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 19,1-2.17-18; 1코린 3,16-23; 마태 5,38-48
+ 찬미 예수님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으로 인해 사망자가 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시리아의 내전이 재개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이 내전 중인 시리아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장 자크 상뻬라는 프랑스 만화가가 계셨는데요, 그분의 한 컷짜리 만화에 이런 그림이 있습니다. 바람 부는 언덕에 한 남자가 올라서서 혼잣말을 하고 있습니다. “난 나를 모욕한 자들을 항상 관대히 용서해 주었지. 하지만 내겐 그 명단이 있어.”
이 한마디가 우리가 용서에 대해 갖는 어려움을 잘 요약해주는 것 같습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다시 떠 올라 나를 힘들게 하고, 아직도 용서하지 못했나 자책하고, 내가 왜 용서해야 하나 반문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의 복음 말씀은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주일에 산상설교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요,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하시며,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오른손잡이가 오른뺨을 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쳐야 할까요? 아, 직접 해 보지는 마시구요, 손등으로 쳐야 합니다. 손등으로 얼굴을 치는 것은 당시에 엄청난 모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욕을 당하면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십니다.
또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한 걸음은 두 발자국인데, 당시 평균 보폭으로 계산해 1.48m였습니다. 그러니까 천 걸음은 1.48km였는데요, 당시 로마 군인들은 자신의 짐을 아무에게나 지우고 천 걸음을 가도록 강요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말씀들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웠는지,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 교부는 거의 없습니다. 오리게네스라는 교부는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을 ‘합리적인 교의를 반대하는 사람’이라 보고, 그에게 올바른 교의를 알려주는 것이 다른 뺨을 돌려대는 행위라 해석합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러면 우리는 악인에게 아예 맞서지 말아야 합니까?, 사실 맞서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불은 불로 끄지 않고 물로 끄기 때문에,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고통을 참아냄으로써 맞서야 합니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달라는 대로 ‘무엇이든’ 다 주라”는 것이 아니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정말 글자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길에서, 당신 뺨을 치는 경비병에게 왜 때리느냐고 항변하시지만 되갚지 않으시고, 당신의 겉옷과 속옷을 모두 내주시고, 이천 걸음도 훨씬 넘는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몸을 내놓으라는 이들에게 목숨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당신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완전한’이 아닙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말씀이지만, 우리는 1독서에서 이미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핵심은 ‘거룩함’이라기보다,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실상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닮을 수 있을까요? 보이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산상설교는 결국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라는 초대이고, 예수님을 닮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 “야, 괜찮아, 괜찮아, 참을만해. 나중에 부활하면 밥이나 한 끼 하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음의 아픔 속에서도 ‘이 죄를 그들에게 지우지 말아 달라’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대화하신 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고가 나서 팔이 부러졌을 때, 상대방이 나에게 사과한다 해서 부러진 내 팔이 도로 붙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은 사과해야 하고 죄과가 있다면 벌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받은 상처는 그 사람의 사과와는 별개로 하느님께 치유 받아야 합니다. 치유 받았다 해서 그를 찾아가서 ‘괜찮다’고 ‘용서했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지, 당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나 헤로데를 찾아가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내 마음에서 놓아 보냄으로써 그가 저지른 악으로부터 내가 해방된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 사람과 예전처럼 잘 지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나에게 아픔을 준 누군가를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녀인 우리에게 자녀로서 의무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랑을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화답송에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악으로 인해 아파하는 당신 자녀가, 용서하지 못해 또다시 자책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에서 해방되기를,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를 이웃에게 실천으로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는, 나를 여전히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아픔이나 상처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삶에 영감을 얻어 어떤 사람이 쓴 ‘그래도’라는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Anyway)
사람들은 자주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용서하십시오.
친절하면, 이기적인 속셈에서 그렇게 한다고
당신을 매도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친절하십시오.
좋은 결과를 내면,
당신은 거짓 친구들과 진짜 적들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은 결과를 내십시오.
정직하고 솔직하면
사람들은 당신을 속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을
누군가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만드십시오.
당신이 평온하고 행복하면
그들은 시기할 것입니다.
그래도 행복하십시오.
당신이 오늘 행한 선한 일을
사람들은 내일이면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래도 선을 행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세상을 향해 주십시오.
아마 그것은 언제나 넉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세상을 향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결국에는
당신과 하느님 사이의 일입니다.
당신과 그들 사이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그래도’(Anyway) 라는 글로 알려져 있는 이 글은 Kent M. Keith라는 사람이 마더 데레사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쓴 글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 글은 몇몇의 다른 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용한 글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고아원 벽에 적혀 있는 것으로서, Keith의 원래 버전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