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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 서진 (265-316) | 5호16국 (316-439) | 북조 | 북위 (386-535) | 동위(534-550)→북제(550-577) | 수 (581-618) 589년에 남북조 통일 | ||||||||||||||||||||||||||||||||||||||||
서위(535-557)→북주(557-581) | ||||||||||||||||||||||||||||||||||||||||||||||
동진 (317-420) | 남조 | 송(420-479) → 제(479-502) → 양(502-557) → 진(557-589) | ||||||||||||||||||||||||||||||||||||||||||||
고구려 | 21대 문자명왕(491~519)→
22대 안장왕(519~531)→ 23대 안원왕(531~545) 24대 양원왕(545~559)→ 25대 평원왕(559~590)→ 26대 영양왕(590~618) | |||||||||||||||||||||||||||||||||||||||||||||
백 제 | 25.무령왕 (501~523)→ 26.성왕( 523~554)→27.위덕왕(554~598)→ 28.혜왕(598~599))→29.법왕 599~600) | |||||||||||||||||||||||||||||||||||||||||||||
신 라 | 지증왕(500~514)→법흥왕(514~540)→진흥왕(540~576) →진지왕→진평왕(579~632) | |||||||||||||||||||||||||||||||||||||||||||||
일 본 | 고분시대(우지시대) → 야마토정권 → 아스카시대 → 나라시대 → 헤이안시대 |
1. 고구려
(1)고구려의 약화(519~559) :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귀족연합체제가 형성되어 왕권이 약화되었다. 531년 안장왕이 피살되고 그 동 생인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였다. 귀족 간의 갈등은 안원왕 대에도 지속되 었다. 안원왕 말년인 544년 12월 마침내 그것은 대규모 정란(政亂)으로 분출 되었다. 안원왕은 첫째 왕비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각각 아들을 두었다. 당시 귀족들이 각각 이 두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이를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불리웠다. 마침내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3일간 수도에서 양측 간의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고, 추군이 승리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초 8세의 어린 왕자가 즉위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 이다. 패배한 세군 측의 피살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렇게 고구려 내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의 군대가 가 551년 북진을 단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으 며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군을 공취하였다. 한편 돌궐(突闕)이 흥기하여, 552 년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 여세로 신흥 돌궐의 영향력이 고구려 휘하의 거란 과 말갈에 뻗쳐오고 나아가 고구려 본토에까지 밀려올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 었다.
(2)고구려의 쇠퇴(559~590) :25대 평원왕(559~590)
6세기 후반 이후 일종의 귀족연립정권체제(貴族聯立政權體制)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을 받아 안변의 비열홀주를 빼앗기고, 이어서 황초령과 마운령까지 빼앗기게 된다(568).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일화가 전하는 시절이다. 온달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결국 아차산성(서울 광진구)에서 전 사한다.
(3)수와의 항쟁(6C후반~7C초)
: 영양왕(590~619), 영류왕(618~642), 보장왕(642~668)
① 수의 중국의 통일 : 589년 수는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이에 고구려는 위기를 느꼈다.
② 여제동맹 결성: 6세기 신라의 팽창으로 나․제 동맹이 결렬되자 고구려․ 백제가 연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
③6세기 말 대외 정세: 이에 신라가 진평왕 시절 수와 연결됨에 따라 수(618년 이후에 당)․신라가 연결된 동서 진영과 돌궐․ 고구려․ 백제․일본으로 연결된 남 북 진영의 대립관계가 성립되었다.
④요서 선제공격 : 고구려는 마침내 영양왕 9년 말갈군사 1만을 거느리고 요서지 방을 선제공격하여 수의 압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도리어 수문제가 육군과 해군을 합한 30만 대군을 동원 고구려에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수 의 1차 침입이다.
⑤여수 2차 전쟁 : 수양제는 역사상 유래 없는 113만3천8백여명(후방보급부대까 지 합치면 3백만 대군)으로 612년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 문덕의 유인전술로 살수대첩에서 30만 수군을 거의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유명 한 살수(청천강) 대첩이다. 또한 수군 내호아가 이끄는 삼만 병력을 영양왕의 아우 고건무(후에 영류왕)가 대동강에서 격퇴하였다.
※여수장 우중문시(與隨將 宇仲文詩)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보낸시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어이, 중문이 한번 읽어나 보드라고?
늬 솔찬허게 잘 싸우드라? 어디 무사가꼬 늬랑 해보겄냐?
나랑 싸워가꼬 많이 묵었쓴께 인자 그만헌거이 어찌끄나?
2. 아야, 늬 검나 좋아허드라?늬가 잘 싸운지 알고 기분좋제?
나가 여그까지 매급시 늬를 델꼬왔겄냐?존말헐때 언능가거라. 늬 인자 디져부렀다.
3. 중문하이, 늬 진짜 멋도 모르드라?좋다고 여그까지 쫓아와붔냐잉.
인자 가자니 거시기허고 안가자니 껄쩍지근허고 빼도박도 못허겄쓴게 죽겄지야?
어찔래? 늬 인자 디질일만 남았는디.
④여수 3차, 4차 전쟁 : 수양제는 613년 614년 두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재차 침 입하였으나, 수나라의 국내사정의 불안과 병력집결의 지연 등의 사정으로 고구 려의 강화제의를 받아들여 퇴각하였으나, 결국 수는 61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2. 백제
(1)무령왕(501~523)
①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②지방에 담로 설치: 왕권강화를 위하여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여 왕족을 파견 하였다.
③남조 양과 통교: 중국 남조 양나라와 통교하여 영동대장군 사마왕이라는 칭호 를 받았다.
④일본 유학 전파: 일본에 오경박사인 단양이, 고안무를 파견하여 유학을 전파하 였다.
⑤한강유역 일부를 회복하여 쌍현성을 쌓았다.
⑥공주 송산리 벽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무덤의 주인공을 알수 있는 중요한 무 덤이다.
(2)성왕(523~554) : 중흥기☜매우중요
①국호 변경과 사비천도: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고, 수도를 사비로 천도하였 다.(538)
②중앙관제를 22부로 개편 : 내관을 12부, 외관을 10부로 개편하였는데, 내관을 더욱 강화한 것은 왕권강화와 관련이 있다.
③중앙․ 지방 행정구역 개편 : 중앙은 5부로 지방은 5방(방-군-성)으로 개편하 였다.
④나제 동맹 결렬: 진흥왕과 동맹하여 한강 하류를 일시 회복하였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성왕은 554년에 백제군,대가야군 및 1천명의 왜군을 포함한 3만의 군 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지금의 충북 옥천지역인 관산성 전투 에서 신라의 김무력 장군에게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이로써 433년 시작된 나제동 맹이 120년 만에 결렬되고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여제동맹)하여 신라를 공격하 는 형세가 갖추어졌다.
⑤겸익 : 백제의 무령왕(501〜523)과 성왕(523〜554) 대에 활동한 스님으로, 기 록상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도에 가서 불교를 구해온 구법승(求法僧)이 다. 인도불교를 전래하여 불교를 진흥하였다.
⑥일본에 문물전파 : 노리사치계로 하여금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유귀는 5경 을 전파하였다.
(3)귀족사회의 분열기 : 27대 위덕왕, 28대 해왕, 29대 법왕.
이 시기는 귀족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왕권이 자주 교체되던 시절이다. 위덕왕 때 대성(大姓) 8족(族)이 발호하여 왕권이 위축되었다. 실추된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북제, 진, 북주 등과 수교하였다.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 인 아좌태자는 위덕왕의 아들로 알려졌다. 위덕왕은 대가야와 연합하여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561년 음력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 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의 진흥왕은 562년 그 여세를 몰아 대가야를 공격했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대 가야 전역을 휩쓸어 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대가야의 몰 락으로 이어졌다. 법왕때 왕흥사가 창건되었다.
3. 신라
(1)지증왕☜중요
①신라국호와 왕칭호 사용: 국호를 사로국에서 신라로 개칭하고, 왕호를 마립간에 서 중국식 왕명인 왕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중국식 군현제도를 도입하여 중앙 집권화를 꾀하였다. 최초의 주가 지금 삼척지역인 실직주이다. 경남 함안지역에 최초로 소경을 설치하였는데, 아시촌 소경이다.
②우산국 복속: 이사국으로 하여금 우산국을 복속하게 하였다. 상복을 제정하고, 왕비족을 박씨족으로 고정시켰다.
③우경시작, 순장금지, 동시전 설치, 수리사업이 활발하였다.(보리 벼 일반화)
④나을신궁 건립 : 김씨시조를 제사지내는 궁이다.
Cf)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소지왕때 설치.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지증왕때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음.
⑤포항 중성리 신라비(中城里新羅碑,보물 제1,758호):
2009년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중성리비는 신라 비석의 초기적인 석비 양식을 보인다. 여기에는 신라의 지명과 인명, 관직과 관등명등이 기록된 데다 그 첫머리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있어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 비의 발견 장소가 냉수리신라비 발견 장소로부터 8.7㎞ 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인 데다, 비문의 내용이 지방민이 관여된 재산과 관련하여 분쟁이 있었다는 점, 이들 분쟁에 대해 신라의 지배층들이 합동으로 판결을 내리고 있었다는 점, 판결 이후 이들 문제에 대한 앞으로의 재발 방지를 명시하고 있었다는 점 ․이라고 추정되는 인명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신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내용을 연구ㆍ확정 지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⑥영일냉수리비 건립 :계미년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눌지왕 27년(443) 또는 지증왕 3년(503)으로 건립 연대가 추증된다. 신라를 사 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으로는 6부 갈문왕, 관등, 촌,주 도사, 사라 등 정치 제도사와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
(2)법흥왕 : 국가체제확립☜매우중요
①율령반포 :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율령을 반포하였다.
②백관 공복제정: 법흥왕은 백관들의 공복을 제정하여 중앙 집권체제를 완성하였 다. 1관등인 이벌찬부터 5관등인 대아찬은 자색, 6관등인 아찬부터 9관등인 급 벌찬까지는 비색, 10관등인 대나마와 11관등인 나마는 청색, 12관등인 대사부터 17관등인 조위까지는 황색으로 구별하여 관등체제와 더불어 공복을 제정하였다. ③불교공인 :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이념적 토대를 마련하고 국민사상을 통일하였으며, 그 자신도 법공이라는 법명을 사용하였다. 이때부터 신라는 불교식 왕명을 진덕여왕까지 사용하였는데, 삼국유사에서는 이 시기를 중고기라 부른다.
④건원 연호 사용: 신라에서 최초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Cf)건원(법흥왕), 건복(진평왕), 건흥(발해의 선왕), 건양(을미개혁)
⑤병부설치(517) : 왕권강화를 위한 군사력 장악을 위하여 최초의 관부인 병부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신라는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기구를 설치해 나가 신문왕때 예작부 설치로 중앙 관제를 완성하였다.
⑥상대등 설치(531) : 진골귀족 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을 설치하여 진골귀족과 정 치적으로 타협하고 국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⑦중국남조인 양과 통교 : 백제의 지원을 받아 양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이때 양 에서 원표가 불교를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 계기로 본다.
⑧울진 봉평비를 건립(524) : 1988년 4월에 발견된 비석으로 율령반포와 지방민 의 일부를 차별대우하는 노인법의 존재, 법흥왕이 매금왕으로써 탁부에 소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⑨울주 천전리 서석(536) : 유교적인 내용으로 성법흥 대왕이라고 쓰여져 있다.
⑩영천 청제비(536) : 제방을 쌓기 위하여 부역동원 사실을 기록하였다.
⑪금관가야 복속: 금관가야(본가야)를 복속하여 42년 김수로왕부터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까지의 금관가야 지역을 차지하였다. 왕족들은 신라의 진 골로 편입되었다. Cf)구형왕-무력(신주도독, 관산성 전투) 김서현-김유신-원술
(3)진흥왕(540~576): 신라 역사상 최전성기☜매우중요
①화랑도를 공인: 화랑도를 공인하고 국가조직으로 편재하여 삼국통일 기틀을 마 련하였다.
②개국 연호 사용: 551년 개국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쓰면서 친정을 시작하였는 데, 이후 대창, 홍제 등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③한강 차지: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상류지역을 차지하여 이곳에 단양적성비 를 세웠다. 이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하류 지역을 기습공격. 한강전지역을 점령한 후 이곳에 신주(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553)
④대가야 복속 : 553년 경 함안의 아라가야, 창녕의 비화가야(창녕비 건립)를 합 병시킨 후 창녕의 완산주, 협주에는 대야주를 설치하였다. 대가야 복속 때 이사 부와 사다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⑤함흥진출 : 556년 동해안에 진출하여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함흥평야까지 진출 하여 황초령비(김정희가 고증)와 마운령비(최남선이 고증)를 건립하였다.
⑥사정담당 차관직인 경(卿)이 설치: 감찰기관인 사정부와 국가최고 정무기관인 품주를 설치하였다. 사정부가 처음 설치된 것은 659년(무열왕 6)이었고, 경덕왕때 숙정대(肅正臺)라고 개명했다가 혜공왕 때 환원했다. 그 차관직인 경(卿)이 설치된 것은 정식 관부가 설치되기 전인 544년(진흥왕 5)인데, 659년 개편에서 차관이 된 것으로 미 루어, 관료에 대한 감찰업무가 갖는 중요성이 1단계 격상했음을 알 수 있다. 장관인 영 (令:大阿飡~角干)은 1명으로서 659년에 설치되었다. 영이 1명이란 사실은 집사부(執 事部)의 장관인 중시(中侍)가 1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귀족세력의 침투를 배제하는 성격 을 가진다는 견해가 있다.
⑦불교진흥책 : 진종사상을 도입하여 왕실권위를 높이고, 스스로 전륜성왕이라 칭 하고, 아들의 이름을 불교식인 동륜, 금륜이라 지었으며 황룡사 장육상을 만들어 신라 삼보의 하나로 삼았다. 또한 호국신앙을 높이기 위하여 신라 최대의 사찰 인 황룡사를 건립하였다.
⑧불교교단 조직 :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으로 하여금 불교교단(국통-주통-군 통)을 조직하게 하고, 호국신앙으로 백좌강회 인왕경을 강론하게 하여 귀족들 에게 호국정신을 고취시켰다.
⑨국사 편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권위를 드높였다.
⑩진과 통교: 한강하류지역인 당항성을 통하여 중국 남조인 진과 통교하였다.
※영토 확장 순서
4세기 미천왕
서안평 점령<고조선 옛땅 회복>,낙랑 축출<대동강 유역 확보>
5C 광개토대왕 : 요동 점령(후연), 내몽고, 비려, 숙신, 동예지역, 임진강유역, 왜격퇴
장수왕 : 한강하류와 남한강 점령, 아산만에서 죽령, 동해안에 경주부근 미질부(경북 흥해)에 이르는 영토확보
6C문자왕 : 북부여 복속, 최대 영토확보
6C 말 영양왕 : 요서지방 공격 했으나 실패
4. 가야
(1) 후기 가야 연맹
①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크게 변하여 전기 가야 연맹 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남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후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 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②대가야의 부상: 5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로 금관 가야의 세력이 위축되고 고령 지방의 대가야가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루었다. 『남제서』「동이전 가라국 조」기록에 보면, 479년 가라국왕(可羅 國王)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 이란 작호(爵號)를 받았다고 한다.
③신라 법흥왕과 결혼 동맹: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신라 법흥왕과 결혼 동맹을 맺어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대가야는 522년 신라에 결혼동맹을 요청하였으며, 신라의 법흥왕은 대가야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을 가야왕에게 시집보냈다.
(2)가야 연맹의 해체
①금관가야 해체: 이후 중앙 집권 국가로 정치적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 가야는 신라 법흥 왕에게 532년 정복당하였다.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 령되었다.
②대가야 해체: 554년 백제 성왕이 이끄는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이 관산성(管山 城:옥천)에서 신라군에 대패하면서 대가야의 부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진 흥왕은 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 고 가야 정벌을 본격화하였다. 결국 562년 진흥왕은 이사부와 사다함의 활약으 로 대가야는 멸망하고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