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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공장의 하루 일과] 12시부터 시작되는 점심시간이 되면 공장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구내식당이 노동자들로 넘쳐 났다. 매달 초 회사에서 식권을 지급 받았는데, 그 값은 월급에 다 포함되어 있었다. 구내식당 밥은 제법 괜찮게 나왔다. 배고픈 시절이었으니 무엇인들 맛이 없었겠냐만, 힘들게 일하고 나서 먹는 밥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하지만 12시 40분부터 오후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서둘러 식사를 해야 했다. 그래도 오후 작업은 4시부터 10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 10분 동안 동료들과 약간의 수다를 떠는 것이 조윤자와 친구들의 유일한 휴식이었다. 노동자들은 더러는 그늘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요즘처럼 점심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공장 한쪽에서 공을 찬다거나 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는 없었다. 단 10분의 휴식 시간이지만 하던 작업을 미처 마치지 못했다면 정리를 하고 난 후에야 쉴 수가 있었다. 생산 라인을 오래 멈출 수 없어 휴식 시간은 매우 철저했다. 노동자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각 라인의 작업반장이 대신 그 작업을 수행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작업반장은 모든 공정을 소화할 수 있어야 했다. 퇴근 시간은 오후 6시 30분이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면 당연히 퇴근을 하고 집에 가야 하지만, 한 달에 절반 이상은 제시간에 퇴근을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잔업 때문이었다. 잔업은 보통 저녁 9시까지 하는데, 그래도 잔업 수당이 150%가 나왔기 때문에 대부분 군말 없이 묵묵히 잔업에 임했다. 주문 물량이 갑자기 증가하거나 수출 선적이 임박하거나 할 때면 철야 작업도 수시로 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철야 작업을 했다. 철야 작업은 보통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했다. 철야 작업이 있는 날이라 하더라도 출근 시간은 아침 7시 50분까지였다. 조윤자는 항상 출근하기 전에 밥을 지어 놓고 집을 나섰다. 철야 작업이 있는 날은 새벽 5시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가서 밥을 해 놓고 다시 공장에 출근했다. 아직 나이 어린 조윤자의 아이들은 엄마가 아침에 밥을 해 놓지 않으면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동생과 남편이 집에 있었지만, 동생이나 남편은 밥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조윤자는 집에서 밥을 해 놓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서 공장 구내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아침밥도 회사에서 식권이 지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철야 작업을 한 후 잠 한숨 못자고 출근해서는 또다시 고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한 켤레의 신발이 완성되기까지는 노동자들의 손을 무려 424번을 거쳐야 했다. 노동자들이 신발을 만드는 공정을 보면, 우선 남자들이 신발 갑피를 원단에서 프레스 기계로 찍어냈다. 공장 내에서 큰 사고는 그리 많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을 잃는 사고는 심심찮게 일어났다. 그만큼 위험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프레스 작업은 남자들이 전담했다. 신발 밑창 등에 사용할 고무 가루를 배합하는 일 역시 남자들이 전담했다. 왜냐하면 작업장 안은 고열과 역한 고무 냄새, 그리고 가루가 날리는 등 작업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여공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생산 라인의 여공들이 했던 주요 작업을 보면, 제일 먼저 재단된 갑피에 나이키나 리복 등의 상표와 문양을 미싱[재봉틀] 또는 나염하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상표를 부착한 갑피를 신발을 만드는 틀[골]에 씌운 후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먼지를 제거하는 선처리를 한 다음, 신발 앞코의 모양을 잘 잡은 후 갑피와 밑창에 본드 칠을 하고 건조시키는 작업을 2~3회 반복한다. 이 작업 역시 접착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 후 갑피와 밑창을 접착하여 조립하고 굵은 실로 박음질을 한 다음 고열로 압축을 하면 주요 공정은 끝이 난다. 이제 골에서 조립한 신발을 빼내서 안창을 끼우고 코 부분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종이를 끼워 넣고 신발 끈을 끼우고 포장을 하면 신발 한 켤레가 완성이 된다. 운동화의 대명사격인 ‘나이키’라는 브랜드의 첫 제품이 출시된 것이 1971년이었다. 1970년대 나이키는 부산 지역 신발 공장에 하청[OEM]을 주어 제품을 생산했다. 나이키의 하청을 받은 신발 공장들은 이후 20여 년간 호황을 누렸고, 한때는 전 세계 나이키 운동화의 90%가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따지고 보면 나이키가 거대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노동자들의 섬세한 일솜씨 덕에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즉 부산 지역 신발 공장의 여공들이 나이키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셈이다. 리복 등 여타의 유명 브랜드 역시 나이키와 마찬가지로 부산의 여공들 손을 거쳐 세계로 나갔다.
여공들에게 작업 환경보다 더 두려운 존재는 관리자들이었다. 작업반장은 같은 노동자였으나 회사 측의 입장을 대변하기 일쑤였다. 드러내 놓고 하는 공장 내 폭력은 거의 없었으나 욕설 등의 폭언은 비일비재했다. 요즘 같으면 성희롱에 해당할 말들도 서슴없이 나왔다. 다들 쉬쉬하고 넘어갔으나 여공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여공들끼리는 잘 지냈다. 지역 차별이 극심하던 시절이라 호남 출신인 조윤자나 박현숙은 지역 차별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크게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공장에 타 지역 출신 사람들, 특히 호남에서 온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호남 사람이 없으면 공장이 안 돌아갈 정도로 호남 출신이 여공들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오히려 부산 사람이 소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장에는 대체로 중학교 정도를 마치고 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공들이 많았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공장에 온 겨우 열서너 살의 어린 여공들도 제법 있었다. 어린 여공들은 비교적 작업이 수월한 미싱 파트에서 주로 일했는데, 조윤자의 조카도 14살에 고향 진안을 떠나 부산의 신발 공장에 취업했다. 공장에 젊은 미혼 여공들이 워낙에 많다 보니 장가 못간 남자들이 짝을 찾는다며 신발 공장에 취직해 들어오는 코미디 같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또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여공들도 많았기 때문에 공장에는 결혼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결혼식에 하객으로 간다거나 축의금을 따로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개는 같은 생산 라인의 동료가 결혼을 하면 십시일반해서 축의금을 건넸는데, 보통 이천 원 정도씩 걷어서 냈다. 그래도 결혼식을 올리는 여공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많은 여공들이 결혼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합동결혼식을 치러 줬다. 조윤자가 하얀 면사포를 쓴 것도 바로 동양고무 사내 합동결혼식에서였다. 아무래도 여자들이 많다 보니 여공들끼리 계도 많이 했다. 주로 금반지 계를 많이 했는데, 대부분 다달이 1~2개씩은 꼬박꼬박 곗돈을 부었다. 요즘처럼 사내에 별다른 모임이 없던 시절이라 계를 하며 친목도 다졌다. 당시는 노동자의 놀이 문화나 여가 활동이 별로 없었다. 퇴근 후 동료들끼리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1970년대는 그런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한 번씩은 마음 맞는 동료들과 통닭을 먹으러 서면에 나갈 때는 있었다. 정말 어쩌다 한 번씩 말이다. 처녀 총각들은 가까이 있던 삼일, 삼성, 보림 극장에 영화를 보러 나가는 일도 가끔씩 있었다. 여유가 없기는 공장 측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회사 창립 기념일이 되면 직원 체육 대회 등의 행사를 많이 하지만 당시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다만 직원들에게 ‘축, 동양고무주식회사 창립 기념’이라 적힌 수건 한 장씩은 거르지 않고 꼭 나눠 줬다. 특이한건 때때로 공장에서 돼지고기를 전 직원들에게 나눠 줬던 일이다. 고기를 타오는 날은 맛있게 고기반찬을 먹는 아이들 얼굴이 떠올라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조윤자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빨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