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중지중 정관 15년(641)>에는
“간혹 중국인[1]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집이 중원 어느 고을에 있다고 하면서 수나라 말기에 군대에 끌려 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고려에 남았다고 했다. 지금은 고려 여인을 아내로 맞아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절반이나 되었다. 수나라사람들이 진대덕에게 자기 ‘친척 아무개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부를 물었으므로 진대덕이 그들에게 ‘모두 아무 탈 없이 잘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주었다. 수나라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자기들끼리 서로 소식을 전하더니 며칠 후 수나라사람으로서 진대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서 있는 사람이 교외 들판에 가득했다.” {영인}
진대덕이 고구려에서 수나라 군인으로 참전했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해 사는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살수대첩은 612년에 일어났고, 진대덕은 641년에 고구려를 방문했으므로 전쟁이 끝나고 29년이 지난 시점이다. 29년 세월이면 전쟁의 상처가 아물고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것이다. 포로가 된 수나라사람들은 그 위상(位相)이 어떻든 나름 고구려 사회에 정착하여 적응했을 것이고, 고구려 여인과 사이에 태어난 2세들도 이미 성인으로 성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진대덕이 수나라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으므로 진대덕이 올린 보고서에는 매우 중요하고 또 믿을 만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진대덕이 고구려에 사는 수나라사람들 입을 통해 직접 들은 바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구려에 정착해서 사는 수나라사람이 매우 많았다.
2) 수나라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 했다.
3) 외국인을 만나 친척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고대 전쟁포로는 노예(奴隸)가 된다. 전쟁포로는 전투에 승리하여 빼앗은 지역을 약탈(掠奪)하면서 잡아 온 민간인으로 특히 여자가 많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붙잡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잡아가서 노예로 팔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수대첩 포로는 고대의 보편적 전쟁포로와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1) 포로 숫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2) 전쟁터에서 사로잡은 군인으로 혈기왕성한 남자들이다.
조선에는 노예(奴隸)가 없고 노비(奴婢)가 있었다. 조선의 노비는 상전(上典)과 같은 민족이라는 점과 함께 삶에 있어서 상당한 자유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외국의 노예와는 다르지만, 처음에는 전쟁터에서 잡아 온 이민족 노예가 변천하여 노비로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노비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첫째 문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사례가 외거노비(外居奴婢)다. 외거노비는 노비가 많아지면서 발생했다.
대개 노비라고 하면 상전 집에서 같이 살면서 상전을 뒷바라지하는 솔거노비(率居奴婢)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조선 시대 노비 대부분은 외거노비였다. 외거노비는 상전과 따로 살면서 해마다 신공(身貢)으로 돈(金錢)을 바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해마다 남자(奴)는 면포(綿布) 1필[2]과 저화[3] 20장, 여자(婢)는 면포 1필과 저화 10장을 바치게 되어 있는데 면포로 통일하여 환산하면 남자는 면포 2필, 여자는 면포 1.5필을 바치는 것이다.
『성종실록』<16년(1485) 7월 28일>에는
“한명회, 이극배, 윤호가 의논하기를 ‘임복이 곡식 2000석을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바쳤으니, 100사람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아들을 양민으로 만들어 주고, 그 인원에 상당하는 노비를 주인에게 보충해 주소서.’ 하였다. 심회, 홍응은 의논하기를 ‘만약 곡식을 바쳐서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 준다면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가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니 진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했다.[4]
라고 적혀 있어서 보통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큰 재산을 가진 부자 노비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성종실록』의 진천에 사는 사노[5] 임복(林福)은 8000석 재산을 가졌다 하므로 어쩌면 임복을 소유한 상전보다 더 부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대개 가정에서 노비가 할 일은 한정(限定)되어 있어서 솔거노비를 많이 부리는 것은 경제적이지 못하다. 외거노비로 내보내 신공을 받으면 해마다 소득이 발생하므로 상전은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고, 노비도 상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면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으니, 말하자면 상전 좋고 노비 좋은 상황이므로 노비가 늘어나면서 저절로 외거노비가 증가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관리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포로를 잡았는데, 이를 조선 시대 외거노비처럼 살게 하면서 잘 관리한다면 인구가 크게 늘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젊고 튼튼한 남자로만 구성된 적군 포로를 마음대로 살도록 풀어 놓았다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고구려 주민과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고, 포로끼리 규합하여 소요(騷擾)를 일으켜 반란(叛亂)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간접적 관리를 받는 자율통제 장치가 필요하다.
두 번째 문제 해결책은 첫 번째 문제의 관건(關鍵)과 연결되어 있다. 고구려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으로 남자가 부족하고 여자가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만약 남편 없이 홀로 살아가는 고구려 여인과 혈기왕성한 수나라 포로를 혼인시킨다면 성비(性比) 불균형 문제 해소를 위한 나름 좋은 대책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남편 없이 홀로 사는 여자가 있는 가정에 포로를 배분하여 주어서 혼인시키고 여자 아버지(家長)에게 포로를 관리하도록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장은 포로의 장인(丈人)으로서 위상(位相)도 가지고 있지만, 포로의 상전(上典)으로서 위상도 가지게 만들어서 포로가 불온(不穩)하게 행동하거나 소요(騷擾)나 반란(叛亂)에 가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과 의무를 부담시키는 것이다. 만약 포로가 불온(不穩)한 행동을 하거나 소요에 가담하면 책임을 가장에게 연좌(連坐)하여 물으면 가장은 포로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단속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혼인한 남자는 모두 처가(妻家)에서 살아야 하는 처가살이 풍습이 보편화 되었으므로 포로가 고구려 여자와 혼인하면 저절로 여자의 아버지 즉 장인(丈人) 통제하에 들어가게 된다. 관청에서는 주기적으로 포로가 배속(配屬)된 가정의 가장(家長)을 불러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상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관리가 가능한 매우 유용한 방법일 수 있다.
더욱이 포로와 고구려 여자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외가(外家)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아버지를 제외한 어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까지 모두 고구려사람이고, 친가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는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또 말도 고구려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온전한 고구려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외국인이므로 전혀 차별당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고구려 모든 국민이 외가에서 태어나 외가에서 자라서 외가에서 죽기 때문에, 포로 아들이 외가에서 태어나 외가에서 사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대덕이 고구려를 염탐(廉探)하다가 만난 사람 중에는 수나라사람도 있었겠지만, 수나라사람과 고구려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2세도 있었을 것이다. 수나라사람 2세도 이미 어른으로 성장하여 있었으므로 포로 관리의 위험은 사라지고 안정된 사회가 자리를 잡았으므로 비교적 자유롭게 진대덕을 만나고, 마음 놓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회포(懷抱)를 풀 수 있지 않았겠는가?
* 각주 ------------------
[1] 여기에서 중국은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원(中原)을 말하는 것이다.
[2] 疋. 어른 옷 한 벌을 만드는 데 소용된 면포의 길이.
[3] 楮貨. 원나라에서 도입되어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용된 종이돈.
[4] 韓明澮李克培尹壕議林福納穀二千碩足以救百人之命從自願良其子以相當奴婢充給其主沈澮洪應議若開納穀從良之路則背主者蜂起誠非細故.
[5] 私奴. 개인 소유 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