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문정로 禪門正路]
19. 부처 종자를 없앰[銷滅佛種]
世界의 衆生이 비록 身心에 殺生 偸盜(투도) 邪婬이 없어서 三行이 이미 圓滿하여도, 만약에 大妄語를 하며는 곧 三摩地에 청정하지 못하며 愛見魔를 성취하여 如來의 聖種을 忘失하나니, 所謂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하며 證悟하지 못하고 證悟하였다 함이니라. 혹은 世間의 尊勝第一을 求하여 衆人에게 말하되, 내가 이미 道果를 證得하였다 하여 그들의 禮懺(참)을 求하며 그 供養을 貪하느니라. 이 一顚迦(일전가)는 佛種을 銷滅하되 사람이 利刀로써 多羅木을 斷絶함과 같아서 부처님이 이 사람은 善根을 永永히 殞亡(운망)한다고 授記하니 다시는 正見이 없어서 三途苦海에 沈淪하여 三昧를 성취 못 하느니라. 만약에 그 大妄語를 斷絶하지 못하는 者는 糞塊(분괴)를 彫刻하여 栴檀의 形狀을 만듦과 같아서 香氣를 求하고자 하나 끝내 얻지 못하느니라. 내가 比丘들에게 正直한 眞心이 道場임을 가르쳤나니, 行住坐臥의 四威儀인 一切行動 가운데도 오히려 虛僞와 假作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上人法을 證得하였다고 自稱하리오. 비유하건대, 貧窮한 賤人이 帝王이라고 망령되이 號稱하여 스스로 誅滅을 取함과 같으니, 하물며 大法의 聖王을 어찌 망령되이 竊稱하리오.
세계의 중생이 몸과 마음으로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하지 않아서,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이 세 가지 행이 완전해졌어도 만약 큰 거짓말을 하면 삼매가 청정하지 못하며 애견(愛見)의 마구니가 되어 여래의 거룩한 종자를 잃어버린다. 거짓말이란 득도하지 못하고서 득도했다 하고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 함이다.
이런 사람 중에 더러는 세상에서 제일로 존경받고 싶은 마음에서 사람들에게 “나는 이미 도과를 증득했노라” 하면서 그들이 자기 앞에 와서 절하고 참회하기를 바라며 공양받기를 탐한다. 이 일천제는 날카로운 칼로 다라나무를 자르듯 부처 종자를 없애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런 사람은 선근을 영원히 죽여 없애 바른 지견이라고는 없어서 삼악도의 고통 바다에 빠져 삼매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예언하셨다.
그 큰 거짓말을 그만두지 못하는 자는 마치 똥덩이를 깎아 전단향 불상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향기를 구하려 하나 끝내 되지 않는다.
내가 비구들에게 정직한 마음이 도량이라고 가르쳤으니, 걷고 서고 앉고 눕고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허위와 거짓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스스로 으뜸가는 법을 깨쳤다고 자칭하겠는가. 비유컨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함부로 제왕을 자칭하다가 목 베임을 자초하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대법의 왕을 사칭하겠는가.
명예를 탐내고 이익을 좋아함은 도를 닦는 데 첫째 장애이다. 수도하는 사람이 꿈 같고 허깨비 같고 헛꽃 같은 헛된 명예와 이익을 탐착하여 도를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하거나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하는 대망어죄를 범하면 자기를 파멸하고 부처 종자를 끊어 버림으로써 불법에 있어서 큰 악마가 되는 것이니 큰 거짓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오매일여, 내외명철, 무념무생, 상적상조하는 구경무심을 철저히 깨치기 전에는 결코 득도했다거나 견성했다고 할 수 없다. 만약 명리를 위하여 최후의 실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득도와 견성을 사칭하여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면, 이는 부처와 조사의 혜명을 끊어 위없는 정법에 영원한 반역이 되니 부디 경책하고 조심하여 이런 큰 거짓말을 하는 죄인이나 애견마의 무리가 되어 파멸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近來에는 오만하고 경솔한 者가 많아서 비록 叢林에 들어오나 參究에 懶怠(나태)하며 大道에 留心하여도 正眼宗匠을 선택하지 않아서 邪師가 잘못 敎導하여 같이 指向과 歸就를 亡失하는지라, 六根六塵도 了脫치 못하고 문득 邪解를 가져서 魔界에 誤人하여 正因을 전부 破滅하는도다. 그리하여 다만 住持(方丈)에만 急急하여 猥濫되이 善知識이라 詐稱하며, 또한 世上의 虛名만 貴重히 여기거니 어찌 罪惡이 自身에 來襲함을 알리오. 이는 後人을 聾瞽(농고)할 뿐 아니라 또한 風敎를 凋弊(조폐)하는도다. 法王의 高廣寶座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熱鐵火床에 누울 것이요, 純陀의 최후 珍羞(진수)를 받는 것보다는 잠시 赤鎔銅汁을 마실지어다. 크게 恐懼戰慄(공구전율)하여 마땅히 自安하지 말지니 大法을 비방한 허물은 些少(사소)한 罪報가 아니니라.
근래에는 오만하고 경솔한 자가 많아서 총림에 들어오긴 했으나 참구에 태만하며 설령 큰 도에 마음을 두었어도 바른 안목 가진 종사를 선택하지 않아서 잘못된 스승의 지도를 받아 둘 다 어디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모른다.
6근 6진도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져 저 마구니 경계에 잘못 들어가 바른 인연[正因]을 모두 잃어버린다. 주지(방장)자리에만 급급하여 함부로 선지식이라 사칭하고 세상의 허명만 귀중히 여기니, 어찌 죄악이 자기 몸에 다가옴만을 논하겠는가. 이는 뒷사람을 눈멀고 귀먹게 할 뿐 아니라 교풍을 쇠퇴케 하는 것이다.
법왕의 높고 넓은 보좌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벌겋게 달군 쇠 침상에 누울 것이며, 순타의 마지막 공양을 받는 것보다 잠시 뜨겁게 끓는 구리물을 마실 것이다. 반드시 크게 두려운 마음을 내어 안일하지 말지니, 대승법을 비방하는 죄의 과보가 작지 않느니라.
대법안 선사는 「종문십규론」의 첫머리인 ‘마음 자리를 밝히지 못하고서 함부로 남의 스승이 됨’에서 이렇게 통절히 꾸짖었으니 진실로 만고의 귀감이다. 부질없는 명리에 두 눈이 가리어 실지로 깨닫고 증득하지 못하고서 사악한 지견으로 후학을 파멸시키고 자신도 망하는 사람은 예로부터 수없이 많으니, 참으로 크게 탄식할 일이다. 명리를 독화살 보듯 피하고 철석 같은 신심으로 용맹정진하지 않으면 대도는 성취할 수 없다.
어찌 보지 못하였는가. 敎中에서 말씀하셨다. 得道하지 못하고 得道하였다 함은 增上慢인지라 大般若를 비방함이니 懺悔(참회)로도 통하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貧窮한 賤人이 帝王이라고 妄稱하다가 誅滅을 自取함과 같나니 하물며 大法王을 어찌 妄竊(망절)하리오.
보지 못했는가. 경전에 말하기를 “득도하지 못하고서 득도하였다 함은 증상만(增上慢)이다. 이는 대반야를 비방하는 것으로서 참회해도 소용없다. 비유하건대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제왕이라고 함부로 자칭하다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같으니, 하물며 어찌 대법의 왕을 함부로 사칭하리오.”
가난한 사람이 제왕을 사칭하면 자기 한 몸만 죽지만 득도했다고 속여 법왕(法王)을 사칭해서 수많은 중생을 속여 잘못된 길로 안내하면 그 죄상은 천 부처님이 출현해도 용서받지 못한다.
父母를 殺害한 大逆重罪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大般若를 비방한 罪는 참으로 참회하기 極難하다.
부모를 살해한 대역중죄는 오히려 참회할 수 있으나 대반야를 비방한 죄는 참으로 참회하기 어렵다.
득도했다고 거짓말하여 반야를 비방한 죄는 이처럼 극히 무거우니, 지옥을 천만번 갈지언정 득도했다고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그 如實히 參究하여 實地로 悟達한 道人은 今日에만 相逢하기 드문 것이 아니요, 往昔에 있어서도 또한 일찍이 多數를 볼 수 없느니라.
여실히 참구하여 실지로 깨달은 도인은 오늘에만 만나기 드문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많이는 볼 수 없었다.
실지로 참구하고 실지로 깨쳐서 구경무심을 원증함은 고금을 통하여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뒷사람 중에도 얻는 이를 어찌 다 헤아리랴”고 영가스님이 ꡔ증도가ꡕ에서 말했듯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 이래로 무수한 정안종사가 계속 나와서 정법을 천하에 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저 사람이 대장부라면 나도 대장부”라 하였으니 자신감을 갖고 용맹정진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 뛰어 바로 여래의 지위에 드는 것이다. 참으로 하지 않을 뿐,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단, 득도하지 못하고서 득도했다고 말하는 것만은 절대 금물이다.
萬一에 實地로 悟達함이 없으면 形體를 捨離하고 影像을 論議하며 栗帛(율백)을 棄捨(기사)하고 衣食을 論議함과 差異가 없다. 그러므로 言語說明이 數多할수록 그 實効는 더욱더 遙遠하고, 心識機能이 細密할수록 그 大用은 더욱더 乖戾하며, 攀緣(반연)이 熾盛(치성)할수록 그 正因은 더욱더 荒廢된다. 早速히 이것을 버리면 오히려 防禦하는 방법이 되지마는, 혹 流去하여 돌아옴을 忘却하면 地獄에 至到하지 않고는 그치지 않는다.
실지로 깨달은 바가 없으면 형체는 놔두고 그림자를 논하는 격이며 좁쌀과 비단을 떠나 옷과 음식을 논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설명이 많을수록 실제 효과는 더 멀어지고, 심식의 기능이 세밀할수록 큰 작용은 더욱 어긋나며, 반연이 치성할수록 바른 인연은 더욱더 황폐된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빨리 버리면 그래도 막을 방법이 있겠지만 따라 흘러가서 돌아올 줄 모르면 도달할 곳이라곤 지옥밖에 없다.
실지로 득도하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 간에 결국은 역효과만 초래하고 만다. 그러므로 허망한 명리의 노예가 되어서 생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후회하지 말고, 오직 실지로 참구하여 실지로 깨쳐야 한다.
悟達치 못한 者에게는 已悟한 實境을 말할 수 없으니, 비유하건대 出生부터 盲目된 者에게 晴天白日의 淸明을 말하면 그가 비록 들어도 分辨하지 못함과 같다. 悟達한 者는 未悟한 蹤跡을 다시는 踏著(답착)하지 않으니 夢寐에서 覺惺한 者에게 그 夢中事를 再演하라 하면 그가 비록 記憶은 하되 追跡할 수 없는 것과 같다. 參學하는 高士는 당연히 悟達로써 標準을 삼을 것이니 此는 悟達함이 甚難한 까닭이다.
깨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미 깨친 실제 경계를 말해 주기 어렵다. 비유하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맑은 하늘에 해가 밝다고 말하면 비록 듣더라도 분별하지 못하듯이.
깨친 사람은 깨치지 못한 자취를 다시는 밟지 않는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에게 그 꿈속 일을 재연해 보라고 하면 비록 기억은 하지만 그대로 할 수는 없듯이. 참구하는 납자는 깨침을 표준삼을 것이니, 이는 깨치기가 몹시 어려운 까닭이다.
미혹한 자는 대낮에 앞 못 보는 맹인과 같고 깨달은 이는 두 눈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는 것과 같아서 근본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있다. 무한한 심성의 대광명이 항상 끝없는 법계를 비추고 있지만 눈먼 중생은 이를 보지 못하고 어둡다고 한탄한다. 하루아침에 홀연히 깨달아서 본래 갖고 있는 마음의 눈을 활짝 열면, 한없는 오랜 옛적부터 본래 자신이 이 대광명을 내고 있음을 환히 볼 것이다.
일단 이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 큰 광명의 창고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므로 참으로 통쾌한 중에서도 가장 통쾌한 일이다. 그러므로 위산(潙山)스님은 “법을 추구하는 일은 깨침을 법칙으로 삼는다”고 항상 강조하였다.
悟로써 第二頭에 轉落하였다 하며 悟로써 枝葉事라 하나니, 大槪 그는 始初出發할 때에 문득 錯誤하여 또한 그 錯誤를 覺知하지 못하고 悟로써 建立이라고 한다. 벌써 自己가 悟達치 못하였으므로 또한 悟達者가 있음을 信憑(신빙)치 않나니, 이러한 者를 大般若를 비방한다고 한다. 이는 佛陀의 慧命을 斷絶하는 것이므로 千佛이 出世하여도 참회하지 못한다.
깨침을 부수적인 데 떨어진 것으로 보며 또는 지엽적인 일이라 하니 그런 이는 아마도 처음 출발부터가 잘못되었으며 게다가 잘못된 줄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깨침이라는 것도 방편일 뿐이라고만 생각한다. 자기에게 깨친 영역이 없다 보니 깨친 이가 있다 해도 믿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대반야를 비방하여 부처의 혜명을 끊어 버리는 자라 하니 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도 참회가 통하지 않는다.
진여본성을 깨달은 이를 불조라 하니 이 깨달음의 문[悟門]은 불교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의 영역을 부정하면 불교를 파멸하는 최대의 과오가 되므로 천만 부처님의 큰 자비로도 영원히 구제하지 못한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고 한 「화엄경」의 글과 “일체 중생이 모두 원각을 증득했다[一切衆生皆證圓覺]”고 한 「원각경」의 글 등을 오해하여 중생이 본래 부처이므로 다시 깨달음을 구함은 머리 위에 머리를 얹는 격이라는 사악한 지견에 빠져서 깨달음을 부정하면 부처님의 혜명을 끊는 악마이다.
「화엄경」·「원각경」 등 일승의 현묘한 경전은 금강대정의 보광삼매에서 법계를 관조한 부처님의 지혜가 나타난 것이므로 오직 대원각의 구경무심을 완전히 깨쳐야만 상응하는 것이요, 눈먼 중생이 생멸하는 분별로써 마구 억측하면 자살행위를 면치 못한다. 옛사람은 “만고의 큰 강물로도 오명은 다 씻을 수 없다”고 통탄하였다.
또한 “자기 이름을 내는 자, 자기 몸을 죽인다”고 심히 꾸짖었으니, 명리를 뱀이나 전갈같이 멀리 피하지 않으면 대도는 성취할 수 없으며 아비지옥의 찌꺼기 됨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국왕의 존귀함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떨어진 옷과 걸식으로 평생을 장엄한 석가세존의 훌륭한 자취를 따르지 않으면 발심하여 도를 닦을 수 없다. 만약 명리에 현혹되어서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큰 거짓말을 하면 이는 불법의 영원한 원수요 도적이니, 진정한 수도인이라면 크게 정신차려야 한다.
슬프다! 저 쌀 한 톨을 탐내다가 만 겁의 양식을 잃어버리니, 어찌 애통하지 않은가.
오직 공안을 힘써 참구하여 활연히 깨쳐서, 크게 죽었다 크게 살아난, 항상 적멸하면서 항상 관조하는 대열반인 참 무심을 몸소 증득하여 참으로 견성하고 도를 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圜悟가 西蜀을 출발하여 大潙喆과 黃龍心을 謁見하니 다 法器라 하고, 晦堂은 후일에 臨濟의 一脈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하니라. 최후에 五祖演을 親見하여 그 機用을 다하되 五祖가 허락하지 않거늘 不遜한 말을 하고 忿然히 離去하니, 祖가 말하기를 그대가 심한 熱病을 앓게 되면 그때에야 나를 생각하리라 하니라. 金山에 이르러 과연 傷寒으로 극히 위독하여 平日에 誇示하던 工夫로써 試驗하니 아무 힘도 없는지라 五祖의 말을 추억하고, 나의 病苦가 조금 치유되면 즉시 五祖에 歸還하겠다고 맹서하니라. 그리하여 病이 쾌차하여 歸還하니 五祖가 一見大喜하여 參禪케 하니라.
원오가 서촉을 출발하여 대위 철과 황룡 심을 찾아뵈니 모두 법 그릇이라 하였고, 회당은 뒷날 “임제종의 한 맥이 그대에게 달렸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오조 연을 찾아뵙고 기용을 다하였으나 오조가 전혀 인정하지 않으니 불손한 말을 하고 성을 내며 떠나가자 오조가 말하였다.
“그대가 한번 심한 열병을 앓게 되면 그때야 나를 생각하리라.” 원오는 과연 금산에서 상한병에 걸려 극히 위독해지자 평소에 뽐내던 공부로 시험해 보았으나 힘이 되지 못했다. 오조의 말을 기억하고서 병이 조금 낫는 대로 오조에게 돌아가리라고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나아 돌아가니, 오조가 보고는 몹시 기뻐하며 승당에서 참선케 하였다.
기나긴 세월의 생사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어서 실제로 도력이 화엄7지인 몽중일여가 되어야 어떤 극심한 병고에도 끄떡없고, 나아가 숙면일여가 되면 생사에도 한결같다.
그러므로 몽중일여도 못 되는 지견의 알음알이로는 아무리 부처와 조사를 넘어서는 호언장담을 병에서 물 쏟듯 하여도, 열반당(涅槃堂) 안에서 온갖 고통이 맹렬히 솟을 때에는 그것들이 전부 얼음 녹듯 기왓장 부서지듯 사라져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이는 고금을 통하여 수도인의 근본 병통이니 설사 몽중일여하여 병들어서도 공부가 한결같아도 숙면일여하지 못하면, 세상에 뛰어난 지식과 걸림 없는 웅변도 생사의 언덕에서는 풍전등화같이 앞길이 캄캄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몽중일여도 안 되는 사악한 지혜로 한때의 허망한 명리를 욕심내어 중생을 현혹하면, 이는 자신과 남을 그르치며 부처 종자를 없애는 커다란 마구니이므로, 종문정전의 조사들은 이를 극력 배제하였다. 그러나 이 잘못을 확실히 자각하여 사악한 지혜를 완전히 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정진하면 영겁토록 어둡지 않고 자재무애한 불조의 부사의한 해탈도를 성취할 수 있다.
원오와 같은 뛰어난 대근기도 오조가 그 병통을 지적하여 고쳐 주지 않았으면, 결국은 망망한 업식의 바다의 사견 중생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오는 오조의 엄중한 지도 아래 대도를 완성하여 임제를 잇는 정안종사로서 불법의 동량이 되었으니, 참으로 도 닦는 이의 표준이다.
또한 몽중일여 후 숙면에서도 공부가 한결같으면 분단생사는 벗어나서 생사에 어둡지는 않으나, 아직도 아뢰야위인 자재보살의 변역생사 가운데 있으므로, 종문에서는 이를 제8 마계로서 대법은 꿈에도 보지 못했다고 배척한다. 숙면일여에서 훤히 꿰뚫어 아뢰야의 근본무명을 끊어 버려야만, 견성하여 도를 통한 사람이다.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꿰뚫어서 불성을 분명히 증득하면 영원히 끊어짐이 없다. 한 번 뚫어 깨달아서 영원히 스스로 얻는 것이다.
一得永得하면 變動과 異遷이 없나니 見性成佛이라 하느니라.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으면 변동과 달라짐이 없으니 이를 견성성불이라 한다.
生死의 幻翳(환예)가 영원히 소멸되고 金剛正體가 唯獨히 現露하면 一得永得하여 間斷이 없느니라.
허깨비나 눈병 같은 생사가 영원히 소멸되고 금강의 바른 몸이 홀로 드러나면,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어서 끊어짐이 없다.
一得永得하면 未來際를 窮盡하여 所得이 없이 自得하여 自得도 또한 取得하지 못하나니 이것이 眞得이니라.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으면 미래가 다하도록 얻는 바 없이 스스로 얻으며 스스로 얻음도 또한 얻지 못하니 이것이 진정한 얻음이다.
見性成佛하면 一得永得하여 自家의 寶藏에 依據하여 自己의 家珍을 運用하나니 그 受用이 어찌 窮極이 있으리오.
견성성불하면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어서, 자기 보배창고에 의거하여 자기 집의 보배를 꺼내 쓰는 것이니 그 씀이 어찌 끝이 있으랴.
無爲無事한 道人의 行履는 千生萬劫토록 또한 如如할 뿐이니라.
함이 없고 일이 없는 도인의 생활은 천생만겁토록 그저 여여할 뿐이다.
숙면일여에서 확철대오하여 자기 본성을 환히 보면 그것이 성불이다. 이런 이는 해탈의 깊은 구덩이를 뛰쳐나오고 비로자나불의 이마를 밟아 버려 한 번 얻음에 영원히 얻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무애자재하여 털끝만큼도 끊어짐과 바뀜이 없다. 여기서는 여여하다는 것도 성립할 수 없으니, 어찌 현묘하지 않은가.
진실로 오매일여, 내외명철, 무심무념, 상적상조하여 견줄 수 없이 높은 대법왕으로서 천추만세에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니, 격식을 벗어난 대장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구경의 깊고 현묘한 곳을 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하거나,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하면 법왕을 사칭하고 부처 종자를 없애는 것이니, 그 허물은 천 부처님이 나온다 해도 참회할 길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알면서도 일부러 저지르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다” 하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