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제국들의 침략과 내부의 부정부패는 조선 민중들의 삶, 지식인들의 삶마저도 핍절하게 만들었다. 민중들은 조선 지도층의 변화나 개선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고 오직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묵시적 개벽을 바라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제는 지도층이나 하늘만 바라보고 살 수가 없게 되었다. 민중 스스로가 일어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경험한다.
1811년 홍경래의 난부터 1862년 진주민란과 1894년 동학농민운동까지 19세기 조선은 말 그대로 '민란의 시대'였다. 저자는 크고작은 봉기를 모두 꼽자면 3일에 한 번꼴로 농민 봉기가 조선땅에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이 고통스러운 시대에 지엽적으로 발생하던 민중의 외침과 저항은 마침내 동학교도들에 의해서 전국적이고 조직적으로 힘이 있고 뜻이 크고 민중과 생명에 토대한 개벽같은 운동으로 터져나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두레와 마을 공동체가 있었고 하늘 뜻을 공유하는 공부모임, 관계(포접)가 먼저 있었다.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만물을 창조하셨듯, 뜻과 관계가 있었고 그 관계 속에서 뜻을 이루려는 일상의 삶과 절박함이 만나 응축되다 터져나왔다.
토대와 뜻을 공유한 관계를, 사람을 만나고 준비해야한다. 뜻을 받아 일상의 삶에서 살아내는 마을 공동체들이 곳곳에 세워져야한다. 이 공동체들이 두례와 향약같은 생활양식을 이뤄가며 하늘 뜻 받아 수련하는 사람들이 세워져야한다.
사도행전에서도 하늘 영이 임할 수 있었던건 바로 뜻을 모아 기도하며 함께 살아가는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을 받아 그대로 살려하는 무리들 위에 영이 임한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 디모데와 여러 동역자들이 함께 이곳 저곳 다니며 복음과 함께 성령이 임했고 그 성령으로 충만해진 무리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낸다.
이런 공부를 하면서 4명의 간사들은 소망하며 간구하게 된다.
우선 작은 소망은 지금 공부하는 간사 4명에게 영이 임하기를 그 영 속에서 준비되어 사도행전처럼, 수운과 해월 선생처럼 사람들 만나며 그들에게 하늘 뜻 전하며 그들과 한 뜻 한 몸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부하게 된다.
이 모임이 4명의 작은 모임이지만, 크신 뜻 받아 이 뜻 이루려는 마음으로 모일 때 분명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일 것이고, 참 이스라엘들이 집결되어 개벽과 같은 대동사회와 소국과민의 시대를 먼저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먼저 살아갈 때, 세상이 우리로 하늘의 사람들임을 알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 1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