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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서양 문명
| 일본 근대화의 주춧돌이 된 명치유신, 107명의 이와쿠라 사절단은 무엇을 보고 돌아왔는가? 습지의 늪에 빠져든 거제, 우리의 갈길은 무었인가? 이 책을 읽어보시고 거제의 미래를 한번 생각 해 보시길??? |
〈 메이지 유신과 서양 문명 〉 - 이와쿠라 사절단은 무엇을 보았는가
다나카 아키라 지음 현명철 옮김 소화 2006. 6. 30 초판1쇄 205쪽
■■■ 여기 실린 모든 내용은 저작권 침해의사가 없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수뇌부. 좌로부터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야마구치 마스카(山口尙芳),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Ⅰ. 메이지 유신과 『미구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
메이지 유신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있는 일본이 근대국가로 변모한 일대 변혁, 즉 혁명이었다. 이 혁명은 막부 말기의 구로후네(黑船, 페리 제독이 이끈 미 함대)의 도항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는 과정과 메이지 이후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이라는 두 프로세스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외적인 개국이 내적인 개국으로 전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적인 개국, 즉 구미의 근대문명 · 문화를 일본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메이지 4년(1871)에 국가적 사명을 띠고 요코하마(橫浜)항을 떠나서 약 2년간 미국과 유럽을 시찰한 이외쿠라(岩倉) 사절단과 그 공적 보고서 『특명전권대사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米歐回覽實記)를 통하여 주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과제이다. (p5)
이 이와쿠라 사절단은 워싱턴에 도착하자, 의회를 방문하고 하원의장의 환영 대표연설을 받았다. 의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서쪽으로 향한 ‘정복과 약탈을 꿈꾸었던 우리들의 진로’가 ’일본에서 동으로 향한 역류’와 맞닥뜨렸다. 그 흐름은 ’전리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빛나는 평화의 승리를 구한 것’ 이었다. 이 두 흐름이 ‘적절한 때를 만나서 위대한 태평양 연안에서 합류한 것’ 이다.
여기에 대해 전권대사 이와쿠라는, 답사에서 사절단으로서의 자신들의 여행(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조사를 행하는)이 끝났을 때에, 일본은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으리라 명심하면서 지식의 보물을 모을 것이라고 말하고, 나아가 다음과 같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일본 정부는 자국 및 모든 국가에 대해 문명개화 정책을 취해야 하는 중요성을 이미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으며, 귀국하여서는 사절단에 대해 지금까지 보여 준 관대한 귀국의 우정을 일본 국민들에게 우리 사절단 모두의 이름으로 알리게 될 것입니가(「국회의 일본인」 1872년 3월 7일자 『뉴욕 타임스』, 『외국 신문에 보이는 일본』 제1권, 마이니치 코뮤니케이션즈, 1989년).
여기에는 서양 문명과의 접점에 선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표와 사명감이 표명되어 있다. (p17~18)
이와쿠라 사절단의 진용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자. 일행에는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가 특명전권대사로, 부사로서는 참의 기도 다카요시, 대장경 오쿠보 도시미치, 공부대보 이토 히로부미, 외무소보 야마구치 마스카가 참가하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서기관으로는 막부 출신자가 많았음도 언급하였다. 각 성에서 파견한 이사관 밑에는 몇 명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가 팀을 이루고 있었다. 요코하마 출항시 인원수는 46명이었다(동시에 발령을 받은 또 한 사람은 미국에서 현지 참가함).
그러므로 사절단은 메이지 유신 실력자를 포함한 수뇌부와 실무진으로 구성되었으며 막부 출신의 서기관과 막부 타도파의 사람들이 혼재된 오월동주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집단은 막번 체제 하의 문화 축적과 새로운 근대국가 창출 의욕이 결합된 사명감에 넘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특징이 다음에 서술하는 『미구회람실기』로 결실을 맺게 된다.
나아가 사절단에는 수뇌부의 종자 18명, 전 다이묘(大名) 출신자나 다채로운 인재가 포함된 유학생 43명(그 중 5인은 여자 유학생)이 동행하였다. 이러한 동행자를 포함하면 총수는 107명이었다.
사절단 정식 구성원은 미국에 들어서자 몇 개의 조사팀으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귀국 시기에는 차이가 있으며, 이와쿠라의 본대는 1년 10개월 동안 서양 12개국(당초 예정은 10개월에 14개국)을 회람하였다. 다만 유수(留守) 정부로부터의 요청이 있어서 기도와 오쿠보는 도중에 귀국하였다.
이 이와쿠라 사절단의 공식적이고 공약수적인 보고서가 전 100권으로 구성된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特命全權大使 米歐回覽實記)인 것이다. 이 책은 대사를 수행하였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가 편수하고 메이지 11년 10월 태정관 기록부에서 간행하였다. (p18~19)
간단히 연구사를 살펴보면, 이와쿠라 사절단이 새롭게 인식된 것은 1920년대 중반이었다. 당초는 사절단의 개략이나 유신경제사에서 그 의미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연구는 이후 외교사 연구로 방향이 바뀌었고 이러한 경향은 전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절단의 큰 목적의 하나인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이 실패하였다는 사실에서 사절단에 대한 평가는 결코 높은 것이 아니었다. 또 『실기』가 외교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존재조차 사람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잊혀지게 되었다.
더욱이 『실기』의 영향이 약해진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도 있었다.
하나는 『실기』에는 일본 근대국가 창출을 위한 선택 길이 서술되어 있다. 거기에는 대국은 물론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등 당시 유럽의 소국에 대해서도 누누이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일본의 현실은 대국에의 길, 말하자면 아시아에서의 프로이센으로의 길이 선택되었다.
그리하여 1880년대 초에는 ‘탈아입구’ (服亞入歐)라는 방향으로 달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아시아를 버림으로 말미임아 『실기』의 제언도 무시되었다. 즉 『실기』는 메이지 정부에게 환영받지 못한 보고서였다. 『실기』가 ‘태정관(太政官) 기록부 간행’이라는 공식적인 형식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24~25)
Ⅱ. 서양 문명과의 만남
외국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메이지 일본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남녀간의 풍속이었다. <중략>
다른 문화와 접촉하는 인간 사회의 이해는 우선 이러한 일부터 시작한다고 말해도 좋다. 거기에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사회의 모순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p30~37)
일행은 가는 곳곳에서 거대한 고층 건물에 눈을 빼앗겼다. 뉴욕 월 가의 증권거래소는 길이 120칸(약 218미터), 폭 25칸(약 45.5미터)으로 높이는 77피트(약 23.5미터)이다. 건축구조물의 꼭대기까지는 높이 124척(약 37.8미터)이다. 그 건축물의 건축비는 지대를 합하여 180만 달러로 15년 전에 완성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一, 340~341). 목조건물에 익숙한 눈에 기하학적인 입체구조로 솟아있는 거대한 건축 공간은 이상한 세계로 보였던 것이다. (p40)
이 거대한 건축공간에 둘러싸여 벌어지는 일상생활과 소비, 그에 따르는 대량생산, 노동력과 자본, 여기에서 생겨나는 이익 등 자본주의의 틀을 일행이 어떻게 읽어 내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p41~42)
구미 여러 도시의 기반정비에 눈을 돌려 보자.
산업기반시설(인프라)은 사회적 생산기반을 말하며, 생활 활동을 지탱하는 기초적 설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도로 · 철도 · 항만 · 상하수도 · 전기 등 경제활동에 불가결한 사회지본을 말하며, 학교 · 공원 혹은 통신회선의 정비 등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인프라로서 전기 · 가스 · 상하수도 등은 라이프 라인(생명선)이라고도 한다.
도시에서 이 생명선을 정비히는 수순에 대해 『실기』는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집을 세우기 전에 우선 이 생명선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 전제임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지방관이 이 도시 조성에 있어서 도로 등의 인프라 정비가 중요하다는 사질을 우선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도로가 불편하여 사람들이 다시금 흩어진다” 라고 하였다(一, 102).
도시의 상수도에 대해서는 어떠하였을까.
그것은 일단 상수원을 만들고 여기에서 관을 빼 시가에 나누어 흘려보낸다. 이는 가스를 큰 관에 저장하였다가 내보내는 것과 같다(一, 328).
이 상수는 깨끗해야 하기 때문에 수원을 검토하고 원거리에서 끌어오든가, 우물을 파서 끌어 올려 여과시킨 후 각가 정으로 보내든가 해야 하며, 물은 감미롭고 독성이나 오염물질이 없어서 모든 도시 인민이 마신다(一, 175. 一, 365).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도시의 상수를 퍼올리는 거대한 기관실을 견학하였다. 그것은 레만 호의 하구를 차단하여 여기에 건물을 세우고 수차를 설치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일상의 먹고 마시는 것에 가능한 한 편리를 도모하고, 그 좋음을 얻기 위해서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五, 102).
말하자면 거기에 인프라 정비의 기본자세가 있음을 배운 것이었다.
하수도는 어떠하였는가. 일행은 런던과 파리에서 이를 견학하고 있다. 파리의 히수도는 ‘장관 중의 하나’ 였다(三, 107). 이 하수도는 지하 8미터에 위치하며 대 · 중 · 소 하수구가 있었다. 그것은 많은 지류로 나뉘어 있고 각 가정에서 나온 하수는 우선 소하수구에 들어온다.
중하수구의 폭은 1미터 반, 깊이는 1.2미터, 양측에는 인도가 있다.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어서 주위는 커다란 활 모양의 동굴이다. 높이는 신장의 1.5배, 벽에는 상수관이나 전선이 매달려 있었다. 대하수구에는 하수가 모여든다. 폭은 약 3.3미터, 깊이는 중하수구와 같았다. 여기에는 항상 인부 520명이 쓰레기를 긁어내고 있었다.
일행은 인력거를 타고 견학하였고, 대하수구에서는 배를 타고 터널 속을 실제로 견학하였다. 이 하수도는 분뇨 냄새가 나지 않았으나, 악취는 심하였다. 터널을 나왔을 때에는 “모든 사람의 피부에 혈색이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하수도는 1850년, 나폴레옹 3세가 생각해 내어 7,500만 프랑을 들여 만들어졌다고 한다(三, 107~109). 또 런던의 하수구에 대한 기록도 二, 375~396 및 三, 110 등에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러한 인프라 정비, 파리의 하수도 설비 등은 런던이나 파리와 비슷한 100만 명의 인구를 갖는 도시 도쿄(東京)의 당시 상황과 비교해 보면, 엄청난 지하 입체공간이었다. “파리의 장관 중의 하나였다“(三, 107)는 말에 이 느낌이 담겨 있다.
이 인프라 정비에 대한 고찰이 사절단 귀국 후 일본의 도시 정책에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이 견문이나 통찰이 일본의 근대화에 적용 · 실행되지 못하였음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前後)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도시 정책의 빈약함을 보여 주는 근원의 하나가 되었다. (p43~46)
철도 건설의 방법에 대해 『실기』는 다음 세 가지로 정러한다. 제1은 관영, 제2는 민영, 제3은 관이 만들고 민영으로 이관하는 것이다. 제1의 방법은 벨기에, 제2의 방법은 영국 · 프랑스 · 미국 등에서 주로 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제1에서 제3까지의 방법이 혼용되고 있다. 제1의 관영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병졸이나 죄수 등도 시용할 수 있으며, 정부 관리 중에 숙련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스스로 성공하려는 의지가 약하고 나이 많은 사람이 많고 품위를 고수하려고 하므로 진보 분려의 책이 부족하다”라고, 그 결점을 말하고 있다.
제2의 민영에 대해서는,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여 깊이 생각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서 직무에 정진하며 점차 좋은 방법을 찾아내 사업을 진행하지만, 회사에 이익이 없는 노선은 만들지 않고 이익이 큰 노선에만 힘을 기울이므로정부의 지시대로 따르지 않는다. 이는 일단 전쟁이 일어난 경우에도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고 정부의 편의를 생각하지 않을 터이니, 군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가 노선을 소유하는 것이 최상이다.
라는 것이다.
일장일단이 있으나, 공사는 회사에 맡기는 편이 경제적으로도 좋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은 ’국민의 경황’ 과 ’노선의 형편’ 에 따라서 적당히 판단해야 한다(三, 170~172).
이 제언이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역사가 말해 준다. 아시아태평양 전쟁까지는 국유 철도 우선의 경향이 강하였고, 전쟁 후에는 민영화로 겨우 변화하였다. 이는 ‘국민의 경황’ 이나 ‘노선의 형편’ 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전쟁 전에는 군사력 중심의 국가건설이 우선시되었으며 전후에는정치적 · 경제석 이유가 우선시되었다는 점에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50~51)
운하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수에즈 운하일 것이다. 수에즈 운하는 1869년 개통되었다. 그로부터 4년 후 사절단은 여기를 통과하여 귀국하였다. 이 운하를 개통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프랑스인 기술자 레셉스(1805~1894)였다. 『실기』는 그에게 큰 찬사를 보내며, 오랜 고생을 통해 “참으로 드문 대위업을 이루었다“ 고 한다(五, 256).
1859년부터 만 10년, 당시 길이 16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난공사는, 도중에 비난을 받고 한때는 불가능하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레셉스는 굴복하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위대한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비상한 인내와 강력한 정신이 없으면 그 업을 이룰 수 없다(五, 259).
나아가 “이 일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뜻을 세운” 레셉스의 담력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라고도 하였다(五장).
19세기 1870년대의 기술이나 산업의 발달에 따른 지구 규모의 공간의 확대를 『실기』는 여러 각도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한 문명 · 문화를 가져오는 것은, 결국 인간이며 인간의 강인한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이다.
『실기』의 이러한 기술은 서양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속에서, 문명 그리고 문화란 인간의 창조 정신이 만들어 내고, 강렬한 인내력과 지속력으로 유지시키는 것임을 찾아내고자 하는 듯하다. (p53~54)
Ⅲ. 정치와 교육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계획 중 만들어진 두 통의 ‘사유서’ 중 하나에는, 각 성에서 파견되어 온 이사관과 기술 관료가 시찰할 각 분야의 과제가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제도 · 법률 이론과 실제를 연구할 필요성이 주장되고 있으며, 의회를 비롯하여 외국사무국, 재판소, 회계국 등이 구체적인 대상으로 열거되고 있다. (p56)
『실기』의 표현으로는, 미국은 유럽에서 가장 ‘자주 자치 정신이 뛰어난 사람’ 들이 모여서 건국한 나라이므로, 순수한 공화국 인민의 나라이며 삼척동자도 임금을 섬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사절단 일행이 위화감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日, 208).
그 때문인지, 의회제도에 대한 비판도 엄격하여 이렇게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국은 영국과는 달리 각 주의 대표와 인민의 대표로 이루어지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다(二, 83). 그러나 이들 의원은 반드시 최상의 인물은 아니다. 또 뛰어난 식견이 대세를 점하는 것도 아니다.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 상책보다는 하책이 선택될 경우가 많다. 그리고 기초된 원안에 이의가 있어도 십중팔구는 원안내로 통과된다. 그 사이에 뇌물이나 흥정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그것이 공화정치의 부족함’ 이다(一, 209). (p57)
사절단은 러시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를 방문하여 제정 러시아의 귀족전제 정치에 놀라고 그때까지 영국 · 프랑스 이상으로 이 나라를 두려워하였던 선입관과 실태와 그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다. 이는 제정 전제정치 하에서는 지방의회도 없고, 가난한 인민(‘농노’)은 미개한 상태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실기』는, 선입관으로 이 나라를 보았다는 반성과 함께 그것이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였다고 통감하고 있다. “종래 망상 허영의 논의는 배척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식자가 바라는 바이다” 라고, 러시아 시찰 보고를 매듭짓고 있다(四, 110).
이는 그때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던 실정, 즉 제도와 정치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관과 현지에서 바라본 실제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깨닫고 난 후에 얻은 교훈이었다.
이러한 것은 작은 여러 나라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다. (p62~63)
여기에서는, 약육강식의 유럽의 국제정치 속에서 소국에는 안으로는 자주 독립의 기개가 넘치고, 밖으로는 거국적으로 타국의 침략을 막는 거국체제가 있다고 강조하는 『실기』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일본이 소국이었기 때문인지 소국에 대한 이 서술은, 그 애국심 교육을 포함하여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는 일본에게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국을 목표로 하는 선택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의 근대화는 소국의 길이 아니라 오로지 대국의 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p67~68)
이와쿠라 사절단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1872년 12월 16일이었다. 파리 코뭔이 붕괴하고 1년 반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영국에서 일행은 개선문 가까이에 있는 옛 터키 대사관을 숙사로 정하였다. 그곳은 조망이 좋았다. 이때는 시가전의 상흔은 지워져 있었다. 다만 개선문만이 수리 중이었다. 코뭔군이 이 문 위에 대포를 설치하고 정부군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정부군의 반격으로 일부가 부서졌던 것이다(三, 41 ~43).
『실기』는, 파리 코뭔이 일어난 이유를 프랑스 국제(國制)의 유동성과 소당 분립에 의한 정치 격동성에 있다고 본다. 파리 코뭔은 정부에 저항하는 ‘민당의 반란’ (三, 43)이며, ‘적도’ (三, 66)라고 한다. 그리하여 파리 코뭔은 보불전쟁(1870~1871)에서 프러시아군에 의한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주었다고 보고 있다(三, 141). 이렇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사이온지(四園寺)의 태도와 상통한다. (p69~70)
그런데 개선문이나 천문대 등 파리 곳곳에 남겨진 파리 코뭔의 흔적을 본 일행은 거기서 근대국가의 새로운 모순을 읽고 있다.
문명국에서도 중등 이하 인민들은 어리석고 완고하며 사나움을 면하지 못한다. 서양 각국이 상하 모두 통하는 미풍양속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은, 또한 큰 오류이다(三, 141).
유럽 근대국가는 위로부터 아래 계층에 이르기까지 질서가 있고 멋있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중등 이하의 인민은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또한 난폭하여 통제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이다. 중 · 하층 인민에 대해 사절단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일본에 귀국한 후, 메이지 10년대에 일어나는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정부의 눈과 일치하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p71)
에리히 아이크는 비스마르크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하면서, “비스마르크는 독일 국민 대다수가 갈망하는 민족적 실현자이며, 정치면에서 전 국민의 주목을 한 몸에 모으는 인물이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 제국은 1871년 1월 18일에 성립하였다. 일본에서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단행하기 6개월 전이다.
비스마르크는 1815년 융커(독일 엘베강 동쪽에 많이 존재하였던 대지주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나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사법관과 행정관을 역임하고 일시 군에 적을 두기도 하였으나, 부친 사후에는 자신의 영지를 경영하는 데에 종사하였다. 1847년 33세로 프러시아 연합 지방의회의 회원이 되고 이윽고 프랑스 주재 공사, 러시아 주재 공사가 되었다. 1861년 빌헬름 1세(1797~1888)가 즉위하자 다음해 다시금 프랑스 주재 공사로 임명되었다. 나라의 국력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제무대에서 그는 현실 정치가로 권모술수를 점차 몸에 익혔던 것이다.
1862년 비스마르크는 재상이 되었다. 그때의 그는 이미 융커 출신의 단순한 지방귀족은 아니었다. 그는 독일의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국왕을 보좌한 비스마르크는, 1864년 덴마크를 격파하고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마저 격파하여 7주 만에 전쟁을 끝내었다. 나아가 1871년에는 보불전쟁에 승리하여 프랑스로부터 알자스 로렌 지방을 할양받았으며, 앞서 언급한 거액의 보상금을 받게 되었다. “비스마르크의 위명은 세계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라고 『실기』는 기록하고 있다(三, 329).
1873년 3월 9일 베를린에 들어간 이와쿠라 사절단은 11일 빌헬름 1세를 알현하고, 다음날 비스마르크와 참모총장 몰트케를 만나 회견하였다. 그리고 사절단 일행은 15일 비스마르크가 초청한 만찬에 임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시절단 멤버들에게 자신이 온갖 고초를 겪으며 정치가가 된 경력을 소국 프러시아가 대국 독일제국이 된 과정과 연결지어 거듭 말하였다.
지금 국제간의 「만국공법」(국제법 · 국제공법)은, 모든 나라의 권리를 보전하는 법전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이는 소국이 이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데에 반하여 대국은 자기에게 불리하면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를 무시하므로, 소국은 ’자주의 권리’ 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 친목의 모임은 아직 믿음을 둘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소국에서 태어나 그 정태를 잘 알게 된 것이며 가장 깊이 이해하는 바이다.
그는 일본이 친목을 도모해야 할 나라는 많이 있겠지만, 이와 같이 “국권 자주를 중시히는 독일이야말로 가장 친할 수 있는 나라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실기』는 이 비스마르크의 말을 ’깊은 의미가 있는 것’ 이라 하고 나아가 “음미할 만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三, 329~330). (p72~74)
여기서 『실기』의 군사에 관한 기술에 대해 언급해 보ㅈ. 「총설」에는, 자연환경 · 산업 · 무역 · 교육 · 종교 등 각 분야에 대한 서술이 있지만 「군사」에 대해서는 항목조차 없다. 사실 전체적으로 보아도 군사에 대한 기술은 매우 적다.
영국이나 러시아에서 해군이나 육군의 개략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군사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독일의 철강왕 알프레트 크룹의 총포 제조 공장 등에 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무기고를 중심으로 군사 공장 등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총론」 부분에서 ’정속’ ‘지리 및 조운’ ‘기후 및 농업‘ ‘공업’ ‘상업’ 처럼 항목이 설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실기』의 서술 역점은 ‘강병’ (强兵) 이 아닌 ‘부국’ 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실기』를 이후 일본에서 펼쳐진 ‘부국강병’ 정책의 ‘부국’ 의 출발점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강병’ 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일본 근대사의 출발점에서 『실기』를 자리매김할 의미와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p80)
『실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지적하였다.
생각건대 동양의 학은 도덕정치에서 시작되어 오로지 수신 한 과목에서 발전하여 ‘무형의 이학(理學)’ , ‘고상한 문예’ 를 즐겼다. '일용생리' 에 대해서는 “외람되고 속되다’라며 무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육은 일반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부인은 “규방 속에 깊이 유폐”되어서 ’인생의 기쁨’ 을 느끼지 못하였다. 농·공·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외람되고 속된 생리’ 에 쫓겨서 여유가 없으므로, ‘인륜의 도’ 를 듣지 못한다. 이리히여 ’전 국민이 문맹 상태’ 에 있어서, 선비와 군자만이 그 뜻을 고상하게 할 뿐이다. 그런 고로 ’재산생리’ 에도 어둡게 된다. 그 때문에 점차 사람들은 빈곤하게 될 뿐이다.
서양은 이와는 반대로 ‘재산생리’ 에 곤란하지 않고 ’국민의 의무’ 를 다해야 함을 알고 있다. ‘배워서 아는’ 것이 기본이며, ’유형의 이학’ 에 노력하며, ‘생계를 영위하는 이치’ 를 터득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신의 이치’ 는 종교가에게 맡긴다. 문화나 학문은 전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그들은 또한 ‘미래의 명복’ 을 바라마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생리를 열심히 탐구’ 함으로써 ‘예절’ 을 알고, 야만의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동양과 서양 학문의 지향점이 다르다, 고 한다(五, 94~95).
이것은 아시아가 ‘무형의 이학’ , 즉 공리공론을 추구한 것에 대해, 유럽에서는 ‘유형의 이학’ 이라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깊이하고 있다는 확인이었다. (p88~89)
Ⅳ. 자본주의 시스템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은 각국의 산업 실태를 현지에서 목격하였다. 특히 영국에 대해서는 최초의 방문지 미국과 마찬가지로 20권이나 권수를 배정하여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영국이 산업혁명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히는 데에서 출발해, 당시 영국 각지의 공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현상(남 · 여 수와 임금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실기』의 영국에 대한 기술은 영국 산업혁명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일본에 알려진 가장 빠른 산업혁명 보고서였을 것이다.
일행은 각지의 공장에서 공장 경영, 생산과 기능, 노동자의 기술력, 임금의 실정 등을 알 수 있었다. 과학 기술에 대해서도 많은 서술이 있다.
(p92~93)
『실기』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오늘날의 부강’ 이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를 묻고, 1800년 이후의 일이라고 답한다. 그것은 그때로부터 겨우 40년전의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이 정도 차이라면 후발 주자인 일본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같은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는 기백조차 엿보인다.
그만큼 일행의 공장 시찰은 진지하였다. 멤버의 취재 열기와 능력은, 당시 일행을 안내하였던 사람들의 말이나 그곳의 신문 · 잡지 기사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田中彭, 『岩倉使節團の歷史的硏究』 제1장에서 상술).
그러나 이 시절단 앞에는 두꺼운 벽이 있었다. 무엇보다 기업비밀이다. 『실기』는 공장 시찰과 취재의 애로사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7항목을 들고 있다.
(1) 공장주가 비밀로 한다. 예를 들어 영국 에딘버러의 고무공장에서 구메(久米)가 온실을 안내해 준 사람에게 그 제조 과정을 물었으나, 그는 듣지 못한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동행 중 팍스(주일 영국 공사로 당시 귀국 중이어서 사절단을 안내하였다)는 웃으면서, “그 비밀이 알려지면 그 사람은 봉급이 몰수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回顧錄』 하권). (2) 분업으로 인해 전체의 파악이 어려웠다. (3) 공장 내 소음으로 인해 설명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4) 일본에서 보고서(메이지 6년 5월의 태정관 보존 문서)를 소실하였다. (5) 견학시간이 부족하였다. (6) 체계적이고 기술적인 설명을 들을 시간이 부족하였다. (7) 기술적인 이해 능력이 불충분하였다(「例言」).
또한 아시아와 유럽 간에는 이해의 기반에 차이가 있음도 사실이다. 유럽에서는 극비로 취급하는 기술이 아시아에서는 상식이 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딩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동양에서는 잘이해가 되지 않다가 견학을 통해서 오랜 의문이 한순간에 풀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기』는 보거나 들은 모든 것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견문 중에 오류가 있는 것은, 보는 사람이 이를 이론에 맞추어서 시정하여도 가하다“(「例言」)라고 하였다. (p95~96)
‘평화적 전쟁’ 이란 자본주의적인 경쟁 원리를 말한다. 그 경쟁에서 국가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협력에 의한 에너지의 결집이 더욱 중요하다, 는 것이다.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의 문서 중에 있는 「외국직접무역론」에도, “서양인은 상업을 평화적인 전쟁이라고 칭한다’라고 되어 있다.빈 만국박람회 보고기록에서 대국과 소국의 전시품 비교에서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출품작에 나타나는 국력의 충실 여하를 묻고 있다. 그것은 ‘국민 자주의 생리’ 와 깊이 결합되어 있다, 라고 보고 있다. 인민의 ’자주 정신’ 이야말로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五, 22~275).
그러나 일본은 개국 후 약 2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1875년의 국세 총액을 보면, 거의가 지세(地稅)이며 해관 관세액은 겨우 3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절단은 회람 과정에서 국익으로서 무역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것이다. (p104)
사절단 귀국 후,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를 형성하였던 이들은 신문의 장점과 단점, 신문 · 언론의 자유 등을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들은 이에 대한 대책을 차례로 시행하였던 것이다.
즉 1873년에 일찍이 「신문지발행조목」을 공포하였다. 이 조목을 통해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하고 국체 비방 · 정부 비평을 금지하고 관리의 정보 누설 방지 등을 규정하였다. 이듬해 1874년에 민의원 설립 건백서가 접수된 다음에는, 「신문지조례」 「참방률」을 공포하여 탄압을 개시하였다. 나아가 자유민권운동의 전개에 대해서 「신문지조례」를 개정하여, 언론 압살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부가 신문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문이나 언론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선제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이를 후발 일본국의 단순한 절대주의 탄압책으로 파악히는 것은 역사적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후발국이기 때문에, 근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언론 자유에 대해서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단계에서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 측은 스스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론의 봉쇄라는 법적 조치를 취하였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권력구조는 일본 근대화의 특질 중 하나이다. 그것은 현대에서도 근대화를 추진하는 후발국 근대화의 일반적인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p113~114)
Ⅴ. 사회에 대한 관점
『실기』를 검토하는 한 흑인이든 원주민이든 사절단에게는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의식은 별로 없었다고 해도 좋은데, 이것이 동남아시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달라진다. 다음에 검토하겠지만, 동남아시아의 현지인에 대해서는 반복해서 게으르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같은 차별적 표현은 동남아시아의 풍토와 거기서 생활하는 주민의 모습, 나아가 『실기』의 문명관에 의한 것이었다. 『실기』의 문명관의 기준은, “삶에 부지런히 애쓰는 힘의 강약 여하“ 에 있었다(五, 275). 결국 생존에 대한 인간의 노력, 그 축적의 유무가 문명이라는 발상이 근저에 있었다. 따라서 그 풍토에 의해 동남아시아는 이러한 노력이 부족하며 문명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것이다.
『실기』는 문명권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 세계를 구분한다. 그러므로 미국의 흑인이나 원주민은 문명권 안의 문제이며, 동남아시아의 경우는 문명권 밖의 문제가 된다. 백인종이나 황색인종에게는정서나 발상의 차이는 있어도 그것이 인종차별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차별은 문명과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120~121)
메이지 정부도 사회정책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이케다 요시마사(池田敬正)의 역작 『일본사회복지사』(日本社會福祉史, 법률문화사, 1986)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정책은 1868년 1월 14일 「오개조의 서문」 다음날 「오방의 高札」의 제1찰이, “홀아비, 과부, 고아, 무의탁자, 결핵에 걸린 사람 등을 불쌍히 여길 것” 이라고 쓰여 있듯이, 이는 유교적 정치 의식에 기초한 인정(仁政) 사상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메이지 정부가 행한 ‘구빈정책‘ 이었다. 거기에 관철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천황의 자애로서 실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는 것이다(앞의 책).
원래 경제 발전이나 사회 변화 등에 따르는 변용에 대한 대응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인권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의 정책은 실질적이지 않고 형식화 · 공동화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p138)
Ⅵ. 과학과 문화
『실기』는 유럽의 식물원이나 동물원은 일본의 ‘식목옥’ (植木屋), ‘금수관장’(禽獸觀場)과 다소 차이는 있어도 외견이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설치의 본령은 원래 서로 반대라고 하였다.
즉 유럽의 동물원은 동물이나 조류의 부화에서 탈피 · 생육의 과정이나 집짓기 · 번식,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생태를 많은 종류에 걸쳐서 추구하고 그 일생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 식물원도 성격은 거의 같다. 이에 반하여 일본의 경우는 ‘희귀한 짐승과 희귀한 식물’ 을 통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하자면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p140)
1873년 1월 15일의 태정관 포고로 도쿄 · 교토 · 오사카를 비롯하여 인민이 많이 모여 사는 땅, 즉 옛날부터의 경승지나 유명한 사적이 있는 곳,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와서 모이는 장소를 거명하고 있다. 도쿄에서는 긴류잔 센소지(金龍山 淺草寺), 도에이잔 간에이지(東叡山 寬永寺) 등이며, 교토에서는 야사카지(八坂寺), 기요미즈데라(淸水寺)의 경내, 란잔(嵐山) 등 신사와 절의 경내, 조세 면세지나 공유지 등이다. 그리고 에도시대 이래 면세지가 되었던 이 토지들은 “영원토록 만민이 즐기는 땅으로 공원으로 정한다” 라고 하였다. 각 부현에서도 조사를 행하여 도면을 첨부하여 대장성에 제출하라고 하였다.
시라하타 요자부로(白幡洋三郞)의 『근대 도시공원사의 연구 - 서구화의 계보』(思文閣 출판, 1995)는 이 태정관 포고의 목적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1) 토지 종교 정책(지조개정과 관련하여 절 및 신사 토지 처분의 문제)
(2) 서구화정책(문명개화정책 및 외국인의 공원설치 요구)
(3) 사회 정책(종래부터의 일본인 옥외 레크리에이션으로서 꽃구경 명소 등의 보전)
좀더 자세히 보면, 1873년 1월의 태정관 정원에 대한 대장성 질의에는 지금까지 면세였던 경승지에 과세를 할 경우, 땅 주인이 꽃과 나무를 벌채하거나 개간을 하여서 손실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즐기는 경승지는 ‘영원히 공원지’ 로 하고 싶기 때문에 건의한다고 하였다. 이 발상으로 공원이 정의되고 만들어졌다. (p151~152)
사절단은 각국을 회람하는 과정에서 항상 기독교 금압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국가와 종교라는 문제이기도 하였다. 사절단은 종교가 ’부국강병’ 의 수단으로서 정치적으로도 시회적으로도 큰 역할을 수행한다고 인식하여 주목하고 있었다. 가톨릭이 국민에게 긴요한 통로를 갖고 있다는 것은 아시아 ‘도덕정치의 나라‘ 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여기에 대응하는 신교는 정치 · 군사 · 상공 · 농목 등 모두 “사람이 사람을 사역한다“ 고 보고 있다. 나아가 “사람의 인기를 모아서 규율에 준하는 도구로서 그 권모를 이용하는 것과 흡사하다” 라고 한다(四, 73).
달리 표현하면 달리 표현하면 “각 나라의 지배자는 종교를 도구로 삼아서 국세를 홍하게 하고 인기를 고무시킨다“ 라고 하였다(五, 155). 요컨대 종교의 도구화, 결국은 종교를 수단으로 심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주목한 것이다.
동시에 『실기』는, 종교와 문명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로마 문명의 성쇠는 가톨릭의 힘에 죄우되었다고 한다. 이는 「유럽정치 총론」(제89권, 五, 155~157)에서 총괄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야마자키 미나코(山崎渾子)의 표현을 빌리면, “오래된 종교에서 새로운 종교로 단지 문명 발달 단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낙관론에서, 문명국에 어울리는 것이 개신교라는 견해”가 표출된다는 것이다(야마자키 미나코, 「구메 구니타케와 종교 문제」, 『聖心여자대학 논총』 71, 1988년 7월).
여기에는 로마가 유럽 문명의 원천지이며, 유럽 문화는 거기에서 오랜 세월을 거쳐서 생겨난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오호라 나라의 문명은 일조일석에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수천 년 세월을 거쳐 잉태되고 난 후에 세상에 널리 퍼지는 것이 이와 같다“ (四, 288) 라고 하였다.
이 역사의 종적 연속성에 대해서 현실의 역사는 횡적 이질성으로서 동서 문명을 생겨나게 하였다. 이는 동서 교통이 막혀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아아 1,700년 전의 시대로부터 동서양이 서로 선박의 왕래와 교역이 끊이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렀다면, 지구 전체가 같은 국제법을 가지고 서로 지혜를 다듬어 유무를 서로 통하여 동서양의 인민이 그 이익을 얻음이 어찌 오늘날의 일뿐이랴“(四, 290) 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개국 이래 일본이 구미를 본받아서 근대화에 착수하려고 하였을 때, 그 구체안을 얻기 위해 각국을 회람하고 있는 이 사절단의 사명이 중첩되어서 나타나는 자각을 다시금 통감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러한 문명 혹은 종교에 대한 고찰과, 거기서 나타나는 고민, 그리고 외국측의 국가적 요청 등이 유수(留守)정부로 하여금 1873년 2월의 기독교 금압의 고찰을 철거한다는 극히 애매한 해금으로나타났다고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161~163)
Ⅶ. 『미구회람실기』와 『문명론지개략』
실론 섬 이후 보이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경치는 산은 푸르고 물은 맑으며 토지는 비옥하여 식물이 번성하고 꽃도 만개하여 공기가 맑았다. 그 이전까지 적토뿐이었던 들판의 풍경과는 달랐다. “참으로 극락토이다“ (五, 312)라고 『실기』가 표현하였음은 이미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 ‘극락토’는 유럽의 식민지로 변하고 있었다. 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나라 사람들의 횡포는 도를 넘고 있었다. 수마트라 섬 북단 아체에 대한 네덜란드인의 태도를 『실기』는 서술하고 있다(五, 305~306).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네덜란드는 “원주민을 대하기를 폭력적이고 오만하며 참혹하게 대한다” 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영국은 “달래고 유연하고 멀리 내다보는” 친근한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성대하게 되었다“ 라고 한다(五, 307).
이러한 상황이나 일행이 귀국선상에서 본 식민지로 떠나는 사람들의 거동이 오만함을 보고 『실기』는 이들이 본국인 문명국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보고 있다. 그들을 문명국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 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자신의 문명을 코에 걸고서 이러한 거동을 히는 것은, 그들 자신이 설령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주장한다고 해도 말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 일본은 이직 외교 경험이 적으므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 ‘본국의 문명’ 을 살펴보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五, 308)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를 보면 『실기』가 문명에 대해 전면적인 긍정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양문명에 대한 의식이 허위 의식임을 나카에 조민은 멋지게 간파하였다. 조민은 이와쿠라 사절단에 동행한 유학생이었으나, 귀국은 9개월이나 늦게 하였다. 후에 그는 이것을 「논외교」에 쓰고 있다.
조민도 같은 풍경을 보았으나, 그는 그러한 현상을 문명의 또 하나의 얼굴이라고 보았다. 본국과 식민지로 향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파악하지 않는다. 스스로 ‘개화‘ 를 코에 걸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은 “어찌 참된 개화의 백성이라고 칭할 수 있으랴“ 라고 한다.
조민은 다른 논고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에 대해 “사절단은 선진국의 문명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고 디음에는 취했고 결국은 미쳤다“ (「유행론」, 『東雲新聞』 제180~181호, 메이지 21년 8월)라고 논하였다.
그가 원로원 소서기관을 그만둔 것은 메이지 10(1877)년이었다. 그 무럽에 조민은 이미 메이지 정부와는 사이가 벌어졌다. 『동양자유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고, 자유당 기관지 『자유신문』의 사설을 쓰고, 메이지 20년에는 『삼취인경륜문답』 (三醉人經綸問答)을 출판하여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가 이와쿠라 사절단을 혹평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니카에 조민의 문명 이해는 『실기』(「개략」도 마찬가지이다) 보다 예리하고 깊이가 있었다. 그것은 문명을 한편으로는 긍정하면서도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하는 복수의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카에 조민 평전』(中江兆民評傳, 岩波書店, 1993)의 저자 마쓰나가 쇼조(松永昌三)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민은 인간 동등권의 확신을 갖고 유럽 여러 나라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아시아 침략을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여기에는 유럽 근대문명의 이념으로 그 문명의 현실을 비판하는 시점이 있으며, 그 근저에는 엄연한 아시아인의 눈이 있었다. 동양의 젊은 이학자(理學者)로서 조민은 유럽적 지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과 아시아 인민의 자유 회복을 동시적인 과제로 절실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하여 조민의 귀국 여행은 ‘동양의 루소’ 로서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나카에 조민집』〈中江兆民集〉 해설 「근대일본사상대계 3」 筑摩書房, 1974).
이 지적은 『실기』의 아시아관과 관련된다. 『실기』의 문명관은, 문명이란 영업력(二, 22) 내지는 ‘생리에 권면하는 힘’(五, 275)을 기초로 축적된 노력의 총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열대지방은 의 · 식 · 주가 부족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번식하는 것도 초목 일반과 마찬가지(五, 274)라고 한다. 이를 『실기』는 “옛말에 옥토의 백성들은 게으르다고 하였다“(五, 274) 라고 요약 표현하고 있다. 이를 문명 · 반개 · 야만이라는 발전 단계설에 대입하여 반개인 동아시아(일본)는 문명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열대 지방(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은 ‘옥토’ 이므로 의식이 충분하고 노력도 하지 않으므로, 거기서 문명은 생겨날 수 없어서 야만이 되었다는 이해를 보인다.
게다가 『실기』는 즉 지금의 일본인은 서양인에 의해 계도되어서 앞 다투어 구미로 향하고 있으며, 이는 마치 인도 남양이 눈에서 멀어지는 것(五, 301)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후쿠자와는 1885년의 「탈아론」(『時事新報』 3월 16일)에서 ‘탈아‘(脫亞)라고 표현하였다.
이 탈아론에 대해서는 후쿠자와의 평가와 관련한 문제로 연구자들이 발언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탈아론의 기초자는 다른 사람이며 후쿠자와가 이를 입수하였을 뿐이라는 이다 신야(井田進也)는, “젊은 기자가 혈기로 쓴 논설을 받이들여서 반세기 이상이나 내외의 비판을 받아 온 사람이” 후쿠자와라고 단언하고 있다(이다 신야, 『역사와 텍스트 西鶴에서 諭吉까지』 光芒社, 2001).
여기서 말하는 ‘입구’(入歐)라는 말은 『실기』에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으나, 같은 의미에서 앞서 인용한 “오늘날 일본인들은, …… 앞 다투어 서구로 간다“라는 표현이며(五, 301), 거기에서 ‘탈아‘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눈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 ’탈아입구’(脫亞入歐)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실기』의 역점이 두어져 있다.
『실기』는 “시험 삼아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외래품을 보라“ 라고 한다. 이러한 외래품의 원재료는 구미에서가 아니라 중간에서 많은 이익을 남기면서 산출되지 않는가. “천연자원의 풍부함은 오히려 인근(가까운) 나라에 있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명시한 ‘지리물산‘ 을 기록한 책이 나오면, “일본이 부강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라고 한다(五, 301).
탈아입구를 극복하기 위해 남방 아시아의 자원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는 장래 일본의 무역을 중시한 『실기』의 관점으로 본 제안이었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열대 지방에 자원이 풍부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메이지 정부는 로쿠메이칸(鹿鳴館) 시대를 출현시킨 것처럼, 서구화 일변도의 정책을 취하였다. 『실기』가 말한 이러한 탈아 극복책은 무시되었다.
한편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의도히는 바는, 일본이 서양 문명국과 같이 ‘개화‘ 를 목표로 하여 개화하려고 하지 않는 조선이나 중국 같은 악우(惡友)를 떠나자는 것이었다. 이는 “서양의 풍속을 따라서 아시아 동방에 새로운 서양 나라를 세우는 대영단이 아니면 결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외교론」 메이지 16년 『전집』 제9권)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실기』가 제시한 탈아 극복책과는 명백히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더 말하자면 자원주목론〔資源着目論〕은 훗날 불행하게도 ‘대동아공영권’ 속에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겠다. (p179~184)
[참고] 特命全權大使米歐回覽實記 (전5권)
목차 (소명출판사 번역본에서 발췌)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1
제1장 태평양의 여정
제2장 미국 총설
제3장 샌프란시스코 1
제4장 샌프란시스코 2
제5장 캘리포니아 철도 여행
제6장 네바다와 유타
제7장 로키 철도의 여행
제8장 시카고 철도 여행
제9장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제10장 콜롬비아주 총설
제11장 워싱턴 1
제12장 워싱턴 2
제13장 워싱턴 3
제14장 북부 순람 여행 1
제15장 북부 순람 여행 2
제16장 북부 순람 여행 3
제17장 워싱턴시 후기
제18장 필라델피아
제19장 뉴욕
제20장 보스턴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2
제21장 영국 총설
제22장 런던 총설
제23장 런던 1
제24장 런던 2
제25장 런던 3
제26장 리버풀 1
제27장 리버풀 2
제28장 맨체스터 1
제29장 맨체스터 2
제30장 글래스고
제31장 에든버러
제32장 하이랜드 여행
제33장 뉴캐슬 1
제34장 뉴캐슬 2
제35장 브래드퍼드
제36장 셰필드
제37장 스태포드셔와 워릭셔
제38장 버밍엄
제39장 체셔
제40장 런던시 후기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3
제41장 프랑스 총설
제42장 파리 1
제43장 파리 2
제44장 파리 3
제45장 파리 4
제46장 파리 5
제47장 파리 6
제48장 파리 7
제49장 벨기에 총설
제50장 벨기에 1
제51장 벨기에 2
제52장 네덜란드 총설
제53장 헤이그·로테르담·라이덴
제54장 암스테르담
제55장 프로이센 총설
제56장 프로이센 서부철도여행
제57장 베를린 총설
제58장 베를린 1
제59장 베를린 2
제60장 베를린 3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4
제61장 러시아 총설
제62장 러시아철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설
제63장 상트페테르부르크 1
제64장 상트페테르부르크 2
제65장 상트페테르부르크 3
제66장 북독일 1
제67장 덴마크 왕국
제68장 스웨덴 1
제69장 스웨덴 2
제70장 북독일 2
제71장 북독일 3
제72장 남독일
제73장 이탈리아
제74장 피렌체
제75장 로마 1
제76장 로마 2
제77장 나폴리
제78장 롬바르디아 및 베네치아
제79장 오스트리아
제80장 오스트리아 행로와 빈
제81장 빈·헝가리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5
제82장 만국박람회 견문기 1
제83장 만국박람회 견문기 2
제84장 스위스
제85장 스위스의 풍경
제86장 베른 및제네바
제87장 리옹과 마르세유
제88장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89장 유럽의 정치와 사회
제90장 유럽의 지리와 운송
제91장 유럽의 기후와 농업
제92장 유럽의 광업과 공업
제93장 유럽의 상업
제94장 지중해 여행
제95장 홍해 항해 기록
제96장 아라비아해 항해 기록
제97장 실론섬
제98장 벵골만 항해
제99장 중국해 항해
제100장 홍콩과 상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