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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3:1-13) 은혜의 교통체증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은혜의 교통체증> 이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은혜의 교통체증'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은혜가 많아서 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교통체증하면 추석 때마다 우리가 치르고 경험하는 대표적인 경험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도로는 평상시의 도로와 다를 게 없지만 그런데 한꺼번에 차들이 몰려옵니다. 귀성객의 차가 한꺼번에 몰려오면 평소 때에 원활하게 다니던 도로가 꽉 막혀버리고 맙니다. 부산까지 도착하는데 9시간이 걸렸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자, 은혜가 내게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풍성한 은혜가운데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그 은혜의 힘을 빌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복된 생활이 안 되고, 은혜가 내게 도달하지 않고 은혜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은혜가 많아서 그렇고 은혜의 체증이 걸린 것으로 하나님이 너무 은혜를 주셔서 내게 은혜가 없는 겁니다. 주시는 은혜, 허락하시는 은혜가 너무 많아서 내게 도착하는 은혜가 없어요. 그 너무 많은 은혜를 교통이 원활하게 하기 위한 길이 있는데, 그 길만 벗어나면 은혜가 말라버리고, 숨을 못 쉬겠고, 마음이 팍팍해 지고, 기쁨이 없고 촉촉한 행복감이 없어요. 왜냐하면 은혜가 많아서 체증이 걸려버린 겁니다. 은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에 문제가 생기면서 은혜의 체증이 걸려 버린 것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적게 주셨고 안 주셨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호아하스 왕이 나옵니다. 이 여호아하스 왕이 오늘 나온 기록가운데 있었던 일을 잘 보면, 구약성경에서 반복해서 왕들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성경이 판단할 때 그 기준으로 적용하는 것이 있었는데 "다윗의 길을 걸었다는 말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의 죄를 답습했다"라는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오늘도 본문에 여호아하스 왕이 여로보암 집의 죄를 뒤따라갔다고 하는 얘기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앞에 한 번 나오고 뒤에 나옵니다. 그 사이에 여호아하스 왕이 하나님께 간구해서 응답을 받은 얘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도대체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왕들을 분별할 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왕들이 저지르는 죄가, 가장 대표적인 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집의 죄를 뒤따라갔다'는 것인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고 다시 한번 성경이 그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자, 여호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여로보암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왕 하사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곤비하게 만들어서 계속 침공하고 약탈하고 학대를 받았다고 나옵니다.
여호아하스 왕이 웬일로 "여호와께 간구하매"라는 행동을 합니다.
‘여호와께 간구한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 백성의 학대받음을 보셨으므로"라고 하는 말로 들어주십니다.
들어주셔서 ‘백성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셨으므로’라는 말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밑에서 학대받았으므로"라는 말을 그대로 씁니다. 이 저자가 똑같은 구절을 사용하는 겁니다. 아람의 침공으로 학대받고 있는 현실을 equal시키는 겁니다.
왜 equal시키느냐? 이 저자의 의도가 있는데 이 본문을 통해서 여로보암의 죄가 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드러내주는데 출애굽을 시키신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이 계실 것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가리키는 진짜 실체, 그 실체를 금송아지로 바꿔버리고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워두고 "이것이 바로 너희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그게 여로보암 집의 죄입니다.
자, 하나님이 하신 모든 활동을 다른 것으로 대체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지 않아요.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놔둡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대체시켜 버리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데 갖다 붙입니다. 태승철이란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갖다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게 여로보암 집의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죄가 본문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있느냐?
"여호아하스 왕이 하나님께 간구하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구원자가 누구냐? 역사적으로 그 당시의 아람군대의 학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준 사람이 앗수르 왕 아닷리라리 3세였다고 합니다. 역사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역사적인 기록을 놓고 볼 때 지금 여호아하스 왕의 문제가 분명히 자기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학대받음을 보시고 구해주셨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준 것처럼 구해주었는데 다시 여로보암 집의 죄로 돌아갔음을 얘기 하는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이 구원자 앗수르 왕 아닷리라리 3세를 보내서 구해 주었는데, 하나님의 활동을 이 앗수르 왕 아닷리라리 3세가 와서 자기나라가 아람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보지 않고, 나중에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일어난 일로 받아들입니다. 아마 신하들이 "그게 무슨 하나님이 구원한 것이냐"라고 그랬겠지요.
아수르의 아닷리라리 3세가 자기의 정치력과 권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아람을 치고 우리를 복속시키는 가운데 아람이 물러가게 된 것이지, 이게 무슨 하나님의 역사냐? 이렇게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이 하신 활동,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다른 이유로 설명하려는 것인데 이게 여로보암 집의 죄입니다.
이 세상의 천지만물의 움직임,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이 모르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 없고, 하나님이 하락하지 않으셨는데 일어나는 일이 없는데, 그 하나님 앞에서 이유를 찾지 않고 다른 이유를 찾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해서, 저 사람이 내 돈을 훔쳤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내 돈을 사기 쳤기 때문에, 내 자식 놈이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불행하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전부 다른 이유를 찾는데 이게 바로 여로보암 집의 죄입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아하스 왕이 어떻게 하다가 이런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여호와께 간구하매’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또 우리는 냅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구했다."라고 생각하시지요? 그게 아닙니다.
‘여호와께’ 라는 이 말의 히브리 원어의 뜻은 ‘여호와의 얼굴을 향한다.’라는 뜻이고, 그 다음에 ‘간구하매’ 라는 말은 ‘앓다. 아파서 약해지다’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의 강조형을 써서 ‘계속해서 아프다.’라는 뜻이고 ‘앓아 누었다.’라는 겁니다.
‘여호와께 간구한다.’라고 하는 뜻은 ‘여호와의 얼굴을 향하여 계속해서 앓아 누었다.’는 겁니다.
이걸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여호와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병이 났습니다.
자, 아람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아람 군대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한 게 아니라, 지금 아람군대의 학정을 아람 군대라고 하는 문제를 인식하지 않고, 여호아하스 왕이 어떻게 됐든지 이 순간만큼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구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못해 앓아 누었다는 겁니다. 그 원어의 뜻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구원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떨 때 일어나느냐? 그 문제의 해결을 향하여 "아,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자식이 공부를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자식이 서울대 들어간다고 하면 상상만 해도 기쁘다."라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꾸 그 문제 때문에 아픈 것이지요. 여러분이 마음이 아픈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아프냐는 겁니다. 아니잖아요?
모든 문제, 모든 은혜, 모든 역사, 모든 활동,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세상에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근본적인 이유를 하나님으로 정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좋은 일이 일어나든 나쁜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바로 선민들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이냐? 선민들에게서 일어나야 될 그러한 태도, 무슨 일이든지 좋은 일이면 "이렇게 좋은 일을 주신 내 하나님을 보고 싶어."라고 해야 되는데, "내가 잘 나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집안이 특별하니까"라고 나가는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이 일어나도 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마음이 앓고 마음이 아프고 하나님이 너무너무 보고 싶은 상태가 선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모든 일의 이유를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보고 싶어서 앓아 드러눕는 것이 선민인데,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다른 데로 돌려버렸습니다.
"금송아지를 바라보라."
오늘 본문에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그 선민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다시금 여로보암 죄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아, 이것은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지. 하나님이 해주신 것은 아닐 거야. 하나님과 상관없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그리움, 진짜 실재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에요.
자,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은혜의 교통체증, 은혜가 많아서 은혜가 내게 도착하지 않는다.'
여러보암의 죄는 사실 따지고 보면 인류에게 보편적인 게 아닙니까?
모든 인간이 내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외의 다른 이유를 찾고,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 좋은 일이 일어난 이유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고,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닙니까? 합리적인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이유를 추구하고, 과학적인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그 이유를 추구해 들어가고, 우린 우리대로 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사람을 원망하는 이유가 뭐예요? 목사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고 장로님을 원망하고 아무개 집사를 원망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 마음이 기분 나쁜 이유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불행한 이유가 거기 있다고 믿는 것 아닙니까? 지금 믿는 사람들 우리만 그렇게 해요?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인데 선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똑같은 여로보암의 죄를 지어도 선민 아닌 사람들은 잘만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한 번 보세요. 애굽의 문명,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하 문명, 인도의 갠지스강 문명 찬란하게 꽃 피웠던 모든 인류의 문명이 다 어디서 나타났느냐? 여로보암의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문명입니다. 요즘, 어떤 목사님들이 불교를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난리입니다.
인터넷에 어떤 목사님은 또 가세를 했더라고요. 장경동 목사님의 말은 너무 약하다는 듯이 더욱 강하게 스님들을 머리 깎은 뭐라고 하는데 난리를 치더라고요.
목사로서 그 누가 스님들조차도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그 진리의 참 맛을 맛보시고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목사가 누가 있겠습니까? 마치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모든 스님들이 내가 섬기는 내 하나님, 그리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지요. 그러나 그 말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불교의 데모에 나선 스님들보다 그 목사님들이 더 기독교를 훼손하는 것 같아요. 정말 그 분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고 선포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지를 않습니다.
여러분! 고대문명이 다 믿지 않는데서 나왔고, 로마의 화려함도 다 이방인들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리고 지금 잘 살고 있다고 하는 구라파나 미국이 기독교 때문에 잘 삽니까?
지금 거기에 들어가 있는 기독교 인구의 비율로 보면, 지금 현재 기독교가 참 기독교의 모습을 띠고 있습니까? 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저께 뉴스에 나오는 것을 보니까 일본이 10년 전보다 장수하는 사람의 숫자가 열배로 늘었대요. 십년 전보다 세배로 늘었다고 했나? 그러면 일본이 십년 전보다 기독교인이 세배로 늘었느냐? 천만의 말씀. 오래살고 돈 많이 벌고 사는 게 하나님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면서요?
지금 일본이 경제가 다시 살아났어요. 일본의 도요다와 혼다, 혼다가 지금 우리나라를 쓸고 있고, 렉서스가 쓸고 있고 예수님 잘 믿어서 그렇겠네요? 그거 아닙니다. 똑같은 여로보암의 죄를 짓습니다. 내게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 이외의 이유를 찾는 사람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잘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만 재벌 됩디까?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우리 최고의 재벌 중에서 십대 재벌 중에서 몇 명이 예수 믿습니까? 또 그 재벌들이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믿더군요. 옛날 부자들이 하던 식으로 꼭 절간 만들어 놓고 자기 집 잘되게 해달라고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요. 내가 들은 어떤 재벌인지 준재벌인지 하여간. 그게 아니지요.
이 세상에서 제일 보잘 것 없는 민족이 어느 민족이었습니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세상적으로 잘살고 못사는 기준으로 보자면 이스라엘 민족이었어요. 인류역사를 위해서, 문명을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왜 선민만 달달 볶으시냐? 똑같이 여로보암의 죄를 짓고 가는데 왜 선민만 달달 볶으시느냐는 겁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은혜가 너무 많아서 은혜가 체증이 걸린 겁니다. 도착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선민이 아닌 사람들은 아주 은혜가 원활하게 소통이 됩니다. 정말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정도의 사랑이 오고 가니까 쑥쑥 소통이 되는 겁니다. 그냥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일이 더 잘되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서울대학 가보면 안 믿는 집 자녀가 더 많아요. 돈 버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믿어 잘 법니까? 아닙니다. 불교신자들에 비하면 잽도 안 될 걸요? 불교신자들이 돈 잘 벌고 절에다가 돈 내는 것 비교하면 기독교가 헌금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디다 대고 비교를 하겠습니까? 왜 그래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신령한 은혜의 갯수가 작아요. 그러니까 소통이 원활하게 잘 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돈 없이 살 수가 없다. 예수 믿으면 가난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목사님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 번 붙어서 들이받아 버렸으면 좋겠어요. 어떤 논리에서 그따위 말을 하는지.
누가 그렇게 기독교인 중에 성경 속에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 믿어서 돈 잘 벌고 잘 살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 믿었기 때문에 카타콤에서 250년 산 것은 뭡니까? 예수 믿었기 때문에 요절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다 뭡니까? 아니에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박복하실까? 은혜가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어떻게 받아야 되느냐? 받는 방법이 여호아하스 왕이 어쩌다가 한 이 행동 속에 있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앓는 거예요.
우리 선민의 은혜와 복의 총집산은 뭐냐? 이 땅에서 돈 잘 벌고 잘 사는 게 아니에요. 250년 동안 카타콤에 들어가서 살 수도 있어요. 그러면 뭐냐? 여호와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을 갖도록 하기 위해 이 땅의 삶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보고 싶어서 앓아 드러눕는 것이에요.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이 보내고 계시는 모든 은혜가 다 내게 들어오는 겁니다. 그 은혜가 나타날 때 어떻게 역사합니까?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남태평양 섬 하나를 다 차지하고 사는 재벌이 울상을 하고 있을 때, 초가삼간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아버지를 마음속에 가득히 담고 그 하나님의 얼굴과 영광을 보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 은혜가 원활하게 소통되고 있는 것이지, 돈 벌고 안 벌고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내게 허락하시는 은사에 따라서 벌수도 있고 안 벌수도 있는 것이지요. 돈 많이 벌어야 된다고 하는 모든 목사님들이, 데모에 참여한 십만 명의 스님들보다 더 기독교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 여러분 명심하셔야 됩니다.
여로보암의 이름이 왜 이렇게 거명되는지 아십니까? 선민들의 서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엉뚱한 활동과 엉뚱한 역사를 갖다 붙이는데 복지, 풍부한 물질, 오래 살고, 적게 살고, 이 모든 문제는 우리가 얼굴을 향하여 마음 앓이를 하면서 추구해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니에요. 간섭할 일이 아니에요.
솔로몬처럼 주실 수도 있고, 카타콤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게 하실 수도 있어요. 이 세상의 삶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에요.
우리의 영역,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마음으로 앓아 드러눕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얼굴을 향하는 것이 싫어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이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은 것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게 바로 허락하시는 모든 은혜를 다 받아 누리는 선민의 모습입니다. 은혜가 너무 많아서 은혜가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여로보암의 죄가 교회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려고 준비하신 은혜의 역사와 은혜의 활동을 엉뚱한 하나님의 모습을 마음대로 그려가면서 갖다 붙이는 이 여로보암의 죄는 어찌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로보암 집의 죄가 사라지게 해 주세요. 선택받은 백성가운데 왕성하게 힘을 발휘하던 여로보암 집의 죄가 이 시대의 한국교회 안에서는 사라질 수 있도록 복음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하나님 역사하시고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함이 문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어 앓아 눕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보고 싶어 안달복달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여로보암 집의 죄가 청산되고 다윗의 길로 행하는 우리 모두의 믿음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