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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夏文化의 中心地, 東西二京을 가다(10) - 洛陽
넷째 날 ③ 香山寺와 白居易墓
西山石窟의 極南洞을 지나 용문대교(아래 사진의 南端인 가장 왼쪽 다리)를 건넜다. 바로 건너편으로 東山石窟이 있으나 생략하고 香山寺로 갔다.
향산사 전각배치도
향산사는 北魏 肅宗 熙平 원년(516년)에 창건된 절로, 唐나라 때 들어와서는 則天武后가 즉위한 첫해인 天授元年(690년)에 梁王이었던 武三思가 주청하여 이곳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정식으로 香山寺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측천무후는 수차례 이곳을 다녀갔고, 이로부터 130여년 뒤인 唐文宗 大和元年(827년)에 56세의 白居易(772~846년)가 관직을 그만두고 이상적인 거처를 찾아 이곳에 와서 7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기거했던 곳이기도 하다.
불교는 당나라 때 매우 호황을 누렸는데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唐武宗(840~846년)은 도교를 높이고 불교를 싫어하여(尊道厭佛) 廢佛정책을 폈다. 武宗의 연호를 따 이른바 ‘會昌法難’을 일으켜 장안과 낙양의 좌우 거리에 각각 2개의 절만을 두도록 하였고, 절마다 승려는 30인으로 제한했으며, 郡 단위에는 각각 절 하나만을 두되 상중하로 나눠 승려를 20인, 10인, 5인으로 제한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철거토록 했다. 낙양에서는 白馬寺와 少林寺와 香山寺가 살아남았다. 향산사는 백거이가 거처했던 장소이고, 그의 무덤인 白園이 있었기에 요행히도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武宗은 道家의 煉丹術에 빠져 金丹 과용으로 재위 6년만에 죽었다.
용문석굴 쪽에서 바라본 향산사 전경.
江岸으로 낸 길을 따라 좀 걷다가 향산사 입구에서 표를 끊고 다시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서야 향산사에 닿았다.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蔣宋別墅(장송별서)이다. 蔣介石과 그의 부인인 宋美齡의 별장이란 뜻이다. 1936년 장개석의 5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지방정부가 향산사 남측에 작은 누각을 지은 것이다. 생일 날짜보다 이틀 앞선 10월 29일에 장개석 일행이 火車를 타고 낙양에 도착했고, 31일에 이곳에서 생일잔치를 벌인다. 명분은 ‘생일잔치’이지만 실은 서북쪽의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당시 참가자는 張學良(장학량)과 閻錫山(염석산) 등이었는데, 이들은 송미령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낙양을 왕복하며 戰列을 정비했다. 12월 12일에 국공합작을 주장하는 장학량에게 체포될 때까지 장개석은 이곳에서 36일을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이 별장은 기념관으로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별장으로 들어가 1층의 오른쪽 방에는 현대중국의 國父로 일컬어지는 孫文의 방이 꾸며져 있다.
오른편 벽 액자에는 "世界潮流浩浩蕩蕩 順之則昌 逆之則亡"이라고 쓴 손문의 글씨가 눈에 띈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향산사를 둘러보았다. 전각 앞의 나무는 물론 월대와 계단의 난간석마다 붉은 천을 감아놓았다. 朱色을 어지간히도 좋아하는 족속이다. 아니, 財物福을 기원하는 것이다. 재물 많음을 누군들 싫어하랴마는 매달아놓은 등도 붉고 문과 문틀도 온통 붉은 색으로 칠해놓았다.
香山寺 大雄寶殿
향산사 대웅보전 안에 모셔진 釋迦牟尼佛
이 향산사에는 則天武后의 ‘香山賦詩奪錦袍(향산부시탈금포)’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武則天이 용문에 와서 이곳에 머물면서 하루는 신하들과 詩會를 열고, 향산과 관련된 賦詩를 가장 먼저 지은 사람에게 錦袍를 하사하겠다고 했다. 당시 대신들 가운데는 아첨과 처세술에 뛰어나면서도 五言律詩體를 정비한 宋之問이 있었고, ‘春來不似春’이란 시구로 유명한 東方虯(동방규)도 있었다. 左史인 동방규가 먼저 시를 지어 올렸다.
春雪滿空來 봄눈이 허공 가득 내리니
觸處似花開 닿는 곳마다 꽃핀 듯하여
不知園裏樹 동산 속의 나무를 알 수 없으니
若個是眞梅 어느 것이 진짜 매화이런가?
上官인 婉兒(완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읊으니 무측천이 듣고 훌륭하다며 금포를 하사했다. 그런 뒤에 武三思가 十二句의 五言詩를 올렸고, 沈全期가 七律詩를 올렸다. 무측천은 다 잘 지었다고 칭찬했다. 맨 나중에 송지문이 ‘從幸龍門應制’라는 長詩를 올렸고, 완아가 낭송하자 모두 귀 기울여 들었으며 낭송이 끝나자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무측천 또한 이 시가 최고라고 거듭 찬탄하며 동방규의 수중에 있던 금포를 회수하여 송지문에게 다시 하사했으니, 이것이 바로 ‘奪錦袍’의 전말이다.
향산사는 산비탈에 세워진 절집이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둘러보아야 한다. 정면의 2층 종루 너머로 서산인 용문산과 그 아래로 흐르는 이하의 물줄기가 보인다.
절집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전각을 대강 돌다가 대웅보전 월대 아래 계단 뒤편 1층에 있는 九老堂을 발견했다. 백거이가 74세 때 함께 悠悠自適하며 어울린 香山九老의 畵像을 모셔둔 곳이다. 胡杲(호호), 吉旼(길민), 鄭據(정거), 劉眞(유진), 盧眞(노진), 張渾(장혼)의 六人이 먼저 ‘尙齒七老人會’를 결성했고, 뒤에 李元爽(이원상)과 和尙인 如滿이 가입하여 ‘香山九老’가 된다.
<1999년 9월9일에 중국에서 발행된 '香山九老' 기념우표>
이들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세속과는 떨어져 살면서 종일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향산사를 대략 돌아보고 산길을 따라 내려와 白居易墓가 있는 白園으로 갔다. 白園이 위치한 곳은 향산의 琵琶峰으로 비파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란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오솔길로 접어든다.
白園 입구 (좌) 琵琶峰으로 가는 길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고즈넉한 분위기의 길이다 (우)
오솔길을 따라가니 대나무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푸른 연못도 있으며, 그윽한 산길 따라 돌계단을 조금 걸어 올라가면 伊河의 물소리를 듣는다는 ‘聽伊’이라는 둥근 지붕의 정자가 나온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白居易는 56세의 나이에 관직을 그만 두고 향산사에서 지냈다. 이 정자가 벗인 元稹(원진)과 劉禹錫(유우석) 등과 어울리면서 장기를 두고 술을 마시거나 차를 마시며 시를 논했다는 곳이다. 백거이가 원진과 얼마나 가까운지 호를 元白이라고 하면서 문학혁신운동을 벌였고, 유우석과는 만년에 노래를 함께 불러 사람들이 劉白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백거이는 字가 樂天인데다 향산사로 들어온 뒤에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벗 삼아 號조차 醉吟先生이라 했고, 마음이 불교 쪽으로 기울어지면서부터는 아예 香山居士라 했다.
백거이는 어려서부터 詩作에 탁월했지만 집안 살림이 어려웠다. 그가 태어날 때는 李白이 죽은 지 10년, 杜甫가 죽은 지 2년이고, 韓愈와는 동시대 인물인지라 詩의 大家인 이 네 사람을 통칭해 ‘李杜韓白’이라 한다. 백거이가 15살에 長安에 갔을 때 당시 유명한 顧況이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물으면서 조롱하기를, “쌀값이 비싸니 살기가 또한 쉽지 않겠구나(米價方貴, 居亦弗易)”라고 했다가 그의 시 작품을 보더니 찬탄하면서 “말에 도를 얻었으니 사는 것인즉 쉽겠구나(道得箇語, 居卽易矣).”라고 했다 한다.
백거이는 32세 때 벼슬길에 나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삶을 살았지만 끊임없이 시를 지어 평생 3천여 편 가까이 된다. 詩仙, 詩魔라고도 불렸던 그는 백성들의 애환을 담은 시 뿐만 아니라 사회를 풍자하여 道德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므로 되도록 쉬운 말로 쓰려고 했다. 노파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시를 諷諭와 閒適과 感傷과 雜律로 나눴는데, 대표시라고 일컫는 「長恨歌」와 「琵琶行」은 感傷詩에 속한다.
白居易의 일생을 살펴보면 이름과 字처럼 살았던 듯하다. 『중용』에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오 不願乎其外니라 素富貴하여는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여는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여는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여는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在上位하여 不陵下하며 在下位하여 不援上이오 正己而不求於人이면 則無怨이니 上不怨天하며 下不尤人이니라 故로 君子는 居易以俟命하며 小人은 行險以徼幸이니라”고 했듯이 白居易는 ‘居易以俟命’했고, 樂天知命했다.
聽伊亭을 지나면 잣나무 숲속에 ‘樂天堂’이라는 집이 있다. 우리는 이곳을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니, 본래 있었던 터에 새로 지으면서 백거이의 「草堂記」의 내력을 정리해놓은 곳이라고 한다. 백거이가 43살 때 江州(지금의 江西省 九江市)로 좌천되어 갔다가 이곳저곳을 다니던 중 廬山(여산)에 올라 경치에 반해 그곳에 草堂을 짓고 지내면서 「草堂記」와 「琵琶行」 등의 걸작을 남긴다. 집안에는 廬山인 듯한 곳에 앉아 있는 白居易像이 白玉으로 조각되어 있다. 향산에 있으면서 늘 흰옷을 입고 다녔기에 백옥으로 조각한 듯하다.
산길을 더 올라가니 평평한 길이 나온다.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가 나오고 곧 둥근 무덤이 보였다. 오솔길을 따라 올라오다 보니 무덤 뒤편으로 들어간 셈이다. 왼쪽으로 돌아 무덤 앞으로 갔다. 무덤 입구에는 패방이 서 있고, 무덤 앞에는 비석과 무덤의 왼쪽 옆으로는 그의 시비와 한국의 백씨문중의 기념비도 서 있었다.
비석의 정면에는 唐의 대시인 백거이의 마지막 직책이 태자의 스승이었다는 뜻으로 ‘唐少傅白公墓’라고 노란 글씨로 쓰여 있고, 그 옆으로 간략한 이력과 함께 비문의 내력이 있고, 그 碣 위의 題額에는 ‘兼善’이란 글자가 篆書體로 이름답게 새겨져 있다. ‘兼善’이란 『맹자』 진심편에 “古之人이 得志하여는 澤加於民하고 不得志하여는 修身見於世하니 窮則獨善其身하고 達則兼善天下니라(옛 사람이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더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나타내니, 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아울러 천하를 선하게 하니라)”에서 유래한다.
이 ‘兼善’이란 말은 후대에 두루뭉술하게 변화하여 ‘兼濟’란 말로 널리 쓰이는데 後漢末에 쓰인 『風俗通儀』에서 유래한다. 참고삼아 살펴보면, 동한 때 潁川 사람인 劉勝이 蜀郡太守를 지내고 벼슬을 그만 뒤에는 일체 政事에 대해 논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집안 청소를 하는데도 문을 닫고 했고, 누가 무슨 말을 물으면 대답만 할 뿐 일체 응대하지 않았다. 마치 ‘찬바람 맞은 매미처럼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를 ‘噤若寒蟬(금약한선)’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이런 劉勝에 대해 『風俗通儀』를 쓴 應劭(응소)가 평가하여 말하기를, “『論語』에 ‘담대멸명은 공식적인 일이 아니면 일찍이 언(子游의 이름으로 공자가 무성의 성주가 된 그에게 사람을 얻었으냐고 물었을 때 답한 내용)의 집에 오지 않았다’ 했고(論語澹臺滅明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
(『주역』 重山艮卦에) ‘군자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생각한다(君子思不出其位)’고 했고, 맹가 또한 ‘달하면 아울러 천하를 다스리고 궁하면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한다(孟軻亦以爲達則兼濟天下, 窮則獨善其身)’고 했으니,
유승은 수약함이 있어 생각이 순수했고, 그 고요함은 아주 심했으나 때맞춰 펴는 뜻은 편안했고, 말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중도에 맞았으며, 또한 미워함이 없었다(劉勝在約 思純 其靜已甚 若時意宴 及言論折中 亦無嫌也).”고 했다. 여기서 응소가 맹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兼善’을 ‘兼濟’로 바꿔 쓰면서 善政이라는 道德政治가 ‘現實參與’라는 뜻으로 두루뭉술해져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白居易가 인생의 후반부 20여년을 살았던 龍門香山의 생활은 「池上篇」이란 시에 잘 응축되어 있다. 이 시를 음미하며 향산에 잠든 백거이의 삶을 돌아보며 비파봉을 내려간다.
十畝之宅 五畝之園 십묘의 택지에 오묘의 동산이나
有水一池 有竹千竿 연못 물 하나에 장대 천 그루가 있으니
勿謂土狹 勿謂地偏 땅 좁다 말고, 터 구석지다 말라.
足以容膝 足以息肩 족히 무릎 담그고, 어깨 기대 쉴만하며
有堂有庭 有橋有船 집 있고 뜰 있으며, 다리 있고 배 있으며
有書有酒 有歌有弦 책 있고 술 있으며, 노래 있고 현 있다네.
有叟在中 白須飄然 그 속에 한 늙은이가 있어 흰 수염 나부끼니
識分知足 外無求焉 분수 가려 족할 줄 알아 밖으로 구함이 없다네.
如鳥擇木 姑務巢安 새가 나무 택함에 짐짓 둥지의 편함에 힘쓰듯
如龜居坎 不知海寬 거북이가 구덩이에 삶에 바다의 넓음을 알지 못하듯
靈鶴怪石 紫菱白蓮 신령스런 학과 괴석과 자주빛 마름풀과 하얀 연꽃은
皆吾所好 盡在吾前 모두 내 좋아하는 바인데 다 내 앞에 있네.
時飲一杯 或吟一篇 때로 술 한 잔 마시고, 혹 시 한편 읊으며
妻孥熙熙 雞犬閑閑 처자식 화락하고, 닭들과 개들도 한가로우니
優哉游哉 吾將終老乎其間 넉넉하며 즐겁도다! 내 장차 그 사이에서 늙음을 마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