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단장 김원봉 선생

의열단에서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해방 후, 남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
오늘은 그분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밀양에서 태어난 약산 김원봉 선생
그의 나이 14살, 1911년 일본 천황의 생일에 나누어 준 일장기를 화장실에 버려 퇴학을 당했던 항일정신이 투철한 아이
평화적인 방법만으로는 해방이 쉽지 않다는걸 꺠달은 그는 무장 투쟁을 통해 해방을 쟁취해야한다고 굳게 믿엇다
이후, 19세에 군사학을 배우고, 중국 난징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신흥무관학교에서 무장 토쟁의 기본을 배웠다
독립운동을 위한 의열단 창단과 조선 의용대 창설


▲ 의열단 사진 /언제 무슨일이 있을지 몰라, 늘 사진을 찍는걸 좋아했다고 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분열의 조짐을 보이자
그해 11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요인암살, 중요기관 폭파로 일본을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현상금이 100만원, 현재 320억이라고 하니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 기념 사진
이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활동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정치활동을 하던중, 그에게 일제시대보다 더 지독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해방 후, 더 모질었던 약산의 인생
해방후, 김원봉 선생은 완전한 독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남북간의 분단을 걱정했다
하지만 이런 행보는 빨갱이라는 비난으로 이어졌고,
무자비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은, 반민 특위에서도 체포되었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잡혀가게 된다.
(친일 경찰이었지만 남한으로 내려와 빨갱이를 잡는다는 미명아래 경찰으로 복직되었고, 나중에는 국회의원까지 출마하게 되었다고하니.... 어이가 없다)

▲왼쪽이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
1947년 3월 악질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남로당 파업 연류와 관련해 체포된 김원봉은
화장실에서 바지도 못올리고 끌려가 따귀를 맞는 등 엄청난 수모를 당한다.
일본군을 덜덜 떨게 한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 경찰출신에게 뺨을 맞고 온각 조롱, 모욕을 당할 것을 누가 예측했겠는가.
의열단 동지의 회고에 따르면 풀려난 뒤 사흘을 연속해서 울었다고 한다

▲ 남북연석회의에 축하를 낭독하는 김원봉
이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김구, 김규식과 함께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했고,
김구과 김규식이 돌아올 때 북한에 남게 된다. 그 만큼 친일 경찰에게 당한 수모는 크나 큰 상처였던 것.
북한에서 최고 인민회의 부의장 등 고위직까지 수행했으나
1958년 북한의 김일성은 김원봉이 장졔스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숙청하고 만다.
이 월북사건으로 인해, 그의 이복형제 등 가족들은 한국전쟁때 몰살당했으며, 겨우 살아남은 형제는 옥살이까지 하게 된다
물론 좌익의 색이 없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해방에 공헌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없이 그저 빨갱이의 가족으로 치부된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월북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드러나지 못한 김원봉 선생은 <암살>이라는 영화로 다시한번 재조명 받고있다
그가 이뤄낸 행적으로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고있는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