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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바다의 시집 『싱글』 서평
마녀의 언어가 여는 경계 너머
김남석(부경대 교수, 문학평론가)
1.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The Man Who Knew Infinity, 2015)>는 김바다의 시를 이해하는 데에 유효한 참조 사항이 될 듯 하다. 이 영화에는 수(數)를 직관으로 파악하고 수 체계의 비밀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 남자가 나온다. 그 남자의 이름은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여기서는 라마누잔으로 표기)으로 인도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일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 세계에서 거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수학자들도 할 수 없었던 수학에 대한 기발한 발상과 초 논리적 접근을 실현한 인물이다.
그-라마누잔의 능력을 알아본 수학자 ‘하디’ 교수(캐임브릿지 교수이자 왕립학회 회원)는 라마누잔을 캐임브릿지로 초청하여 공동 연구를 제안한다. 하지만 완고한 교수 집단은 라마누잔의 능력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라무누잔이 수를 파악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의 공식은 현란하고 기발하지만, 그 공식이 모든 상황에서 혹은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확인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서 라마누잔은 현대 과학과 철학의 중심 논제인 증명 혹은 객관화를 거치지 않고 직관으로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이에, 하디교수는 라마누잔에게 ‘(수학적) 증명’을 요구한다. 직감적으로 만들어놓은 함수, 중간 과정을 뛰어 넘은 공식,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수에 대한 이론을 누구나(사실 정말 ‘누구나’는 아니겠지만)가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 가능한 방식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에 라마누잔은 크게 반발한다. 그-라마누잔에게 자신의 공식과 정리는 증명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그는 수를 벗하고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인물이다. 마치 물고기처럼 그는 물이라는 수의 체계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숫자 그 자체로 진실이고, 자신은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그 진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다른 이들은 라마누잔이 보는 수의 비밀을 직감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대략 어렴풋하게 그렇다고 느낄 따름이었다.
2.
김바다의 시를 보면, 라마누잔이 수에 대해 드러냈던 직감을 상기하게 된다. 그녀의 시는 ‘마녀의 주술’처럼 기묘한 시어의 조합으로 가득 차 있곤 하다. 어느 시, 어느 장을 열어도 그녀의 시구 조합은 기발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이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김바다의 시를 이루는 재료는 분명 일상어이지만, 그러한 일상어는 기묘한 이탈과 비틀림을 형성하면서 초 논리의 언어로 변질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적 월경(越境)은 대체로 관용적인 시의 문법에서도 한참 벗어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녀의 시를 대하는 범인(凡人)들은 예외 없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곤 한다. 시구의 기발함이나 연상 조합의 현란함을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들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문장 단위나 연 단위의 의미 맥락이 좀처럼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이러한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의미 맥락의 연결을 포기하는 것이다. 관광이나 여행을 나설 때 모든 과정과 경로를 연결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은 의외로 소수이다. 시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부분적으로 보이는 찬란한 문구와 그에 대한 해석적 열광으로도 시를 읽는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다른 하나의 길은 시 전체를 연결하려는 의미 맥락을 캐내는 일이다. 이 작업은 쉽지 않다. 모든 시가 쉽지 않지만, 주술의 언어처럼 보이는 김바다의 시에서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죽은 자의 그림자를 잘라낸다
너무 뜨거워서 손바닥을 데인다
먼 나라로부터 떠나던 낙타의 묵묵한 발걸음을 잊어버린다
한 순간 터져 나오던 외마디 비명을 잊어버린다
나의 그림자는 그의 그림자로 두꺼워진다
아는 것은 점점 모르게 되고
울지 않는 무례한 사람이 된다
그림자가 없는 자는 쉽게 증발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발목으로
출구를 마련해주기 위해
한때 벽이었던 바닥을 일으켜 세운다
그림자는 뒤집어지며 뒤는 앞자리를 차지한다
뒤는 앞과 닮아있다
고 주장해야 한다 영원히
남편과 아내로 죽을 사람들의 목소리로
신분에 맞지 않게 가위질을 계속된다
너와 나의 구별이 가장 힘들어지면
누가 무슨 짓을 할 수 없을지
아무도 모른다
불가능에 대한 책임을 조각할
더 많은 관객이 필요하다
더 많은 그림자가 필요하다
하루 종일
빈집을 보는 어린아이같이
몸을 숨기고 환한 바깥을 훔쳐본다
저 그림자는 언제부터 땀을 흘리고 있다
―<타동사의 시간> 전문
이 시는 아무래도 죽음을 목도하는 자리에서 쓰여 진 것 같다. ‘죽은 자’(김바다의 시는 죽음에 대한 통찰을 다루는 경우가 많고, 특히 『싱글』의 1장은 죽음의 시편으로 가득하다는 측면에서 죽음은 그녀의 주요 관찰 제제 중 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시구는 관(아무래도 입관)과, 출상, 혹은 매장 등의 순서를 연상시키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과정을 ‘관객’처럼 지켜보는데,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그림자가 소멸하고 한 사람이 사라지는’ 일련의 연관성이다.
시인은 죽음을, ‘그림자를 잘라내는(떼어내는) 작업’으로 파악했다. 탁월한 비유이다. 죽은 사람은 그림자를 남길 수 없다. 특히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그 사람은 먼 나라로 헤매야 하는 낙타의 고통(묵묵한 발걸음으로 남은 여정을 이어가야 하는)도 덤으로 잊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특혜이다. 대신 남은 자가 죽은 자의 고통과 삶을 이어받아야 한다(남은 자는 ‘관객’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죽은 자의 무게는 전해지는데, 그 무게를 시인은 ‘그림자’로 파악했다. 그래서 지켜보는 ‘자신’의 그림자가 ‘그-죽은 자’의 무게로 ‘두꺼워진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그 만큼 무거워지고, 그 만큼 짐 진 것이 많아진다는 뜻일 것이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 그러니까 죽은 그림자가 바닥이 아닌 일으켜 세워진 벽(관?)을 통해 사라지는 시점은―시의 전언대로만 한다면―‘너와 나의 구별이 힘들어지’는 시점이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확신이 무너지는 지점이다. 그것도 가장 힘들어지는 순간인대, 이 ‘가장’이라는 단어가 김바다의 시에서 즐겨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쓰인다는 사실을 참조하면, 이 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순간이 여기라고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 혹은 남편과 아내라는 본질적인 구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죽은 자의 무게를 입게 되는 순간, 그녀는 마녀가 되고, 그림자의 원래 주인이 가져야 했던 세상에 대한 구별을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된다. 그녀는 마치 영매자처럼 그-죽은 자의 말과 눈을 이어받은 전달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시는 죽은 자가 선물한 세상에 대한 관찰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의 마지막 두 연은 사실 오싹한 인상도 남기고 있다. 시인은 그림자 혹은 그림자를 뒤집어 쓴 누군가―혹은 그림자를 잃은 누군가일 수도 있겠지만―가 세상의 모퉁이에 숨어 환한 바깥을 훔쳐본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그림자(편의상 칭하면)는 어두운 곳에 있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빈집을 보는 어린아이라는 표현에서, 그림자가 있는 곳은 적막하다는 암시를 강하게 남기고 있다. 이러한 그림자가 있을 곳은 어디일까. 아무도 없는 곳이지만, 분명 세상의 어느 지점에서 환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거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이 빈집 혹은 어두운 곳은 어디여야 할까. 그리고 시인은 과연 그 곳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가장 이해하기 쉬운 시를 사례로 골랐지만, 이 시 역시 직감으로 다가가야 더욱 분명한 시구와 구절 그리고 의미의 맥락이 여전히 남아 있다.
3.
이번에는 한층 난해한 시를 골라보자. 이 글의 제명과 관련이 깊은 시이기도 해서, 유난히 영감을 주는 시이다.
검은 고양이 젖을 먹고 자란다
귀가 뾰족하고 밤에는 찬란한 것
그 밖의 별의 조건은?
물어보려면 낮이 와야 했다
달동네 꼭대기에 마녀가 심은 나무가
아직 자라고 있었다
믿는 사람의 귀를 찾아오는 말은
혼자 태어난다
공사가 중단된 성전 때문에 매번
뒷산과 하늘이 들쑥날쑥했다
놀이를 잊은 입술이야
잘게 손톱으로 뜯어내면
죽어가던 박쥐들이 날개를 퍼덕거렸다
어디든 여기가 아닌 곳으로
그들은 사라졌다
작은 엄지와 검지로
털을 곧추 세운 하늘을 구부리면
하늘보다 큰 그림자가 휙 스쳐갔다
분명,
새였지만 새가 아닌 것 같았다
―<넬라 판타지아>_
<넬라 판타지아>라는 제명이 붙은 이 시에는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각주가 첨가되어 있다. 시인은 이 시의 제명을 엔리로 모리꼬네의 원작 기악곡에서 취했다고 부연 설명으로 보인다. 본래 엔리오 모리꼬네는 영화 <미션(The Mission)>의 삽입곡으로 ‘가브리엘 오보에(Gabriel's Oboe)’를 작곡했고(처음에는 기악곡이었다), 이 곡에 발한 사라 브라이트만이 가사를 붙여 <넬라 판타지아>라는 노래로 일종의 편곡을 단행했다. <넬라 판타지아>는 발표 즉시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사라 브라이트만이 이 곡을 얻는 과정이 알려지면서 감동은 더욱 커졌다.
처음 사라 브라이트만의 요구에 엔리오 모리꼬네는 곡을 내주기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계속되는 사라 브라이트먼의 성의(2개월 한 번씩 편지를 보내는 성의를 보였고 이에 엔리오 모리꼬네가 감동했다는 사연)에 그만 곡의 사용을 허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라 브라이트만이 이 곡에 대한 열정과 확신은 대단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렇게 탄생했기에, <넬라 판타지아>는 환상적인 선율과 함께 의미심장한 가사로도 주목받기에 충분하다.
나의 환상 속에서 난 올바른 세상이 보입니다
그 곳에선 누구나 평화롭고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 곳
나의 환상 속에서 난 밝은 세상이 보입니다
그 곳은 밤에도 어둡지 않습니다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나의 환상 속에서 따뜻한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은 친구처럼 도시로 불어옵니다
난 영혼이 늘 자유롭기를 꿈꿉니다
저기 떠다니는 구름처럼요
영혼 깊이 인간애 가득한 그 곳
―<넬라 판타지아>(한국어 번역은 위키백과에서 옮겨왔다).
<넬라 판타지아>는 김바다의 시 <넬라 판타지아>를 풀 수 있는―그러니까 그녀가 직감과 직관으로 그려낸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거의 유일한 통로가 아닐까 싶다. 이 노래의 가사는 밝고 맑고 깨끗한 영혼이 숨 쉬는 어떤 세상을 그리고 있다. 비록 환상 속으로 잠입했을 때 그러하다는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이 노래는 인간의 영혼 깊숙이 감추어진 그러한 세상을 소망한다고 해야 하는데, 그 세상은 사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과는 현격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반면 김바다의 시 <넬라 판타지아>는 실제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과 더욱 유사하다. 달동네가 존재하고, 공사로 어지러운 하늘이 보이고(맑은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아니고), 그들(아마도 이 땅의 거주자들)이 사라지는 곳이다. 그곳에는 죽어가는 박쥐도 있고, 젖을 먹는 검은 고양이도 있으며, 새이지만 새가 아닌 공포로 포착되는 존재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음산하기도 하고, 불길하기도 한 모습이며, 섬찟한 인상도 남기고 있다.
당연히 노래 <넬라 판타지아>가 그리는 세상과는 격차가 상당하며, 분위기만으로도 이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시인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시인은 “믿는 사람의 귀를 찾아오는 말은/혼자 태어난다”고 당당히 외치고 있으며 그 말을 깊게 신봉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믿는 세상의 중요한 말들은 외롭게 태어나서,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뜻으로 여겨지는데, 자신이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말이 세상에 분명 존재하며, 그 말이 언젠가는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으로 비쳐진다.
이러한 시인의 언질을 과연 우리도 함께 믿을 수 있을까. 그녀는 믿을 수만 있다면, ‘고양이’, ‘박쥐’, ‘큰 그림자’, 그리고 ‘어지러운 하늘’과 ‘그들이 사라진 세상도’ 별 것이 아니며, 결국에는 새가 새가 아니듯 이질감은 공포가 아니라고, 모든 것이 괜찮아 질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을 과연 허언이나 광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시는 해석되는 구절보다 해석되지 않는 구절이 더욱 많고, 전체적인 의미 맥락은 좀처럼 체계화되지 않는다. 시가 풍기는 전체적인 음울한 인상 너머에, 그녀가 믿는 무언가가 강력하게 도사리고 있고, 그 무언가는 검은 새의 그림자처럼 아주 잠시 시의 표면을 뚫고 나와 ‘휙 스쳐가’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차라리 순간적이 이미지에 가까우며, 아주 미약한 징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녀가 그리는 세상은 음산하지만, <넬라 판타지아>처럼 현실 너머에 자유로운 영혼과 밝은 세상 그리고 희망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채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이 시를 읽는 사람일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다만 시의 어느 구절처럼, 마녀가 심은 나무가 계속 자라, 결국에는 이 시 속의 세상이 위엄과 영광과 비의(秘意)로 풍성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 이전까지는 완전히 해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의미와 비밀 사이를 거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김바다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하디 교수가 라마누잔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직감으로는 안 돼. 발견한 모든 것은 증명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이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해.” 이 말은 비단 <무한대를 본 남자>에서 라마누잔에게만 속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냥 알고 있다는 대답만으로는 다른 이들(적대적인 타자)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문학의 용어로 하면, 공감을 확보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디 교수가 라마누잔에게 요구했던 것은 사실 문명이나 문화가 인간을 길들이는 하나의 방식이었고, 범인이 직감과 직관으로 다가갈 수 없는 신비와 실체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자신의 무지를 옹호하는 편의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증명하고 분석하고 또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심지어는 타인이나 나 바깥의 현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러한 과정에서 예외일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라마누잔은 이러한 과정에 혼란스러워한다. 별빛이 그 자체로 별빛이고, 고양이가 그 자체로 고양이이듯, 수의 진실은 그 자체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김바다 식으로 하면, 말은 말이고 하늘은 하늘이며 영혼은 영혼이다. 그것이 어떠한 말이고 어떠한 하늘이고 어떠한 영혼인가를 시 외의 직관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도 말하는 듯 하다.
그래서 가끔은 김바다의 시를 보면서, 시는 보다 정련되어야 하고 더욱 보편적인 해석을 투여할 수 있는 여지를 함축해야 한다는 일반론적 조언을 하기가 주저된다. 그녀의 언어는 마녀의 주문처럼, 분명 우리의 일상어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상에 의해 조직되어 있지만, 설명이나 증명 같은 자질구레한 절차를 피해 직관으로 존재의 맥락과 비밀에 침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본래 언어는 그러했고, 또 그러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문명과 문화의 힘은 이를 평상과 보편의 언어로 가라앉혔고, 그 결과 현대의 시가 다시 그 시기의 언어를 복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김바다의 시는 그 복구의 최일선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바다의 시는 시가 시여야 하는 이유, 혹은 시가 어느 정도 시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 경계를 지금의 시 판도(문단)에서 저만큼 밀어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시는 분명 혁신적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초 문제는 경계를 확장하고 말의 실험을 상기시키고 난 이후에 남는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인데, 이러한 실험과 확장이 본질에 접근하는 직관의 언어를 활성화시키지만, 이와 함께 확장되고 실험되어야 할 의미의 공허를 어떻게 해소하고 그 여백에 어떠한 맥락을 들여놓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마녀는 걱정하지 않는다. 주문의 언어가 온전히 해석되기를 바라는 마녀는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은 요구할 것이다. 그 비밀의 일단을 엿보기 위해서라도. 그때 시가 그 비밀의 일단을 열어주는 힘도 함께 남겨놓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직관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5.
위의 논리대로 하면, 시는 본래 주술의 언어였지만, 현대로 들어서면서 그러한 주술성보다는 사유의 확장과 감정의 심화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시가 필요한 이유는 경직된 언어가 닿을 수 없는 사물과 세상의 외곽(모퉁이)에, 정서와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데에 있다(빈집에서 세상을 엿보는 아이처럼). 시는 이러한 가능성의 확장 이외에도 중요한 목적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 여기서는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기로 하자.
앞에서 읽은 <넬라 판타지아>는 우리 앞에 놓인 희망 찬 세상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힌트를 준다. 그 첫 번째 힌트는 영화 <미션>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전 세계의 많은 영화팬이 이 영화에 열광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할 일을 찾는 숭고한 인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물의 영혼을 드러내는 듯한 엔리오 모리꼬네의 삽입곡은 또 하나의 힌트가 될 듯하다. 영화와 음악은 보는 이들의 편견을 넓혔고 인간사의 중요한 지표를 확장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라 브라이트먼은 이를 자신의 노래로, 그것도 상당한 신념을 투여해야만 탄생시킬 수 있는 노래로 바꾸었다. 역시 이 노래에 감동한 전 세계의 인구는 그녀의 <넬라 판타지아>를 지금도 열심히 부르고 있다. 김바다의 시는 이러한 의미상의 맥락에 저끝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 중이다. 그녀의 이 시가 세상을 휩쓰는 열기를 현재 가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언어로 그녀가 바라보고 들었던 세상을 다시 확장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시는 세상의 확장과 심화라는 이 문화적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이 시에 대한 완전한 접근일 것이다. 실제로 이 시는 그 일단만 드러내 보일 뿐, 그 궁극적인 의미는 좀처럼 해석되지 않는 형편이다. 마찬가지로,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지금-이곳’에서 멈추는 일이다. 사실 세상에 시인들이 기존의 문화(사)적 창조물을 재창조하는 경우는 흔하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유독 이 시만 깊게 읽기를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다. 그 길은 이러한 문화사적 맥락의 심부(深部)에 닿을 수 없는 언어로 드리운 한 줄기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마녀가 심은 나무처럼, 김바다의 언어는 온통 이해하기 쉬웠던 세상의 모습을 흐트러뜨렸지만, 다행히도 그 한 가운데에 ‘믿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아주 불가능한 동행은 아닐 것이다.
‘믿는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말’은 무엇일까. 이 말의 정체는 이 글의 논조대로 하면 마녀의 주문일 것이고, <무한대를 본 남자>의 숨겨진 전언대로 하면 직관에 의존하는 지적 탐사자의 발견일 것이며,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김바다의 신앙대로 하면 신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시의 언어이고 시가 존재해야 할 어떠한 명분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세상의 황폐화에 놀라 사라지고, 더 이상 세상이 정화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버려 동화 속의 마을처럼 퇴락했지만, 그 안에 ‘말’이 있고 그 ‘말’이 자랄 나무가 있다면, 환상처럼 그리고 시처럼 세상에 다른 비의를 구경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무한대를 볼 수 있거나 미립자의 세계를 보거나 오래 전에 멸종된 공룡의 세계를 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남은 존재의 희미한 자취를 영감으로, 직관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열정과 무모함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허락받은 자들이다. 김바다도 비슷하다. 김바다는 직관과 주술의 언어로 이를 보려고 하는 자이기에, 그녀가 풀어놓은(묘사한) 세상은 그래서 마녀가 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는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주술 같은 언어가 시의 언어를 확장하는 것도, 그 언어를 주목해서 관찰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