상 물에 잠겼다.결국 차는 나중에 폐차시켰다.
정말 악몽같은 밤이었다.물난리 속에 수도물은 단수되어 마트에 가서 생수를 사와서 라면을 끓여 저녁을 해결해야 했다. 물난리 속에 물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날이 밝아서 시내는 온통 황토흙 투성이었다 물과 함께 흘러온 토사가 쌓여 엉망이고 온갖 쓰레기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걸어서 학교에 나가 보니 학교도 엉망이었다. 학교 담 위에 뉘집 장독이 올라가 있었고 테니스장 펜스 위에는 테니스장에 있던 장의자가 올라가 걸려 있었다.운동장의 축구 골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교무실도 침수되어 모든 집기가 엉망으로 엉겨 있고 케비넷도 전부 넘어가 온갖 서류가 뒤엉켜 있었다 이런 침수된 서류들을 운동장으로 옮겨 놓으니 작은 산이 만들어 졌다. 본관 1층은 천정에서 불과 20센티도 남지 않은 높이까지 침수되었다. 학생들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비상연락망을 통해 학생들의 안부를 파악해보았다. 그런데 미로에 사는 남학생 한명이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로면까지 가보기로 했다. 차가 갈수 있는 곳까지는 차로 간 다음 걸어서 미로면 소재지로 걸어가 면사무소에 문의를 해보았더니 비가 그친 토요일 오전에 미로면 상거노리로 가는 다리 부근에서남학생 한명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되었다는 신고는 받았지만 소속학교 등 자세한 인적사항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 학생의 집이 있는 상거노리 쪽으로 가보려 했지만 다리가 끊겨서 접근이 불가능했다.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삼척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던 중에 그 아이가 금요일 밤에 삼척 시내에서 잤다는 말을 듣고 혹시하는 마음에 수소문해서 잠을 잤다는 집을 찾아가 보았다 우리 학교 학생이 아닌 친구의 집에서 잤는데 토요일 오전에 엄마가 보고 싶다고 집으로 간다고 나가기에 따라나섰다가 다리가 끊어진 곳에 도착해서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헤엄쳐서 건널수 있다고 자신을 하며 헤엄처 다리를 건너다 두번째 교각 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두 번째 교각과 세 번째 교각 사이에서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서 미로면 사무소에 가서 신고를하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원망을 하고 있었다. 하기는 이미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간 상태라면 별달리 손을 쓸 여지도 없으니 그 사람들을 원망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무지와 무모한 만용이 빚어낸 결과였다. 몇일이 지나며 하교와 시내는 루사의 상흔을 조금씩 지워 나가고 있었지만 교실에는 그아이의 자리가 비어있어 마음 한 켠을 아리게 했다.
원래는 월요일인 9월 2일이 1학년 학생들을 인솔하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루사로 인해 수학여행은 커녕 학생 한명을 잃고 말았다.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 학급 학생 몇명과 같이 실종된 학생의 집을 찾아갔다. 집이 침수되어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바에 나가 계시지 않았고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학생들을보자 너희 들은 이렇게 살아있는데 우리 아들은 왜 돌아오지 않느냐고 넋두리를 하셨다.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할수가 없었다. 겨우 희망을 가지시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나로서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하던 차였다.
예정된 일정보다4주정도가 지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삼척에서 관광버스로 부산항에 가는 길에 경주 감은사지와 대왕암을 둘러보고 부산항에서 야간 페리호 편으로 다음날 아침 제주항에 도착하여 제주도 일정을 시작해서 2일동안 제주도를 돌아보고 3일째 되는 날 오전에 제주공항에서 항공편으로 김해공항으로 와 관광버스편으로 경주불국사를 보고 삼척으로 귀환하는 일정이었다. 조금 바쁜 일정이기는 했지만 큰무리 없이 수학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일상의 학교 생활로 돌아왔다.'루사'가 머리속에서 잊혀져가던 그해 12월10경에 실종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어 삼척의료원 영안실에 안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학기 초에 담임을 맡은 학생들을 디지탈 카메라로 찍어둔 파일이 있어 비록 흑백 사진으로나마 영정사진을 만들수 있었다. 검은색액자에 넣어서 평소에 친했던 학생 몇명과 같이 삼척의료원 영안실로 갔다. 가지고 간 사진으로 영정사진을 했으며 검사의 지휘에 의해 장례식을 치뤄도 된다는 결론이 나와 화장을 하기로 했다고 하여 학생들과 같이 장의사 버스를 타고 동해 승화원에가서 화장에 참여하였다 아이의 시신이 화장장 고로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대성통곡을 하며 10여분을 울었다. 학교 생활을 할때 결석이 많아서 내가 좀 모질게 대했던 기억이 큰 후회로 돌아왔다. 조금더 따듯하게 대해주지 못한게 한이 되었다.
불과 두시간이 지나서 유골이 수습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녀의 흔적은 없애버리는 게 나중에 도움이 된다고 종용하여 같은 동내분이 자기가 부모님 모르는 곳에 뿌려주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삼척으로 돌아오니 거의 하교 시간이 다되어 학생들은 의료원에서 해산하여 귀가시키고 학교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루사로 실종된지 꼭 100일 만에 비록 비극적인 결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무리가 되었다.
이번달 말이면달이면 다사 다난 했던 학교를 떠나게 된다. 이제와서 돌이켜보건대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선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좀더 보듬어 안고 조금더 따듯하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스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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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즈음 보기 드문 선생님의 표상을 무열을 통해서 느껴보네..
이렇게 훌륭하신 선생님이 명퇴할 때 대통령 훈장을 받도록 누군가가 추서해주어야하는데.......
TIP: 글을 올리기 전에 한글에 먼저 써서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확인하고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글에서 쓴 글을 드래그해서 맞춤법 검사기에 넣어 보면 금상첨화지.
PC 바탕에 폴더를 만들어 저장도 해 놓으면 더 좋고, D드라이브나 USB에 담아 놓으면 나중을 위하여 중요한 자료가 되겠네. 명퇴후에 무열에게 이처럼 글 쓸 일이 주어져서 좋은 일이라 여기네~!
(맞춤법 검사기를 공지로 올려 놓겠네~!)
아프지 않은손이 아픈손가락 맘 모른갑다. ㅎㅎㅎ
사실 넷상에서 그냥 개발 새발 쓰는 거라서 문맥이 맞는지 맞춤법과 띠어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올라가다 보니 내가 봐도 엉망이구나. 하지만 먼저 써보고 올리는 것도 조금 낮간지러운 것 같아서....
루사로 인해 좋은 점도 없지는 않았단다.
가장 좋은 점은 감사 받기가 몇년간 편했지 감사서류가 전부 침수되어 폐기되었다고 말하면 무사통과니까. 폐기되어 산처럼 쌓인 사진한장이면 만사 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