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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조직신학 개론 12장 선포, 성례, 사역에 대한 발제문입니다.
12장 선포, 성례, 사역
선포와 성례와 사역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교리다. 특히 성례와 사역의 교리는 지금도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으며, 에큐메니칼 차원의 합의와 교회의 재연합을 위한 노력이 지체되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말씀의 선포
1.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며,이 선포의 효력은 궁극적으로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사역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의무와 동시에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함으로써,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칼 바르트 )
2.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성경 본문의 증언에 근거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성육신하시 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 둘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즉 성경. 셋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즉 현재의 복음선포. 이런 세가지 형태의 말씀은 정해진 순서와 질서 속에서 상호 불가분리적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진리를 증언하는 행동이다. 증언이라는 행동 속에는 여러 가지 특징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증언은 진리를 말할 것을 맹세한다. 둘째 신실한 증언은 증언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증언과는 구별된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관심을 둔다. 셋째, 증언이 말하는 내용은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한 일반적 진리와 다르기 때문에, 증언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넷째, 증언의 행위는 행위자 자신을 포함한다. 즉 행위자의 인격적 참여와 헌신과 용기를 요구한다. 다섯째, 진리는 자주 저항을 받기 때문에, 죽음까지 감수해야 한다.
4.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사용한다. 물론 행동으로 하는 증언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말씀의 선포는 언어적 소통이라는 일차적 형태를 취한다. 언어는 인간의 삶을 형성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본직적으로 적합한 특정 단어나 화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행동을 가리키기에 다른 것들보다 더 적합하다.
5.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의 내용은 풍성하고 심오하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단순하다. 이 내용은 죄와 상처로 물든 인간과 온 창조 세계에게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신실함을 알리는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다. 복음의 과제는 이런 “하나님의 기쁜 소식”(롬 1:1)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와 새로운 삶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선언하되, 내적인 일관성과 이해성과 명료성을 갖추는 동시에 무궁한 충만성과 불가항적 호소력과 자유로운 설득력을 가지고 제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선포의 내용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도대체 성경이 무엇에 관 한 것인지”, 즉 성경의 중심적 메시지를 가리킨다.
율법과 복음은 혼동되지 않아야 하지만, 동시에 이 둘은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하고 분명한 예(yes)이지만(고후 1:20), 이 “예”는 약속과 방향을 포함하는 “예”다. 기독교의 설교의 중심에는 추상적인 율법/복음의 변증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메시지가 있다. 이런 메시지는 우리를 해방시키고 강건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한다. 율법에는 심판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기능도 있다.
6,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항상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다. 기독교의 증언은 하나님과 세계 및 인간에 대한 일반적 진리를 다루지 않는다. 기독교의 선포는 구체적인 반응을 목표로 하는, 복음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소유인 우리에게 늘 새로운 상황 속에서 구체적인 방식을 통해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번 그의 목소리를 새롭게 듣고 순종해야 한다. 선포가 지닌 상황성을 상실하게 된다면, 성령의 현존도 상실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성령만이 기록된 말씀 또는 선포된 말씀에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설교 되어야 하는가? 17세기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는 “건전한 교리를 설교해야 한다. 부지런히 설교해야 한다. 인간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써가 아니라 성령과 권능의 증명으로 분명하게 설교해야 한다. 듣는 이의 필요와 능력에 맞추어 지혜롭게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열심히 설교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그의 백성의 회개와 교육과 구원을 목적으로 진지하게 설교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서 은혜의 구체화된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언이다. 아우그스티누스는 성례를 두고 “비가시적 은혜에 대한 가시적 표지들”이라고 불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거룩한 규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가시적인 표지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혜택이 신자들에게 재현되고 보증되며 적용된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는 성례에 대한 정의도 없으며 성례의 가짓수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13세기 이후로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에서 성례의 수는 7성례, 즉 세례, 견진, 성만찬, 고해, 서품, 혼례, 종부 성사로 고정되었다. 종교개혁 후 교회는 성례의 수를 둘 또는 셋으로 축소했지만,세례와 성만찬은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어 항상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정신 중 성례의 수를 축소한 사실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요점이다. 첫째 말씀과 성례는 불가분리적이다. 둘째, 말씀과 성례에서는 성력의 사역과 믿음의 응답이 중요하다.
성례를 해석하데 다음 두 가지 경향은 초기 교회에서부터 존재했다. 첫 번째 경향은 성례 자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객관적 실재를 강조한다. 성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의식임을 강조한다.(사효론) 즉 성례는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만찬을 “불멸의 약”이라고 불렀다. 두 번째 경향은 성례를 해석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의 응답임을 강조한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의 극적인 표지이며 그 자체로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성례를 받아들일 때에야 효력이 있다. 성례는 우리에게 행해지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다. 즉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신실한 삶을 맹세하는데 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성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을 공적으로 증하기 위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다.
오늘날까지도 이 두가지 경향은 교회와 신학의 차원에서 상충하고 있다. 객관성을 더 추구하는 견해(첫 번째 견해)의 위험성은 신앙적 응답의 중요성을 최소화하고 성령의 자유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성례의 행동에 의해 매개되는 하나님의 은혜는 비인격화되고 물화된다. 주관성을 더 추구하는 견해(두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은혜의 무조건적이며 객관적인 실재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오늘날 로마가톨릭 신학자와 개신교 신학자들은 말씀과 성례에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 지닌 인격적 특성을 점점 더 많이 강조한다. 성례에 대한 전통적인 두 논쟁의 난국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그 중 칼 바르트 등 일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를 성례적인 것의 패러다임으로 삼고, 성례 신학을 삼위일체적으로 더 적절하게 재정의하려는 견해가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일차적인 성례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현존과 활동이 유한한 실재를 통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례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재정의하는 작업은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식 안에서 자유롭고 인격적으로 현존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인격적인 현존으로서의 은혜는 인가의 자유롭고 인격적인 응답의 여지를 만들고 요청함을 드러내는 이점이 있다.
세례의 의미
기독교적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으로 들어가는 입회를 나타내는 성례다.
1. 세례의 위임은 예수의 명령에서 자주 발견된다. 사실 세례는 전적으로 예수의 명령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례는 자신을 복종시켜 세를 받은 예수의 행동에 근거한다.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소명,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응답을 시작한다. 세례를 받는 이 행동을 통해 예수는 잃어버린 인간성과 연대한다. 예수의 세례는 이 세상의 죄인과 소외된 자들과의 연대를 의미하는 동시에 성부의 뜻에 대한 그의 철저한 순종을 의미한다. 세례는 옛 삶의 방식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출생함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기독교적 이름을 부여 받으며, 그의 삶의 전체는 신앙의 여정이 된다.
2. 신약은 세례의 의미를 여러 가지 풍성한 이미지를 통해 드러낸다. a.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묘사된다(롬6:3-4). b.세례는 죄로 물든 삶을 씻는 것으로 그려진다.(고전 6:11) 세례에서 삶의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윤리의 방향을 부여 받는다. c. 세례는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것과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요 3:5, 행2:38) d. 그리스도의 몸과의 일체이다. 이런 일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동시에 서로 서로에게 연합하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도 연합한다. 세례에 의해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편입된 우리는 더 이상 고독한 개인이 아니다. e. 세례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표지다. 세례는 이런 통치를 향해 신앙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운동의 시작이다.
3. 유아 세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루터와 칼뱅은 유아 세례는 옹호했다. 하지만 이후 침례교 전통은 유아 세례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해왔다. 개혁주의 신학의 칼 바르트도 유아 세례가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제자도로 들어가는 시작으로서의 세례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을 들어 강한 반대 의사를 제기했다. 세례에는 하나님의 은사와 인간의 응답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에 대한 자유롭고 기쁜 인간의 응답이기 때문에, 또한 이런 응답은 인간의 심오한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에, 바르트는 유아 세계가 세례의 의미를 모호하게 왜곡한다고 믿었다.
바르트의 이런 반대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실제적 쟁점은 어떤 조건 하에서 유아 세례를 베푸는 것이 신학적으로 허용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성인 세례든 유아 세례는 양자에 공동적인 요소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의 수혜자라는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것을 요구 받는다는 확증이다. 즉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가 행해졌음을 선포한다. 두 가지 형태의 세례는 각각 따로 있을 때보다는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더욱 효과적으로 세례의 온전한 의미를 드러낸다. 서로 상보적이다. 만약 성인 세례만이 배타적으로 실행된다면 마치 신앙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응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주도권에 선행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다. 또한 공도체가 지니는 중요성을 무시하는 잘못된 개인주의를 조장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유아 세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주도권을 선언한다. 유아 세례는 가장 절망적인 때조차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긍정함을 증명한다. 유아세례는 세례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장하는 과정의 시작임을 또한 이런 성장 과정은 신앙 공동체의 지원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성령은 유아에게도 역사하는가? 성령은 자녀의 부모와 보호자와 교사와 친구들의 사역을 통해 유아와 자녀의 삶 속에서 역사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역사한다.
그러므로 유아 세례의 실행이 교회의 삶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아 세례는 허용될 수 있다. 다만 유아 세례가 통상적인 사회적 의식으로서 실행되고 있는지, 값싼 주술적 은혜의 형태로 실행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유아 세례가 올바른 책임과 함께 실행된다면, 이 성례는 창조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권을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유아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적인 은사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의 인간의 연대를 나타내는 표지가 된다. 인간 삶의 어떤 단계에서도 우리는 서로로부터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소회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깊은 관계성 속으로 이끈다.
마지막으로 유아 세례는 신앙의 공동체에게 또한 가장 특별하게는 수제자의 부모에게 언약적 책임이 있음을 나타내는 표지다.
4. 오늘날 세례신학에 있어 특별한 쟁점은 세례식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문제다. 즉 하나님의 특정한 성(性)으로 표현하는 언어를 피하기 위해 전통적인 삼위일체 정식을 대신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해도 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주의 깊게 고려할 만한 제안 중 하나는, 전통적 이미지를 성과 무관한 언어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세례 공식문을 확대하자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형태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즉 생명의 근원과 생명의 말씀과 생명의 은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의 거행은 교회 초창기부터 있어온, 복음 전통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다.
1. 세례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토대가 되는 성례라면, 성만찬은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탱하는 성례다. 성만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제나 새롭게 삶과 사랑을 공유하심을 표시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이웃과의 교제를 더 깊게 맺도록 이끄시며 세상 속에서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강화한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창조 및 구원 사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결합한다.
2,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 임재의 본질에 대해서는 교회들 사이에 자주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 중, 다음 네 가지가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a. 첫 번째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적인 화체설이다.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라는 요소의 ‘본체’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체로 실제적으로 변화된다.
최근에 전개된 가톨릭 신학은 화체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 일부 신학자는 화의설, 즉 떡과 포도주의 의미의 변화를 제안하며, 또 다른 신학자는 화목적설, 즉 떡과 포도주의 목적의 변화를 제안한다. 이런 해석의 주요 요점은, 어떤 대상에 대한 정의는 그것의 정황과 용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b. 성례에서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또 다른 견해는 루터의 “성례적 일치”의 교리이다. 비록 루터 자신은 이런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지만 이 견해는 자주 공재설로 불린다.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라는 “요소 안에, 요소와 함께,요소 아래에” 임재한다. 마치 불이 타오르고 있는 장작에 스며들고 동시에 그 장작을 둘러싸는 형국과 같다. 루터의 교리는 그리스도가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임재함을 강조한다.
c. 세 번째 견해는 칼뱅주의 전통 혹은 개혁주의 교회 전통의 중심 흐름 속에서 발견된다. 이 해석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확증한다는 점에서 가톨릭과 루터교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리스도가 성령의 연합하는 권능에 의해 임재하며 그리스도는 신앙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편으로 칼뱅은 그리스도를 물질적 요소에 기계적으로 덧붙이는 모든 해석을 거부한다. 칼뱅이 보기에, 우리가 신실하게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성령의 은혜와 권능에 의해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연합시킨다. 칼뱅이 그리스도는 육적으로 임재하지 않고 “영적으로” 임재 한다고 했을 때 그가 의미했던 바는, 그리스도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 신앙에 임재 한다는 점이었다. 칼뱅은 “성례는 성령의 권능이 없이는 유익하지 않다”고 요약했다.
d. 또 다른 해석은 기념설로 알려진 견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만찬 거행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하고 상기하는 행위다. 이 해석에서는 ‘실제적 임재’라는 말 대신에 생동감 있는 또는 생생한 ‘기억’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세례와 성만찬의 규례는 본질적으로 헌신과 순종의 행동이다.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수단을 통해 신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사역의 이야기를 전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그와 동일시됨을 표현한다. 신사즌 세례와 성만찬의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구원의 드라마를 회상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충성과 순종을 선언한다.
3. 성만찬 해석에서 다음 두 가지 주요한 경향은 계속 상호 긴장 속에 있다. 현재의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만찬은 창조와 구원 사역에 대해 성부에게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희생 제사고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드렸던 희생의 재현이며,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행위 신자의 연합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개신교인에게 성만찬은 우선적으로 식사다. 식사에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 자신이신 선물을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다시 때까지 기억하고 축하하며 선포한다. 성만찬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간의 안에 있던 본래적 목적, 서로 공유하며 사랑하는 공동의 삶을 드러낸다. 사랑과 순종과 섬김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삶의 시작이며 요약인 예수 자신의 세례와 기독교의 세례가 분리될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역 내내 죄인과 가난한자들과 함께 나누었던 예수의 식탁 교제의 실천과 성만찬의 의미는 분리 될 수 없다. (막2:15, 눅15:1-2)
세례, 성만찬, 윤리
나는 세례를 연대의 성례로 성만찬을 나눔의 성례로 표현했다. 기독교 공동체의 두 가지 중요한 례를 이런 식으로 기술하는 방식은, 성례적 행위와 기독교 윤리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연관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장점이 있다
세례는 죄와 소외로 가득한 세상과 맺는 하나님의 연대성을 나타내는 성례다. 기독교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참여하는 첫 단계다. 그리스도인은 세례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 전부터 타자와 연대 맺기를 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녀며 동반자가 된다. 또한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상호 간에 맺는 연대성을 나타내는 성례다. 특히 우리와는 다른 이질적이고 낯선 심지어 우리를 두렵게 하는 자들 모두와 맺는 연대성을 나타낸다. 세례는 연대성을 창조함으로써 죄인인 인간이 만들어놓았던 분열과 장벽을 비판하며 무너뜨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여타 다른 분열을 일으키는 이데올로기가 교회 내에 존재하거나 교회의 지지를 받을 때 비난이 가중되는 것이다. 또한 세례는 인간과 신음하는 창조세계 전체의 연대성을 나타내는 성례다. 세례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만물의 약속된 변혁을 알려주는 표지다. 다 세례의 행위 속에는 자연도 함께 있다.
세례가 다차원적 연대성을 의미하듯, 성만찬도 다차원적인 나눔(공유)을 의미한다. 첫째, 성만찬은 하나님이 삶을 인간과 함께 나늠을 나타내는 성례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또한 인간이 서로의 삶을 나늠으로써 하나님의 삶에 참여함을 나타내는 성례다. 성만찬은 낯선 자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하는 ‘성만찬적 환대’를 실천한다. 책임감을 갖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과 지상의 재화를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헌신적으로 분배하는 행위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곡식과 포도나무 열매라는 자연적 요소로 구성된 성만찬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공유된 삶과 공동의 최종적 목적을 상징적으로 인정하는 성례다. 성만찬 안에는 인간의 구원과 공동체의 구원과 우주의 구원의 상호 연관성과 상호 의존성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안수 받은 목회 사역의 의미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와 화해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모든 이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면 “안수받은 사역”의 의미와 필요성은 무엇일까? 안수 받은 사역이라는 개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과 모순되지는 않는가? 또한 이런 개념은 교회 내에 엘리트주의와 위계질서를 조장하지 않는가?
1.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되는 “사역”이라는 단어는 일반적 의미와 특수한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부름 받았음을 강조했다. 이런 일반적인 의미의 사역은 종교 개혁 전통에서 ‘만인 제사장설’로 자주 표현된다.
그러나 동시에 ‘기독교 사역’이라는 말 속에는 특수한 의미도 있다. 성령이 교회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 중에는 어떤 사람을 말씀 사역과 성례 사역으로 부르고 안수하는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역은 복음 선호 성례 집행 교회의 삶과 봉사를 위한 지도력 행사와 같은 활동을 정기적으로 책임감 있게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이 임명하신 안수직이다. 이런 활동은 신앙 공동체의 삶과 행복에 있어 핵심적이기 때문에 우연적이거나 무계획적으로 수행될 없다.
2, 말씀과 성례 사역의 소명은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 모두를 가진다. 성령은 사람들을 이런 사역으로 부르고 특별한 은사들을 제공하며, 복음 사역에 삶을 헌신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안수직으로의 소명은 또한 외적인 측면도 가진다. 안수직은 신앙 공동체에 의해 전달된다. 따라서 교회를 위한 지도자를 준비하기 위해 학교가 세워진다. 거기에서 사역의 후보자는 학문과 기도의 방법을 수행하고 소명을 분별한다. 동시에 사역의 공적인 소명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신하여 회중에 의해 제시된다.
3. 안수는 존재론적으로 아니라 선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안수는 존재론적 신분의 신비적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즉 안수받은 자를 다른 그리스도인들 위로 고양시키는 신비적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안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성령의 권능 안에서 위임을 받고 권한을 부여 받는 행위다.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위해 안수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다른 사역과 비교하여 “고차원적”이며 “온전하다”고 보는 견해는 전혀 성경에서 찾을 없는 생각이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계 질서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교회의 삶에 큰 상처가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씀과 성례의 사역을 단순한 기능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다. 사역을 맡은 자는 사역의 임무와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안수 받은 사역은 구별된 소명으로서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역할도 아무나 행하는 일도 아니다.
신학은 다음의 가지를 피해야 한다. 안수받은 지도자와 나머지 하나님 백성을 분리하는 사역의 신성화를 피하는 동시에, 교회의 안에서 사역자의 직무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최소화하는 사역의 폄하 또한 피해야 한다.
4.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특징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예수자신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막10:45) 모든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효과적인 섬김을 감당할 있도록 그들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세우는 것이다. 사역은 권위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권위의 행사를 포함한다. 안수 받은 사역의 권위는 사람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전적으로 근거한다. 권위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함께 협력하면서 항상 행사되어야 하는 권위이다.
직제는 교회의 삶에서 확실히 중요하다. 교회 정치 구조 역시 참으로 중요한 문제다. 관건이 되는 것은 교회 질서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일치하느냐 여부며, 이 질서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성령의 은사와 자유를 질식시키느냐 아니면 지원하느냐는 하는 것이다.
5. 말씀과 성례의 사역으로의 안수는 배타적이지 않고 오히려 포괄적이다. 이런 직무를 행사할 때는 성, 인종, 성적 지향성에 근거하여 어떤 집단의 사람을 배제해서는 된다. 오늘날 기독교 사역에서 일어난 가장 중대한 발전은, 성령이 말씀과 성례 사역의 소명을 위해 남성뿐 아니라 여성 또한 부르심을 많은 교회가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