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천재사중건기
소윤 이공의 묘소는 예안현 서쪽 사천동에 있다. 자손들이 지금까지 삼백여 년을 보전하여 왔으니 아! 참으로 오래 되었다. 공의 이름은 헌이고, 본관은 영천이다. 대영이란 분이 있어 신호위대장군을 역임하여 영양군에 봉군되었는데, 중시조이자 공의 오대조이다. 고조의 이름은 득분이니 전공판서요, 증조의 이름은 문경으로 보승호군이다. 조부의 이름은 송려로 이부시랑이요, 고의 이름은 일충으로 비서소감인데, 모두 다 고려조 관직이다. 세대가 멀고 참고할 문헌이 없는데다가 성휘가 크게 전하지 못하였으나, 교목세가로 누대 번창한 적선한 집이다. 공은 고려 말에 출생하여 조선조 혁명기를 당하여 자취를 숨겨 자중할 계획으로 좋은 산수를 두루 찾아다니다가, 예안현 분천에 이르러 ‘하늘이 숨기고 땅이 감추어 주인을 기다렸네’라 말하고, 이 분곡에 정착하여 살고자 했다. 예안에 안 이씨가 살게 된 것은 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빽빽한 숲과 깊은 골짜기에 뜻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가시를 베어내고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몇 칸짜리 집을 지어 ‘낙은유거’라 게첨하였다. 향리에 거하실 때엔 노소를 막론하고 다같이 화락추종하여 선(善)으로 권면하니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게 한 것은 천성이 그러하였다. 향년이 84세라 사천 신좌원에 장사를 하다. 부인 이씨는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는데, 묘는 제사 후록 계좌원에 있다. 이 곳은 공이 손수잡은 것이라고 전하여 온다. 두 분 묘소가 동서로 서로 바라보는 곳 사이에 작은 개울이 있다. 장자 파는 의흥현감이요, 차자 오는 직제학이다. 공의 상을 당했을 적에 의흥공은 나이가 70세요, 직제학공도 50세가 넘었으나, 시묘 삼년을 하였다. 재사 창건을 이 때부터 계획했는데, 지금까지도 초동 야로들이 이모의 터라 가리키고 있다. 계속하여서 봉예공 효손과 인제공 흠이 대대로 수리하여 전소하였고 현손 효절공 농암선생에 이르러서 확장하고 제위 전답을 사 두어 춘추 제사에 공하고 결수수호 절차도 구비하였다. 그 후 하연 매암‧간재 제공이 선대의 뜻을 받들어서 더욱 게으름이 없었다. 외예로는 회재‧퇴계 두 선생이 더욱 드러나고, 영남의 선비와 낙하의 명경에 외손이 많다. 아! 참으로 아름답다. 그 후 문운이 쇠퇴하여서 수갈을 하지 못하였는데, 인조 때에 비로소 작은 비나마 세운 것은 재사가 낡아 수리하다가 세우게 된 것이다. 후손이 면포 수백 필을 모아서 조력하니, 옛것을 약간 넓히고 신규로 포주와 구고를 증축하여서 총 이십삼 간이 되었다. 진사공 백엽이 전후 사실을 모아서 집성일책하고 분계공 원필이 율시를 지어서 제족의 수호를 권면하고 또 상사공 동필이 이어서 화운하고 향중의 노성이 차운하고 자손들이 지은 것과 합하여 한 권의 책자를 만들어서 궤중에 갈무리하였다. 재사의 전후 고사를 하나의 문헌으로 만들어 책을 펼치면 알 수 있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을사년 가을에 화재가 발생하여 정당과 익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선세 유묵인 ‘전소윤낙은공’ 육대자 및 고사 2책이 소실이 되어서 다시 빙고할 곳이 없으니 아! 참 아깝도다. 후손노소가 놀라서 묘전에 회합 고유위령하고 파와 잡초사이를 헤치고 앉아서 울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거개 궁하나 숫자는 가위 백족지충이라, 위선하는 도리는 갈력하는 데 있고 빈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중건하는 책임이 오직 탄성하는 데 있고 요핍에 있는 것이 아니니, 문운이 불행하여 이런 변을 당하였으나 중건하는 일은 잠시라도 지연시킬 수가 없으니 어찌 일심합력하여 거사하지 않을까?” 듣고 있던 사람이 일구동사로 좋다하고 도감 2인을 선출하니 창룡‧동형이오, 유사 3인은 홍태‧사묵‧수룡이다. 동량신재는 용산의 구목을 쓰고, 경비는 각파 명하에 배정하고, 기타 잡비는 오직 일을 주관하는 사람의 분수에 맡기노라고 즉석에서 논의 결정하고 산회하였다. 일 년 건축할 때 간사 제원이 수득한 각파명전이 근백량이었다. 촌민의 재와를 매입하여서 부족분을 보충하고 재목은 도곡에서 모으고 인부는 향교서원에서 빌리고 사우가 다투어 도와 삼월이십사일에 정당 팔간을 세우고 사월 이십구일에는 상량할새, 제목은 신구를 겸하고 역군은 공사에 빌려서 좌우협실과 동서장랑을 차례로 세워 오, 육일이 안 되어서 이십삼 간 옥자를 입주하고 약간의 재목 부족분은 의인 이세술과 지애 김상사가 희사하고 또 면내 영양남씨 덕산윤씨‧선성김씨가 소문을 듣고 역시 소유목의 벌채를 허락하니, 이것이 다 공의 내외 여경의 소급이오, 또한 금세에도 좋은 사람이 있음이다. 목재는 척후도 버린 재목이 없고 재용은 한 터럭도 낭비가 없었다. 명하수곡은 5‧60포에 지나지 않으나, 요리를 잘 하여서 공궤에 결핍이 없이 3개월내에 준공하였다. 향리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씨는 위선의 성이 대단하다고 하더니 과연 무언이 아님을 알았다. 본손이 태반 빈곤하다 하여도 실의함이 없고, 또 반드시 다 학문력이 있는 것도 아니나, 이 재사에 있어서는 일심으로 분주 노력하여 기어이 일을 성사시키니, 아! 참 가상할 일이다. 운수가 쇠하였으나 재실은 불멸하니 이씨는 부흥할 것이다. 낙성에 모인 사람이 도감에게 공을 돌리니 도감의 말이 우리들은 손사에는 감히 당치도 않고 조선의 적경과 천우신조로 돌리니 그 말이 의를 안다고 하겠다. 자손 중에 노성이 거의 다 별세하고 오직 분사 이복형 어른께서 노의 영광전처럼 남아 있어서 82세의 노령으로 초본을 구성하여 손수 정사하여 재주없는 나에게 중건기를 청하니 참으로 가경할 일이다. 내가 외예의 열에 있으니 글을 못하나 감히 사양할 수 있을까? 대강 고금사실과 전후 간사 제인의 노고를 위와같이 서술하였다. 번잡한 것을 산삭하지 않은 것은 될 수 있는대로 상세히 기록하여서 재사의 옛 사적들을 만의 일이라도 비치함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 하여서이다.
1788년 4월 15일 이급 삼가 기록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