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였다. 그 후임자를 두고서 후보들로 여러 군주들이 거론되었다. 작센의 선제후 현공 프리드리히(1463-1525)는 나이가 많았고, 스스로 사양하였다. 영국의 헨리 8세, 프랑스의 프랑스와 1세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독일 밖에서 황제를 선출한 경우가 없었으니, 그만큼 승계 1순위 칼 5세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는 이미 상속으로 가진 영토가 엄청 넓었다.
황제 선출의 권한은 선제후라고 부르는 일곱 제후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서 행사했다. 황제가 서거하면 늘 모이는 것은 아니었고, 후사가 없어서 적절한 선택이 필요한 경우에 그 권한이 작동하는 것이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례로 의사를 밝혀, 선임자로 제국의 총리 격인 마인쯔 주교에 이르면 결정이 되었다. 이들에 대한 로비도 치열하여, 엄청난 양의 뇌물이 수수되기도 하였다. 1519년 6월 28일 선거에서 칼 5세는 전원일치의 선택으로 황제가 되었다.
10월에 쾰른 대주교로부터 대관을 받았지만,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대관받기를 원했다. 꼭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지만,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권력자로 등극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십년이 지난 다음, 1530년 2월 24일, 바로 자신의 30회 생일이었다. 수차례 전쟁을 치렀고, 로마를 정복하여 약탈을 자행한 이후, 포로나 다름 없는 교황이었으니, 의미는 거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실제로 그의 동생이요, 후임자인 페르디난트가 정사를 돌보았다. 십년에 한 번 정도 방문하는, 게다가 언어도 잘 소통되지 않는 황제의 역할을 매우 제한되었다. 30년 넘는 세월에, 신교 진영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계속되는 회의와 논쟁, 일치를 위한 협상과 공의회, 그리고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의 의도는 관철되지 못하였고, 결국 포기하였다. 자신의 후사에게 물려주지도 못하고, 페르디난트가 황위를 차지하고 그 후손들이 합스부르크 황실을 나폴레옹시대까지 이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