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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이룰 때
전도서 3 : 16 - 22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 악이 있도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전도서 3장 16-1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사람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은 그렇게 많지 못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서 예배하지만 내일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엄격히 말하면 내일보다도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두 가지는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사람이 세상에 살다가 한번 죽는 것 이 사실만은 너무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공동 묘지에 가면 장의사의 차가 줄을 서 있는 것을 가끔 봅니다. 저는 이것을 볼 때 마음속에 크게 느껴지는 사실 하나는 “아, 나도 언제 저 가운데 하나로 끼우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 마음에 숙연해짐을 느낍니다. 사실 우리는 다 줄을 서 있습니다. 공동 묘지로 가는 줄에 말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나는 데는 다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꼭 나이가 많아서만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도 알곡과 쭉정이를 분간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양과 염소를 갈라놓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어느 것이 알곡인지 어느 것이 쭉정인지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는 분명히 갈라질 것입니다. 양과 염소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의 불꽃같은 눈 앞에는 누구도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갈라놓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 “이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날을 정해 두셨다”고 사도행전 17장 31절에 선언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선악간에 그 행한대로 갚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2장 16절에도 “우리의 은밀한 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드러나고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날이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들으리만큼 말씀하셨지마는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심판을 부인합니다. 허긴 심판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그런 죄를 감히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전에 노아의 때를 보세요. 하나님의 사람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세상에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해서 물로 심판하겠다고 하시면서 노아더러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 따라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용되어 일하며 삯을 받으면서도 노아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저 노인이 미쳤지, 홍수는 무슨 홍수야, 또 홍수가 나면 이 산꼭대기까지 물이 올라올 것인가?” 그들이 홍수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심판을 부인하던 그때 사람들 다 홍수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불의 심판을 기억하시지요. 롯이 하나님의 사자들의 말을 듣고 그의 딸들과 정혼한 사위 두 사람에게 찾아가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을 받게 되었으니 어서 빨리 피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위들이 장인의 말을 아니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 겨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심판을 말씀합니다. 심판을 믿고 안믿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안믿는 사람은 반드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21절에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짐승은 땅 아래로 내려가므로 말할 여지도 없습니다. 짐승은 자기 한 일에 대해서 책임 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혼이 위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가서 그가 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왜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서도 심상하게 생각합니까?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상을 보세요. 요사이 한참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소위 3대 사건이 어떠합니까? 그 반응이 어떻습니까? 아파트 특혜 분양 때문에 문제가 된 사람들을 향해서 “그 사람들 재수 없구먼” 무슨 말이에요? 아, 요사이 누구나 다 그 정도는 하는데 신수 나빠서 걸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씨 스캔들에 관해서 어느 여학교 교장님이 학생들이 하는 말을 교사들이 듣고 와서 하는 말을 들었다며 국회의원이 여고생을 범한 후 수습하기 위해 보상금조로 2천만원 3천만원 입에 오르내리니까 학생들 하는 말이 “나는 그런 것하나 안 걸리나?” 하더랍니다. 이런 세상입니다.
심판이 있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의 양심도 이후에 내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하여 선악간에 보응을 받으리라고 하는 느낌을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고 있습니다. 죄를 범하면 왜 양심이 괴롭습니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작은 심판입니다.
심판의 사상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계시 종교가 아닌 자연 종교에서도 흔히 가르칩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쓴 책 가운데 오라토굴드라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군인이 크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다 죽은 줄 알고 그 시체를 불사르려고 나무 위에 놓고 불을 지르려 하는데 죽은 줄만 알았던 이 군인이 다시 살아서 일어났다는 기록입니다. 그가 깨어나서 하는 말이 “내가 죽어서 어떤 곳에 가니 두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에는 심판하는 이가 있어서 세상에 살 때에 한 모든 일에 의해서 심판을 하는데 옳은 일을 행한 사람은 오른편으로 가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보이고, 악을 행한 사람은 왼편 길로 가게 하는데 가는 사람마다 가슴에 프랑 카드를 달고 거기에는 자기가 지은 죄목을 크게 쓰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고 하는 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민족이고 간에 다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의 양심이 지적하여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이성도 심판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치로 생각해 보아도 꼭 그래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도덕적인 우주인데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서 육신의 고통, 어떤 재난, 양심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 땅에서 이여 지옥 형벌의 그림자를 맛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현세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전생애가 끝난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 생활만 가지고는 완전히 그 사람은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심판하시지마는 사사건건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심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도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행할 수가 없습니다. 국가의 법정에서 죄인을 공의로 재판하는 것은 국가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법이 범하지 못할 죄를 많이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법정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뭐랬어요?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하였습니다.
세상에서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법이 판단하지 못합니다. 또한 죄가 있는 것도 분명히 모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죄를 많이 범해서 마땅히 벌 받아야 할 사람을 벌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땅히 잡아서 사형에 처할 사람인데도 잡지 못해서 벌받지 못하고 그런 사람은 오히려 큰 차를 타고 다니며 행세하고, 반면에 무죄한 사람이 억울하게 죄목을 뒤집어쓰고 여러해 동안 감옥에서 고생을 하거나 사형을 당하는 억울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서양의 재판소 꼭대기에는 어떤 동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 있는데, 재판장을 만들어 놓고 그 재판장은 저울을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재판장의 눈이 수건으로 가리워 잇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의 재판장이란 아무리 저울대를 잡고 곡 공평하게 하려고 하지만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공평이란 불완전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는 공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공의의 심판은 누가 합니까?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심판장이 되시는 것은 가장 적합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같이 모든 시험을 당하시지만 죄는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눈가린 재판장처럼 사람을 알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속 안에 있는 것을 다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모든 슬픔과 모든 고통을 친히 당하셨으므로 얼마든지 우리의 형편을 이해하시고 동정하실 수 있는 재판장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재판장을 모실 때 지극히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표준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책들이 펴졌고”하는 것을 보니 책이 한 권 뿐 아니고 여러 권인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 짐작이지만 한 사람에게 하나씩 책이 있는가 봅니다. 그런데 그 책 가운데는 우리 사람의 일생의 모든 생각, 말한 것, 행동한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책을 쓰는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 것이 있는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책을 출판했든지 안했든지 간에 누구를 막론하고 한 권의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 생활한 것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은 소설 형식으로 된 자서전을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생활 중의 내면 생활을 그대로 쓴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자랑스러운 것, 흠이라고 해도 알아서 괜찮을 것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서 보겠는데 여러분 자신이 쓰신 책인데 일생 동안 마음에 생각한 것, 누구를 미워한 것, 시기한 것, 혼자만 아는 비밀들이 하나도 더하거나 빼놓지 않고 기록한 것을 그대로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까지 다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내가 무슨 책을 쓰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책을 펴놓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밀이 공개된다는 말입니다. 어두운데서 행한 것이 밝은데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책에 대하여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누가 우리를 정죄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그 책을 대면할 때 그 책이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책이 다 펴져서 공개될 때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있습니까? 이 책들만 있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책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책이 있는데 그 책은 무슨 책이라고요? 예, 생명책입니다. 이 책은 한 권입니다. 여러 권이 아닙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구원을 얻을 구사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길,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책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았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믿습니까?
끝으로, 행한대로 심판 받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구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가서 상을 받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후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더 많이 하고 부지런히 충성스럽게 했나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한 일입니다.
여러분, 의로우신 재판장 주님께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많은 상받을 준비를 하셨습니까? 구원은 받았지만 아무런 상받을 것이 없으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우리 갈보리 교회 성도들 모두가 상 많이 받는 영광된 구원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회있는 대로 부지런히 일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