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비 내리는 고모령’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지역민들의 숱한 애환이 어린 명소, 대구시 수성구의 ‘고모역(顧母驛)’이 역사(歷史)의 뒤안 길로 접어들었다. 갈수록 승객수가 줄어들면서 지난 7월부터 승객을 위한 일반열차의 정차가 폐지돼 사실상 역사(驛舍)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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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잦은 비속에 찾아간 수성구 범어동 고모역사에는 역무원만이 텅 빈 대합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단촐한 대합실의 빛 바랜 나무의자와 붉은 벽돌 건물만이 오지도 않는 승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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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학선(48) 고모역장은 “승객이 없어 종전에 다니던 무궁화 여객열차가 지난 7월15일부터 서지 않고 군부대 화물을 실은 화물열차만 하루 2차례 들렀다 갈 뿐”이라면서 “몇해 전에만 해도 승객 발길이 적잖았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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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7, 98년까지만 해도 대구칠성시장이나 번개시장 등 대구시내로 농산물을 팔러나가던 동네 주민들이 않았지만 최근에는 하루 1명 꼴도 기차를 타지 많아 역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됐다는 것. 역 직원수도 조만간 8명에서 6명으로 줄게될 운명을 맞는 등 올해로 80년 역사를 간직한 고모역이 추억속으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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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25년 설치된 고모역은 1970년대에 가장 활기를 띠었다. 아침 통근열차는 늘 만원이었고 역 앞에는 통학생들의 자전거가 즐비했다. 당시에는 연간 5만4천여명의 손님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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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동이 고향인 박여용(71)씨는 “젊은 시절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갔다가 기차 시간이 맞지 않아 대구역에서 이곳까지 걸어오기도 했다”며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마을 사람들과 담배를 나눠 피우던 일이 엊그제 같다”고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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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고모령’의 작곡가 박시춘씨가 이곳에서 형제봉을 바라보며 가요의 영감을 얻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 그러나 광복의 혼란스러움 속에 지난 1949년 역사가 불타 새로 지어지기도 했고 지난해 8월에는 열차추돌 사고가 나 9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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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역은 앞으로 역장이 없는 ‘간이역’으로 모습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곳서 2km가량 떨어진 고모-경산 간의 가천역(가칭)이 올연말 개통되면 고모역은 말 그대로 역과 역을 잇는 역할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