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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성경본문 : 잠언 30: 7-9
7.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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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한 번 죽는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성경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죽음을 안 보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로 그런한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죽습니다.
왜 죽어야 하는가 하면 우리 인생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 신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한 번 죽는 것을 굳이 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초대 교회는 그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하늘로 데려 가시면 됐습니다.
그러나 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한 번 죽게 그냥 두셨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휴거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그들이 참혹하게 죽게 두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까지 해서 믿음을 보이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초대교회에 순교자들이 죽게 그냥 두셨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러나 육체는 어차피 한 번 죽어야 하는 것을 정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두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례 요한입니다
죽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생명이 있는 자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육체의 고통이 오고 또 혈과 정을 끊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저 역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를 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도의 믿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육체는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내 안에 있는 영이 실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영의 비밀을 깨닫고 믿고 있는 성도는 죽음에 대해서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떠한 상황에서의 죽음도 인정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입니다.
누가 그것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인생 스스로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 육체의 혈과 정을 끊을 수 있게 역사를 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난 영이 그러니까 우리의 실체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믿게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 팔십년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 때를 제외하고 그리고 총기가 사라지는 60세 이상이 지나고 나면 실제 우리 인생은 불과 40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40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우리는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그의 생명이 거해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40년이라는 세월이 깁니까? 초대교회와 같이 농경 사회를 살아가던 시대와 지금고 같은 시대는 너무도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실 이 40년 동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버겁습니다. 그리고 이 40년 동안의 삶이 우리 인생의 후반부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그동안에는 세상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40년 동안이 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연 이 기간 동안에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 안에 들어가 매너리즘에 빠져 복음도 듣지도 못한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청년의 때입니다
7-80년을 산다고 할 때를 가정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고도 많이 나고 있고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다 보니까 몇 살에 죽을지를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 구원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정말 간절하게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우리 육체는 잠깐입니다. 그래서 주의 형제 야고보는 우리에게 너희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이 영생을 받고 있습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그 순간의 정점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받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각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사람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살아가고 있지만 영생을 얻지 못하고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내가 죽기 전에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다모래 같은 다수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도 성경에서 남은 자가 누군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죽기 전에 받아야 합니다. 죽은 후에는 영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이 끝이 나면 영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오해를 해서 자기가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8:22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 제자 중에 하나가 자기 부친이 죽었습니다. 그 부친이 죽은 것을 알고 주님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부친이 죽었는데 나로 내 부친을 장사하고 나서 주님을 좇게 해 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참으로 냉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보면 냉정하기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장사하고 난 후에 와서 주님을 좇아도 되는데 주님께서는 냉정하게도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냉정합니까?
인간적으로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은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정으로 생각으로 하면서 성경을 보면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생명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절대로 냉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복음을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너는 산 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장사를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네가 먼저 산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 제자에게 그런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성도들 전체에게 무엇이 먼저인가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우리 안에 산 자의 영이 거하셔야 합니다. 그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역사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유월절을 지키게 하시고 지팡이를 짚고 급히 먹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 영의 생명의 일은 시간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영의 일을 너무도 소홀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 안에서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산 자인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전부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예표입니다 그들이 전부 죽은 자이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들 역시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의 일에 대해서 무지해서 자기가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죽기 전입니다
우리는 육체가 죽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육체가 죽은 후에는 구원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과 같은 죽을 때까지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가 구해야 할 일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님께 두 가지 간청을 드리니,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두 가지 간청입니다
왜 두 가지 간청을 구하고 있습니까? 그것도 죽기 전에 반드시 이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달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 두 가지를 주시지 않으면 자기가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나의 죽기 전에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경은 영생의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영생의 일이 아니라면 죽기 전에 두 가지를 받아 본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아니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영의 일을 믿고 내세의 일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받는 두 가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의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두 가지가 아니라 열 가지를 받는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잠언은 영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 세상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그런 생각은 아예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도로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그런 것은 여러분이 구원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21:4절을 보면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야고보서4:3절을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무조건 구하면 다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라는 그 말씀을 보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한다고 해서 다 받는 것이 아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입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구하는 사람이 있고 정욕으로 쓰려고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구한다고 말씀을 하니까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도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다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해도 정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욕으로 쓰려고 해도 구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 받는 것이 참으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자식들은 정욕으로 쓰려고 구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은 절대로 정욕으로 쓰려고 하면 받지를 못합니다.
정욕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를 정욕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입니다. 그 육구가 우리 이성에 좋냐 나쁘냐를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이성에 좋은 것이라도 해도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는 정욕입니다
한 가지 예입니다
하나님을 찬양을 하고 싶습니까? 그래서 교회 안에서 찬양으로 봉사를 하고 싶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찬양을 작곡 작사를 해서 노래를 하고 싶습니까? 그것 역시 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있는 여러 가지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정욕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정욕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가 믿음이 있어서 하는 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정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의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욕의 일을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욕이 무엇인지 그리고 육신의 일이 무엇이지를 모르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언을 통해서 아게의 아들 아굴이 죽기 전에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자기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구하면 주시는 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한다고 하면서 정욕을 함께 구하고 있습니다.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는 얻지 못하는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는 얻지 못하는 것을 구해서 정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생명에 대해서 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주시고 있습니다.
전도서9:4절을 보면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죽기 전에
우리는 죽기 전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은 모두가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반드시 죽기 전에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구하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은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이 구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아게의 아들 아굴과 같이 우리가 죽기 전에 이 두 가지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은 보고도 이것을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구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구한 것은 우리도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것은 우리 역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들이 받은 것을 우리도 받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보고도 그저 문자적으로 보면서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두 가지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아게의 아들 아굴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구하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이것을 구해서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여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2:20절을 보면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허탄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이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탄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전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성경적 허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주의 형제 야고보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허탄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허탄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은 율법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강해를 했습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실행을 하는 자가 믿음이 있다고 말씀을 하면서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실행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허탄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설령 누군가 아주 조금 깨달아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주일을 지키고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율법의 행위를 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허탄입니다.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가 않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에 있어서 거짓이 많아서 미덥지가 않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고 그것은 율법을 자기 육체로 지키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탄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허탄입니다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해서 거짓이 많아 미덥지 않은 것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허탄한 사람이고 그가 누군가 하면 율법을 자기 육체로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모르니까 허탄한 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허탄입니다
이것에서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일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다 허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일서1:6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로마서2:19절을 보면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거짓말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말하는 것을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전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을 하는 거짓말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은 이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거짓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는 그 뜻을 아는 것을 가지고 성경에 그대로 대입을 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두움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합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하면 영생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게의 아들 아굴은 이 거짓말에서 자기를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말을 합니까? 아니 내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에 동의를 하고 있습니까? 거짓말을 가까이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단 한 가지라도 있다면 그는 지금 아게의 아들 아굴의 바라는 것과 반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이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면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죽기 전에 율법을 지키는 일에서 멀어지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죽기 전에 율법을 잘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아게의 아들 아굴과 전혀 반대로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그것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허탄과 거짓말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짓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어두움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빛이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이 깨닫지를 못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입니까?
그들이 빛을 비추매 깨닫고 있습니까? 그들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라고 하는 모든 곳 정통이고 이단이고 할 것 없이 모든 곳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빛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아게의 아들 아굴과 같이 구하고 있지를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23:21절을 보면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디모데전서6:9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의 말씀을 반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무엇을 의미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고 마치 반대의 말씀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입니다
가난하여 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무엇을 의미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를 의미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받는 의에 대해서 가난하여 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성경을 깨닫고 이 아게의 아들 아굴과 같이 구할 수 있고 그런 성도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해 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가난해 집니까?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가 가난하여 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게의 아들 아굴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이렇게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하려 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왜 부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자는 은혜를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가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허탄과 거짓말을 멀리 하지 않게 되면 술에 취해서 가난하여 질 수도 있고 또 구원을 받으려고 부자가 되기를 바랄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지혜입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게의 아굴과 같이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구함으로 해서 스스로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6“55절을 보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디도서3:14절을 보면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두 가지를 구하고 있습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두 가지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전혀 구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잠언에 이 아굴의 잠언을 기록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을 사는 지혜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은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로 성도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이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 양식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 살은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의 문자는 아주 열심히 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생명의 양식은 전혀 먹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필요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영생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교회에 나가서 목사들의 설교를 듣는 것으로 필요한 양식을 먹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라는 이 말씀을 보고는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자기가 물질적으로 적당하게 사는 것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너무 많아도 스스로 정죄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런 물질에 대한 말씀이 아닌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양식을 먹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를 위해서 먹는 양식을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위해서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율법에서 멀어지게 해 달라고 하는 것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꼭 필요한 양식을 먹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게의 아들 아굴이 구하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욕으로 쓸 것을 교회 안에서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됩니다. 그러면 그 지혜가 생명의 양식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누가복음6:2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배부른 자입니다.
누가 배부른 자입니까? 이스라엘은 율법의 의로 배가 부른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배가 부른 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 오신 주님을 보고도 네가 누구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 했고 네가 누구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모든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고 이방의 교회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두 교회를 요한계시록에서 두 짐승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배가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져 배가 불러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지만 그들은 배가 부른 관계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술 취하지 말라
가난하여 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가난한 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난한 자가 소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들의 영혼을 도적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욕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술에 취해서 가난하여 졌으면서도 은혜를 구하지를 않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에 들어갈 쓸 것을 꾸지를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모든 일을 이루셨는데 이 이름을 욕되게 만들었습니다.
아게의 아들 아굴의 구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구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율법을 내게서 멀리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필요한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굴이 구하는 것을 얻는 성도가 되어서 구원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주신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