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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갈라디아서 6:11-6:18
제 목 :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갈라디아서 설교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기 다리 고기 다리 던 갈라디아서 설교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려고 했는데 왠지 쑥스러워서 그만 두었습니다. 여하튼 갈라디아서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저는 갈라디아서 설교를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를 더 치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더 정교하게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또 성도가 어떤 존재인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설교를 하면서 저는 갈라디아서의 기록자인 사도 바울에 대한 존경심이 훨씬 더 깊어졌습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 갈라디아서의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바울이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공로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영감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기록한 바울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울 자신은 칭찬받는 것을 아주 쑥스러워 할 것이고, 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겸손해 하겠지만 말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바울이 사용한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과 다양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항 대립적 표현 방식도 있었고, 간증도 있었고, 비유도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표현들도 있었고,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그들의 주장을 따르려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과 저주 같은 표현들도 있었습니다. 예. 바울은 참으로 다양한 수사학적 기법과 멋있는 표현들을 사용하면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서도 바울이 참으로 뛰어난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구절이 몇 가지 있습니다. 11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절,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절,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7절,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는 표현, 이 표현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말로 멋진 표현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이 멋진 표현들의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큰 글자로 썼다고 하니까 정말로 바울이 크게 글자를 써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딕체로 썼는지, 명조체로 썼는지, 궁서체로 썼는지, 또 11포인트로 썼는지, 12포인트로 썼는지, 행간은 몇 퍼센트를 주었는지 궁금히 여기는 분은 아무도 안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 이 표현은 진짜로 글자를 크게 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 바울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썼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나 바울이 쓰는 이 편지의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라는 것입니다. 나 바울이 쓴 이 편지의 내용을 꼭 기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원리를 결코 잊지 말고 아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달라고 부탁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 바울은 편지를 맺는 인사말을 간절한 호소와 간절한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갈라디아 성도들을 요동케 하고 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밝혀줍니다.
그 내용이 [갈라디아서 6: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입니다. 이 내용 속에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정체,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목표, 또 그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낱낱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습니다. 그런데 맺는 말 단계에서 그들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공개합니다.
먼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선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모양’,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내용을 바울이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즉 육체의 모양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조금만 자세히 생각해보시면 말입니다. 이게 말이 잘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모양은 우상숭배, 분쟁, 시기, 분열, 이단, 투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우상숭배, 분쟁, 시기, 분열, 이단, 투기 같은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란 말이 되는데 세상 어느 누가 이런 모양을 내겠습니까? 이 모양은 감춰야 하는 모양이지 결코 드러내야 하는 모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한 표현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바울이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역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고, 또 성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허튼 소리를 기록하고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왜 우상숭배, 분쟁, 시기, 분열, 이단, 투기 같은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모양을 갖게 된 원인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왜 육체의 모양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인이기에 우상숭배, 분쟁, 시기, 분열, 이단, 투기 같은 육체의 모양, 즉 죄의 모양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죄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죄인은 하나님을 떠나 죄, 즉 사단을 따라간 존재입니다. 사단의 시험에 굴복해서,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서, 사단의 시험에 패배해서 사단에게 사로잡힌 존재, 즉 사단의 종이 된 존재입니다.
조금 전 제가 사단의 시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사단의 시험 그러면 여러분은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나십니까?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담이 제일 먼저 생각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하와가 제일 먼저 떠오르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단의 시험 그러면 예수님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복음서에서 사단으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당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거뜬히 물리치시고 승리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이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고, 사단 앞에 엎드려 경배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시험은 생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부인해야 하는 시험이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시험은 하나님께 잘 보여 하나님의 상을 받는 시험이었고, 사단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시험은 천하만국과 영광을 얻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단의 이 세 가지 시험을 거뜬히 물리치셨습니다.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신 승리자이셨기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을 사단으로부터,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죄인은 바로 이 사단의 세 가지 시험에 굴복한 존재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에 넘어간 존재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에 패배한 존재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상과 더 큰 복을 받기 위해서, 또 천하만국과 영광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사단 앞에 무릎 꿇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육체의 모양의 본질입니다. 남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 남들보다 더 큰 상과 더 큰 복을 받는 것, 남들보다 더 큰 명예와 영광을 누리는 것, 바로 이것이 육체의 모양의 본질입니다. 자신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니까 당연히 우상숭배와 분쟁과 시기와 분열과 이단과 투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와 자신들의 부와 자신들의 명예와 자신들의 권세와 자신들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
바울은 또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할례는 받았지만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도 조금 이상합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잘 지켰겠습니까, 잘 지키지 않았겠습니까? 잘 지켰을 것입니다. 아주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자들입니다. 율법을 준수해야 상과 복을 받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저주와 징계를 받는다고 굳세게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율법을 안 지켰을 리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10-12],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했고, 정해진 날에 금식을 했고, 안식일을 반드시 지켰고, 십일조를 반드시 드렸고, 정결예식을 반드시 행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는 결코 흠이 없는 완벽한 자들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할례는 받았지만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말을 할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이 법조항의 율법을 완벽히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율법의 정신은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과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것은 표면적으로는 율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랑이고,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에 들어있는 사랑과 은혜의 원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고, 또 그 사랑과 은혜의 원리를 베푸는 데에는 인색했기에 바울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 누가복음에서 바리새인이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은혜의 원리가 있다면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올 수 없습니다. 예.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조항을 잘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할례는 받았지만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했고, 또 할례는 받았으나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뜻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어떤 자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법조항의 율법만을 잘 지킬 뿐, 사랑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오직 자신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 이것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 침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변화가 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할례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까? 왜 억지로 할례를 받으라고 주장합니까?
그 이유로 바울은 두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12절,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입니다. 언뜻 보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박해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사도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박해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박해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예. 예수님도, 사도들도,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언제나 박해를 받는 쪽이었지 박해를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자신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박해를 면하기 위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 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들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박해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온전히 이루어 낼 수 있는 토대가 무너지는 것, 그것을 그들은 박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럼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성전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율법의 조항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가장 직격탄을 맞을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제사장들이고, 서기관들이고, 바리새인들입니다. 즉 유대 종교지도자, 유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 동안은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 동안은 부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은 권력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은 명예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이것을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한 박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는, 즉 다시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법조항이 지배하는 사회로 되돌아가야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을 할례에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오직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실체와 목표를 바르게 이해해서 그들의 주장에 절대로 농락당하지 말라고 바울은 큰 글자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두 번째 이유는 13절,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까? 이런 것들을 어디에 쓰려고 추구합니까? 바로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모험소설을 참으로 좋아했습니다. 톰 소여의 모험, 십오 소년 표류기, 로빈슨 크루소 같은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의를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부, 자신의 명예, 자신의 권세,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자랑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 사람들이 의를 추구하고, 부를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권세를 추구하고, 영광을 추구하는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이 자기를 알아보아 주기를 원해서입니다. 자랑할 사람이 없으면, 알아줄 사람이 없으면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를 확장해서 이야기 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결과로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을 짓밟아야 하고,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하고, 남을 이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말이 13절, 마지막 부분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너희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갈라디아 성도들 너희를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출세의 도구로 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 걸음이 할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랑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고,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만을 이루는데 눈 먼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의 실체와 목표를 바르게 이해해서 그들의 주장에 절대로 이용당하지 말라고 바울은 큰 글자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장면이 중세 때의 교회입니다. 오늘날 유럽 각 지역에 중세 때 교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정말로 화려하고 정말로 웅장합니다. 당시 건축 기술로 어떻게 이처럼 멋진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는지 정말로 놀라울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세 때 교회가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만을 추구했다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또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가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습니까? 성경의 진리를 왜곡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얼마나 착취하고 얼마나 수탈했습니까? 예. 중세 때 교회는 오로지 사람들을 이용만 해먹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게 무엇입니까? 그래서 일어난 게 종교개혁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 아래 일어난 종교개혁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게 바로 오늘날 개신교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도 중세 때의 교회와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유대교 율법주의자들과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교회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목회자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성경을 왜곡하고, 성도를 속이고, 성도를 이용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 가지 집어보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성도들을 수단화 하고, 도구화 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경쟁원리의 도입입니다. 좋은 말로는 흔히 동기부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체는 경쟁입니다. 즉 경쟁을 붙여서 교회에 대하여 목회자에 대하여 더 충성하고, 더 헌신하고, 더 복종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경쟁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사람들을 경쟁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나의 행위와 아무 상관없이, 나의 공로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사람들을 경쟁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경쟁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은 내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먹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서로 잘 지킬 수 있도록 경쟁을 붙이고, 그 경쟁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먼저 목표를 제시합니다. ‘천국 가야지. 복 받아야지. 상급 받아야지. 장로 되어야지. 권사 되어야지.’ 그러면서 경쟁을 붙입니다. ‘아무나 천국 가는 줄 알아? 아무나 복 받는 줄 알아? 아무나 상급 받는 줄 알아? 아무나 장로 되고, 아무나 권사 되는 줄 알아? 뭔가 보여 주어야지! 뭔가 행동을 해야지!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지! 남보다 나은 게 뭐 하나라도 있어야지!’ 예. 성도들을 무한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예.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성장한 배경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장했을지 모르지만 정작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원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죄 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보다 더 못한 곳으로 전락했습니다. 교회 안에 자랑과 교만이 넘치고, 교회 안에 시기와 질투가 넘칩니다. 천국이어야 할 교회가 지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안에 자랑과 교만이 넘치고, 시기와 질투가 넘칩니까? 모두가 경쟁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장로가 되었습니까? 경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뭔가 더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더 행했기 때문입니다. 뭔가 더 드렸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장로가 된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이룬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랑을 하게 되고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권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 되지 못했습니까?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왜 패배했습니까? 남보다 뭔가 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뭔가 덜 행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뭔가 덜 드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탓이 아니라 나보다 더 보여준, 나보다 더 행한, 나보다 더 드린 사람 탓을 합니다. 그러니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경쟁을 부추기고,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자랑과 교만에 빠지고,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에 빠집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요즘 TV를 보다 보면 눈에 띄는 공익광고 한 편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알파고와 세기의 바둑 대결을 펼친 바둑 천재 이세돌 구단이 출연하는 광고입니다. 이세돌 구단이 아주 독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 합니다. ‘포기하지 마라. 좌절하지 마라.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라. 저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저도 지는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대신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이어지는 멘트, 지나친 경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봅시다. 공익광고협의회.
예. 세상도 경쟁을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세상도 지나친 경쟁은 모두에게 해롭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경쟁을 부추겨서 교회와 목회자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교회는 교회대로 성도 수 경쟁을 벌이고 있고, 건물 경쟁을 벌이고 있고, 지교회 설립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차라리 어느 교회 목사가 설교를 잘 하는지, 어느 교회 목사가 성경을 잘 가르치는지, 어느 교회 성도가 성경을 더 많이 읽는지 경쟁하면 좋을 터인데 이런 경쟁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는 것입니다. 경쟁을 하는 일, 자랑을 하는 일, 교회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4.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이루고 자랑하기 위하여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으라고 하며 그들을 이용해 먹지만 자신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바울이 성도가 된 것이, 오늘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이, 오늘 바울이 의롭게 된 것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이루어 낸 것이라면 나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 성도가 되었다는 것보다,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되었다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것, 더 가치 있는 것이 없기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내가 부자인 것이 자랑이 아니어야 합니다. 내가 건강한 것이 자랑이 아니어야 합니다. 내가 출세한 것이 자랑이 아니어야 합니다. 내가 상식이 풍부한 것이 자랑이 아니어야 합니다. 남편이 잘 생기고 아내가 미인인 것이 자랑이 아니어야 합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 사람들은 말 할 것입니다. ‘그럼 뭔 재미로 살아요? 뭔 재미로 교회에 나가요? 뭔 재미로 사람을 만나요?’ 갑자기 공허해지고 갑자기 쓸쓸해 질 것입니다. 갑자기 식욕도 떨어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다 사라진 것처럼 적막해 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자랑만 하지 않아도 세상이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생각, 내가 자랑만 하지 않아도 세상 속 경쟁이 한층 더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만 가져도 다시 힘이 용솟음 칠 것이라고 믿습니다. 부디 그러실 수 있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와 부와 명예와 권세와 영광을 이루어내고 자랑하기 위하여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갈라디아서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예. 이 말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괄하는 말입니다.
‘할례, 아무 것도 아니야. 무할례 아무 것도 아니야. 받고 싶으면 받고, 받기 싫으면 받지 않아도 되는 거야. 중요한 것은 할례의 유무가 아니라 네가 이미 새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거야.’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너희가 이미 성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그것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면 결코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이 말을 한 후에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깁니다. 그 내용이 [갈라디아서 6:16-17],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6절,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규례는 지금까지 바울이 말한 원칙과 내용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는 원칙과 율법의 법조항을 지키며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율법에 담긴 사랑과 은혜의 원리를 삶 속에 구현하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잊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맺는 인사말도 당연히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라고 표현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갈라디아 성도들 너희들도 하나님께는 이스라엘과 똑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선민사상에 빠진 유대인들은 이방지역을 차별했습니다. 차별하면서도 또 할례는 받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로 멋진 표현 17절,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는 표현을 살펴보고 갈라디아서 강해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는 주인이 종에게 찍은 낙인을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낙인을 찍은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내용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긴 흔적일 것이라고 추측하곤 합니다. 즉 어디인가 부상을 당했는데 그 부상 부위를 예수의 흔적이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17절 앞부분과 연결하면 어떤 뜻이 됩니까? ‘이후로는 누구든지 할례 문제를 가지고 나를 괴롭히지 말라. 너희들이 할례 문제로 또 나를 괴롭히면 나는 또 안 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또 핍박을 당하고 부상을 당하면서 예수의 흔적을 갖게 되잖아.’라는 의미가 되어 버립니다. 바울이 과연 그런 의도로 예수의 흔적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의 흔적은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여쭈어 보겠습니다. 십자가 반지나 십자가 목걸이 말고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분, 계십니까? 계시면 손 한 번 번쩍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흔적을 어디에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흔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흔적의 내용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치밀하게, 얼마나 정교하게, 얼마나 멋들어지게 편지를 썼는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흔적이 무엇입니까? 그 흔적이 바로 할례의 흔적입니다. 그 할례의 흔적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할례의 흔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예수의 흔적, 즉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17절 앞의 내용과 연결해 보면 ‘이후로는 누구든지 할례 문제를 가지고 나를 괴롭히지 말라. 할례의 흔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쓸모없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예수의 흔적, 즉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2:28-2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라고 기록합니다. 육신에 하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할례가 중요한 것이고, 진짜 할례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할례를 하셨습니까, 하지 않으셨습니까? 할례를 하셨습니다. 언제 할례를 하셨습니까? 성령이 여러분께 임했을 때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여러분의 마음에 할례를 했다는 증표가 무엇입니까? 그 증표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한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로서,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성도로서 멋진 성도의 삶 살아가실 수 있는 우리 다누림교회의 가족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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