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인삼의 우수성
조선왕조 중종실록
조선왕실에서도 왕실의 약재나 기타 건강식품으로 다량의 인삼을 사용하였는데, 그중 풍기인삼의 효능을 인정하여, 왕실에서만 사용하도록 하였고, 그 이유로 인하여, 풍기인삼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유통이 불가능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로인해 풍기인삼 300g 은 개성인삼이나 타지역 인삼 600g 과 같은 가격에 거래가 되었음에도 물량이 없어서 구하지 못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풍기인삼 최근 현황
이후, 개성지역은 송도상인 특유의 상재를 바탕으로 인삼재배업을 융성시켜 전국으로 그 재배영역을 확대하도록 하는 경제적 바탕이 되었고, 6.25때 개성지역의 인삼재배자의 대부분이 피난을 내려왔으며, 전쟁이 끝나자, 어쩔 수 없이 풍기의 금계동 지역과 강화지역에 인삼 재배를 다시 시작하였으며, 아직까지 강화도와 풍기의 금계동에는 그 후손들의 억양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이로서 인삼재배의 발상지는 풍기인 것을 알 수 있으며, 신재 선생을 인삼재배의 원조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신재 주세붕선생 송덕비가 풍기인삼협동조합 광장에 세워져 있음)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풍기인삼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아직까지도 금산, 진안, 강화등 타지역을 제치고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우수 인삼으로 그 명품을 인정받고 있으며, 타지역의 인삼상인들도 인삼채굴시기가 다가오면 가장 먼저 풍기를 찾아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