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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아들들과 적조현상>의 줄거리:
하나님의 아들들과 적조현상
(롬8:18~25)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적조현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이전에 수산대학이었습니다. 지금은 부경대학으로 대학의 이름이 바뀌었는데 그 부경대학에서 바다를 연구하는 과에서 지금 박사과정 중에 있는 젊은이를 만나, 함께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적조현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적조현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갔습니다.
적조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산업 폐기물이나 이 삶의 폐기물들이 바다로 유입이 되면서, 바닷물이 굉장히 많이 더러워짐과 동시에 유기 양분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더러워진 유기 양분이 가득한 바닷물에 플랑크톤 미생물들이 이상적으로 증식을 하게 됩니다, 아주 폭발적으로 증식을 하게 되요.
이때 바닷물이 파란 색깔을 띠게 되는데, 녹색을 띠기도 하고, 또 갈색을 띠게도 되고 적색을 띠게도 됩니다.
짙은 초콜릿색의 바닷물로 바뀌는 것을 바로 적조현상이라고 얘기를 하지요.
일단 이게 이렇게 돼버리면, 인근 바다에서 어패류 양식업을 하는데 아주 초토화 되어 버린다는 얘기에요.
산소가 부족하게 되고, 물에 독성이 생기면서 어패류가 살아남지를 못한답니다, 어패류의 호흡이 불가능해 져서.
이런 일들이 남해안 쪽에서 주로 생겼었는데 그리고 서해안이나, 꿈에도 꾸지 않았던 동해안까지도 적조현상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뭐 황토를 뿌려본다, 대책을 간구하지마는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답니다.
일단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양식하는 어패류, 특히 물고기들을 다 놔줘 버리자 하는 그런 결정을 하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근 바다에서 놀거나, 또 멀리 갔더라도 또 돌아올 수도 있고 그러니까, 오히려 피해가 좀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느냐, 적조 때문에 그냥 몰살시키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는데, 생태학자들이 또 들고 일어섰다는 거예요.
양식장에 가두어져 양식되고 있던 물고기들을 다 놔줘 버리면 포식자로 변한답니다.
그래서 인근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잡아먹게 되는데, 물론 잡아먹는 것이 당연합니다마는, 변수로 작용해서 주변에 생태계다 다 파괴된다는 거예요.
본래 있던 물고기들이 주변의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건 상관이 없는데, 양식하던 물고기들이 나타나가지고 물고기들을 작은 것들을 잡아먹게 되면, 이게 포식자로 변하게 되고 변수로 작용하게 되면서 생태계가 파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박사과정에 있는 젊은이 얘기는, 궁극적으로는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손대면 댈수록 망가진다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예수 잘 믿으라고, 바다를 살리려면 예수 잘 믿어야 된다는 걸 이제 알겠냐? 그랬더니, 하나님 밖에는 다른 답이 없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지금 해 주고 있는 겁니다.
뭐라 그럽니까?
22절에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을 겪는대요.
아니 2000년 전에 산업이 발달하기 이전에, 그 옛날에 무슨 피조물이 그렇게 탄식을 했겠습니까?
자연이 파괴됐겠습니까? 환경이 파손됐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참 영적인 안목과 통찰이 뛰어 나지요?
우리가 다 아느니라 그랬지만 알고 있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가 다 모르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함께 고통을 겪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는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누가 듣고 있습니까? 실제로.
요즘에 와서야 겨우 환경보호가나 이 생태계를 우려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 자연이 파괴되면 그 손해가 인간들에게 미친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이제서 조금 보편화 돼가고 있는 상황이지요.
2000년 전에 누가 이걸 알았겠습니까?
자! 피조물의 탄식!
왜 탄식합니까?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탄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피조물의 탄식을 없애려면 환경의 파괴가 없어지려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나타나야 해결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피조물이라는 것은 삼라만상을 뜻하는 것이지마는, 좀 더 그 의미를 우리 피부에 와 닿게 이해하자면 우리의 환경이 탄식하고 있다는 거예요.
내 가정환경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내 직장환경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하고 있는 사회적 환경이 탄식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날마다 뉴스에 나오는 모든 불행한 기사가 다 뭡니까?
사회적 환경이 탄식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래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 가정환경이 탄식하고 있고, 내 사회 환경이 탄식하고 있고 내 직장환경이 탄식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오늘 로마서에서 2000년 전에 하고 있는 거예요.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자, 적조현상과 같은 자연파괴 환경파괴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환경, 그러니까 내 삶의 자연환경이든 사회적 환경이든 환경일체가 다 탄식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답게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의 조건과 삶의 환경이 탄식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돈이 없는 환경이 주어져 있습니까? 그래서 괴롭습니까?
건강 때문에 괴롭습니까? 가족 중에 누가 말썽을 일으켜서 괴롭습니까?
누가 사고를 당했습니까?
하여간 어떤 식이든지 내 마음에 괴로움이 느껴지는 환경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경자체가 지금 탄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이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봅니다.
18절에 보면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하는 얘기가 나와요.
그리고 곧바로 19절에 너무 뜬금없어 보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논리의 비약이 있는 거 같아요, 단절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근데 이게 그렇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피조의 세계 우리의 자연환경과 우리의 사회적인 삶의 환경이 탄식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고 있냐 하면, 현재의 고난을 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현재 이 삶의 이 순간에 고난을 감수해야 된다는 얘기인데, 이 고난을 감수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 않고, 그래서 우리의 삶의 환경이 탄식하고 있다는 얘기에요.
무슨 얘기입니까? 왜 고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 어제도 잠깐 말씀을 나눴습니다마는, 현재의 고난, 우리가 로마서를 이해할 때, 항상 모든 로마서 구절을 이해할 수 있는 key가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믿음이 뭡니까? 마음 심장을 꺼내서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달린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죽어 내 마음이 관심을 갖고 내 마음이 붙잡혀 있는 모든 대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마음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삼겹 삶이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이 하나님께 마음 심장을 꺼내서 드리는 과정 중에 어쩔 수 없이 현재의 고난이라고 하는 고통이 따른다는 이야기에요.
그거 왜 그러냐?
주님께서 뭐라 하시냐 하면, 마가복음 10장 29절에 거듭 반복해서 인용되는 구절입니다마는,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나와 복음의 위하여.
그러니까 주님과 주님께서 역사하신 복음 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는 얘기입니다.
이게 바로 마음 심장을 꺼내주는 과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 집에 가 붙어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집을 아끼고 집을 얻으려 하고, 집을 더 크게 확장하려 하고, 집이라고 하는 문제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그리고 형제에 가 있고 자매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 있고, 자식에게 마음이 가 있고, 전토라는 것은 내 재산을 말합니다.
내 소유를 말하는 것이고, 내 물질을 말하는 것인데, 그 소유와 물질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붙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얘기는, 이 마음이 이렇게 붙어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된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연합해서 주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붙어 있는 집에 대해 죽는 것이고, 형제나 자매와 어미와 아비와 내 자식에게 대해 죽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내 물질에 대해서, 내 소유에 대해서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고난이 따른다는 얘기에요.
그리고 지금 갖고 있는 소유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꿈, 갖고 싶은 것들 정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갖고 싶은 직한 것들 모든 것들에 대해 죽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고난이 따른다는 거예요, 이게.
갖고 싶고, 먹고 싶고 가지고 싶고 뭐 지니고 싶고 유지하고 싶은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이 우연치 않게 나와 친구가 되었고 이제 결혼을 하고 싶은데, 갑자기 주님이 십자가 지고 나타나셔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고 얘기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어야 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마음에 고난이 따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사도 바울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정말 아리따운 여인과 친해져서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인데, 마음이 그 여인에 대해서 죽으라는 얘기에요.
그 여인과 결혼하면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그 마음을 여인에게서 떼서, 하나님께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보내드리게 될 때는, 여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때에 느끼는 기쁨은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이 주어진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걸 믿는 게 기독교인이라는 거예요.
돈 많이 벌어서 갖고 있게 되는 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고, 천국이 나의 기업이 돼서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하나님 나라를 내가 소망 가운데 느끼고, 그것으로 만족하게 될 때의 기쁨과 이 비교가 안 된다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마음 놓고, 이 세상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서,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 죽으라는 얘기에요.
왜 이렇게 지금 이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얘기하는 겁니까?
그럴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됩니다.
그럴 때 내 삶의 환경도 탄식이 그쳐진다는 거예요.
어! 이상한 식으로 논리가 지금 발전되어 가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의 심장을, 이 세상에 붙어 있던 것들을 다~ 회수해 가지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그것들에 대해 죽음으로써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해서, 승천한 주님 따라서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보내지는 것, 이거 십자가 기도밖에 없어요.
십자가 붙잡고 기도할 때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다른 대단한 방법이 없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믿음의 기도를.
이럴 때 마음 심장이 하나님께 가서 그곳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인데, 이때 피조물의 탄식이 그쳐진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가ㄴ까지 다 만드신 뒤에,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축복의 명령을 주십니다.
근데,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할 운명에 처해 있어요,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판단을 할 수 없는 정복자, 판단을 할 수 없는 다스리는 자.
어떻게 정복하고 어떻게 다스립니까? 내가 판단할 수가 없는데.
왕이 왜 왕입니까? 스스로 판단하는 게 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왕입니다.
근데 선악과가 있으므로 판단을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정복합니까?
바로 내가 판단하지 않고 판단의 공간을 비어두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판단으로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창세기의 말씀을 적용하면 사도 바울이 왜 지금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겁니까?
내가 내 가정을 사랑해서, 아비나 뭐 어미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을 사랑해 가지고 마음을 잔뜩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판단하면서 내 가정을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이때, 내 가정환경은 탄식하기 시작합니다.
가정을 이끌어가고 싶어 하시는, 나를 통해서 가정을 이끌어 가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내 가정환경이 호흡을 못 하는 거예요.
우리의 삶의 환경이 되어 지고 있는 자연이, 산과 바다와 강이, 우리가 마음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통해 강과 바다와 산에 미치지 못하게 되면서,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적조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저는 과학적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한 가지 막연한 것 같지만 이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면서 마음에 갖는 확신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자연환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아까 말씀드렸던 그런 젊은이들, 바다를 연구하는 그런 젊은이들이 바다라는 과제를 놓고, 십자가에서 바다에 대해 죽으므로, 바다에 대해 마음을 두고 있었던 그 마음을 회수해서 하나님께 드릴 때, 그 바다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그 젊은이에게 아이디어로 주어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바다가 이 젊은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호흡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자식의 환경도 내 가정의 환경도 내 직장의 환경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내가 처해서 살고 있는 그 삶의 환경이 하나님의 섭리를 호흡할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호흡할 수 있고, 창조주이시고 당신이 보시기에 좋게 세상을 만들어 가시고 이끌어 가시려는, 그 하나님의 소원을 호흡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때.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고난을 감수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갖고 싶고, 먹고 싶고, 쓰고 싶고, 이루고 싶은 많은 것들,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자꾸 빨려 들어가는 내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순간마다, 그것들에 대해 죽으므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내 마음을 같이 묶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우리 마음을 그냥 드린다, 드린다 해서 드려지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할 때에, 부활승천하신 그 과정 주님의 그 과정을 따라 올라가면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성령이 우리 마음에 주어지는 겁니다.
이래서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도달할 때, 하나님께 드려질 때에, 드디어 우리 몸이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가 흘러 내려와 이 세상으로 번져 나감을 통하여, 나의 삶의 환경이 숨을 쉬게 되는, 하늘을 숨 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환경뿐만이 아닌 거예요.
우리가 읽은 부분 아랫부분에 보면 마지막에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니’
몸의 속량.
환경뿐만이 아니라 우리 몸도 육신을 따라서 사는 것이 멸망의 길이다, 육신을 쫓아가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다, 별의 별 얘기를 다했어요.
그러나 육신이 악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육신이 못돼먹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 육신을 따라 사는 멸망의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행동을 하게 되느냐?
마음이 육신에 붙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마음이 육신에 붙었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육신에 붙지만 않으면, 우리 육신은 육신대로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움직여 갈 수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우리 몸도 피해자라는 겁니다, 내 마음이 몸에 붙어 있기 때문에.
멀쩡하게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는데, 이 몸이 몇 살 때는 어떤 모습이 되고, 뭐 머리카락이 몇 개가 되고, 흰 머리가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떤 얼굴 모습으로 바뀔 것이고…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내 마음이 몸에 갖다 붙는 바람에, 이 몸도 피해자가 돼가지고 몸도 탄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마음 하나가 이 세상의 몸에 붙음으로서 몸이 만나는 모든 것들이 다 탄식하게 되고, 그게 사람이든 환경이든 그게 자연환경이든 사회적 환경이든 모든 게 다 탄식하게 되고, 궁극적으론 이 몸도 피해자가 돼서 이 몸도 탄식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큰 복음이냐 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모~든 것에 대해 내 마음이 죽고, 하나님께 우리 마음 심장이 드려지기만 하면, 소망과 믿음 가운데서, 오늘 마지막에 그러잖아요? ‘누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리요’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보이는 것보다 더 확증적으로 우리 마음이 느끼게 해 주는 거예요.
하늘나라, 하나님아버지를,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게 해 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점점 더 이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 것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거예요.
자꾸 기도하고, 매일 같이 십자가를 붙잡고 죽으므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 확실하게 내 마음에 보이는 겁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걸 소망이라고 얘기해서 오늘 마지막 구절에 소망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믿음과 소망 가운데, 믿음이 뭐에요?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어서, 내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게 믿음이고, 그렇게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때에, 성령님께서 그 하늘을 느끼게 해 주셔서, 마음이 하늘을 느끼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소망입니다.
이 소망 가운데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만족과 기쁨을 영광스럽게 누리는 가운데,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 마음이 자유로워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될 때에, 우리가 육체가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내 육체가 가고 있는 모든 곳의 환경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소원을, 하늘을, 천국을 호흡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당장은 아니라도 오늘 내일 모레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들의 모습으로 확정됨을 통해서, 내가 가고 내가 만나는 모든 나의 환경들이 나와 내 마음의 심령과 마찬가지로, 천국을 호흡하여 기뻐 뛰놀 수 있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