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도시 모이는 도시』를 읽고
철학과 석사과정 김슬기
도서는 제목 속 ‘도시‘보다 더 확장된 ‘나라’를 여럿 둘러보며, 그 속에서 도시 간 이루어지는 인구 이동을 논의하고 있다. 이동은 한 국가 내에서 보다 나은 지역으로 진행되는 한편, 세계 내에서 보다 나은 세계로도 진행되고 있는 현상으로 읽힌다. ‘이동‘과 함께 저자의 논의에서 중점이 되는 사안은 ‘저출산‘이다. 우리나라의 저출산이 심각하다는 담론은, 도대체 우리나라가 무슨 위기에 있는가를 염려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비록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나, 저출산으로 고통받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었다고 밝힌다.
이동과 저출산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의 논의로 통합되는가? 세계를 둘러보며, 저자는 두 사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세계에서 지배적인 현상임에 주목한다. 즉 해외의 다른 국가에서도 나은 일자리와 삶을 기대하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출산률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두 현상이 맞물리면서, 국가와 문화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접촉은 왕성해질 것이다. 출산률의 감소는 결국 임시적인 형태로나마 외국인을 요청하게끔 만드는 조건이다. 이를 종합한다면 세계 속의 우리나라는, 자국민의 감소와 함께 인구 이동 및 유출이라는 변화할 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
이동과 저출산을 중심으로 세계를 읽고 있는 저자는, 그것들이 지배적이게 된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들이 야기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를 경시하지는 않는다. 환기되어야 할 것은, 저자의 주된 관심 사안이다. 저자는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좀 더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답을 내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적응하고 나아갈 이들은, 현대적인 저출산 문제가 야기한 피해의 당사자들인 동시에 저출산 문제의 근원으로서 현대 문화에 속해 있다. 따라서 저자는 현대인들에 대한 비판은 부적절한 방향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출산의 흐름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해서도 안 되지만, 여전히 출산과 양육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저출산의 수많은 요인에는 가치관적 측면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다. 방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출산을 유도하는 사회 구조적 측면을 개선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급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이 개인과 사회가 적응할 시간 조차도 주지 않는 위협임을 생각하면, 빠른 진행 만큼은 지배적인 흐름이더라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손 놓고 구경하지는 않으면서, 개인들이 나아가게끔 만들기 위해 결국 저자의 주된 관심은 사회 구조적인 측면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저출산을 야기하는 사회적 요인에 대해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표현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적인 소통과 공통의 실천을 통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방관‘은 사실 방관으로 그치지도 않을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에 변화를 야기할 힘을 얻었을 때, 저출산을 지지하는 사회 제도를 ’방관‘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용인‘이다.
물론 저자의 이러한 사회 개혁적 논의는, 저출산에 대한 공통의 실천 및 이해와 다소 분리될 수 있다. 방관되지 말아야 할 대상은 여전히 출산을 희망하는 이들이지만, 비판받지 말아야 할 대상은 출산을 지향하지 않는 이들이다. 저출산의 흐름에 동조하는 이들이 새로운 흐름과 변화에 부합하는 사회를 찾음은 장기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그것이 갖는 혁신성과 새로움의 정도에 비례해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반면, 출산 희망자를 방관하지 않는 사회 제도의 형성은 비교적 과감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빠르게 진행되는 출산률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에 대한 접근법에는 최소한의 표본이 존재한다. 과거 높은 출산율이 기록되던 시기에 각 지역과 국가가 취한 성공적이었던 조치들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말하는 출산을 바라는 자들이, 저출산의 흐름에 동조하는 이들과 어느 정도로 유사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현대적 흐름으로서 저출산과 출산을 장려하는 방식의 사회 개혁은 분리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저자가 바라는 바가 공통의 실천을 통한 희망적 방향으로의 개선이라면 분리를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저출산’에 대한 태도에서는, 출산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저출산의 흐름에서 벗어난 존재들일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경우에, 논의 대상은 단순히 저출산에서 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전세계’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출산을 희망하고, 저출산을 장려하던 사회 제도의 변화를 통해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할 이들 또한 사회 제도의 ‘대상‘에서 나아가는 ’우리‘일 수 있어야 한다. 저출산의 배후에 있는 현대적 흐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부터 난해한 일이므로, 이들을 포함한 현대적 흐름을 읽고 ’우리‘로서 행동함에는 많은 긴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여야 한다. 그것이 저출산의 흐름에 대한 비판을 용인하지 않음으로써, 공통의 이해 및 실천의 주체들이 나아가게끔 만든다는 저자의 방향성에 더욱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저자가 저출산을 지지하는 사회 제도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에, 저출산을 지지하는 사회 제도를 적극적으로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표현을 덧붙이기를 말하고 싶다.
함께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저자의 접근에는 강하게 공감한다. 현대적 문제들의 위협과 접근법에서의 난해함에, 사실 ‘우리‘가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를 더욱 어려운 만드는 길이겠지만 말이다. 그의 또다른 중심 사안인 ’이동‘을 고려하면 문제의 어려움이 더더욱 커지겠다. 그 어려움이 서로를 걸림돌이나 오로지 대상으로서만 보게 만들지 않길 바란다.
첫댓글 한 학기 동안 오아시스 이끄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b 오늘 마무리까지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