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놀이터/조선
박지원 -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건방진방랑자 2021. 11. 13. 13:15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던 기록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박지원(朴趾源)
하릴없이 밤거리를 헤매는 연암의 무리들
孟秋十三日夜, 朴聖彥與李聖緯ㆍ弟聖欽ㆍ元若虛ㆍ呂生ㆍ鄭生ㆍ童子見龍, 歷携李懋官至.
時徐參判元德先至在座. 聖彥盤足橫肱坐, 數視夜, 口言辭去. 然故久坐, 左右視莫肯先起者, 元德亦殊無去意, 則聖彥遂引諸君俱去. 久之童子還言 “客已當去, 諸君散步街上, 待子爲酒.” 元德笑曰: “非秦者逐.” 遂起相携, 步出街上.
聖彥罵曰: “月明, 長者臨門, 不置酒爲懽, 獨留貴人語, 奈何令長者久露立?” 余謝不敏, 聖彥囊出五十錢沽酒.
少醉, 因出雲從衢, 步月鍾閣下, 時夜鼓已下三更四點. 月益明, 人影長皆十丈, 自顧凜然可怖.
남 같지 않은, 아니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 호백이
街上群狗亂嘷, 有獒東來, 白色而瘦. 衆環而撫之, 喜搖其尾, 俛首久立.
甞聞獒出蒙古, 大如馬, 桀悍難制. 入中國者, 特其小者, 易馴. 出東方者, 尤其小者, 而比國犬絶大, 見恠不吠, 然一怒則狺狺示威. 俗號‘胡白’, 其絶小者, 俗號‘犮犮’, 種出雲南. 皆嗜胾, 雖甚飢, 不食不潔. 嗾能曉人意, 項繫赫蹄書, 雖遠必傳, 或不逢主人, 必啣主家物而還, 以爲信云. 歲常隨使者至國, 然率多餓死, 常獨行不得意.
懋官醉而字之曰: ‘豪伯’ 須臾失其所在, 懋官悵然東向立, 字呼豪伯, 如知舊者三, 衆皆大笑. 鬨街群狗, 亂走益吠.
과거의 너는 여기에 없고 개구리와 매미와 닭의 소리만 들리네
遂歷叩玄玄, 益飮大醉, 踏雲從橋, 倚闌干語.
曩時上元夜蓮玉舞此橋上, 飮茗白石家. 惠風戱曳鵝頸數匝, 分付如僕隷狀, 以爲笑樂. 今已六年, 惠風南遊錦江, 蓮玉西出關西, 俱能無恙否?
又至水標橋, 列坐橋上, 月方西隨正紅. 星光益搖搖圓大, 當面欲滴. 露重衣笠盡濕, 白雲東起橫曳, 冉冉北去, 城東蒼翠益重. 蛙聲如明府昏聵, 亂民聚訟; 蟬聲如黌堂嚴課, 及日講誦; 鷄聲如一士矯矯, 以諍論爲己任. 『燕巖集』 卷之十
해석
하릴없이 밤거리를 헤매는 연암의 무리들
孟秋十三日夜, 朴聖彥與李聖緯ㆍ弟聖欽ㆍ
7월 13일 저녁에 박성언【박성언(朴聖彦): 실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박제가의 적형(嫡兄, 정실에서 난 형을 일컫는 말)인 박제도(朴齊道)를 가리킨다】과 이성위【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을 가리킨다. 성위(聖緯)는 그 자(字)다. 서얼 출신이다. 젊은 시절 연암을 모시고 ‘백탑시사(白塔詩社)’라는 문학 동인 집단을 결성한 바 있으며,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과 함께 훗날 연암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실학적 관점을 지녔으며, 박제가와 특히 교분이 깊었다】, 그의 아우 성흠【이성흠(李聖欽): 이희경의 동생인 이희명(李喜明)을 가리킨다. 훗날 사미사에 합격해 전옥서 참봉과 의금부 도사를 지냈다】,
元若虛ㆍ呂生ㆍ鄭生ㆍ童子見龍, 歷携李懋官至.
원약허【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의 자다. 부친인 원중거와 함께 연암 일파와 교유가 깊었으며, 이덕무의 누이동생과 혼인했다.】, 여생, 정생, 동자 견룡이 이무관을 데리고 왔다.
時徐參判元德先至在座.
이때엔 참판에 제수된 원덕【서원덕(徐元德): 서유린(徐有隣)의 자다. 서효수(徐孝修)의 아들로, 온건한 입장의 소론(少論)에 속하는 인물이다. 달성 서씨 이 집안에는 서유린 말고도 서유방ㆍ서유본ㆍ서유구 등 연암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많았다. 서유린은 훗날 정조의 측근이 되어 탕평책에 적극 협력했다. 벼슬은 도승지ㆍ대사헌ㆍ대사간ㆍ호조참판ㆍ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聖彥盤足橫肱坐, 數視夜,
성언은 소반에 책상 다리를 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자주 밤임을 살피며
口言辭去.
입으론 “일어서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然故久坐, 左右視莫肯先起者,
그러나 짐짓 오래 앉아 좌우를 보니 기꺼이 먼저 일어나려는 사람은 없었고
元德亦殊無去意, 則聖彥遂引諸君俱去.
원덕 또한 자못 떠날 뜻은 없었기 때문에 성언이 마침내 친구들을 끌고 함께 나가버렸다.
久之童子還言 “客已當去,
오래잖아 동자가 돌아와 ‘객(원덕)은 이미 마땅히 떠났겠지.
諸君散步街上, 待子爲酒.”
우리들은 거리에서 산보하며 그대를 기다려 술 한 잔 마시려 하네.’라는 말을 전해줬다.
元德笑曰: “非秦者逐.”
그러자 원덕은 웃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쫓아내는 거구만.”【진시황의 ‘축객령(逐客令)’을 패러디한 말이다. ‘축객령’이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진(秦) 이외의 제후국(諸侯國) 출신으로서 진에 벼슬하고 있는 자들을 모두 축출하라고 명령을 내린 일을 말한다. 여기서도 박제도 일행이 자기들과 동료가 아닌 서유린에게 자리를 뜨라는 눈치를 보내자 서유린이 이를 농으로 받아 말한 것이다】이라 말하며
遂起相携, 步出街上.
마침내 일어나 서로 끌며 걸어 길거리로 나갔다.
聖彥罵曰: “月明, 長者臨門,
성언이 화를 내며 말했다. “달 밝은 날에 어른이 문에 도착했는데
不置酒爲懽, 獨留貴人語,
술을 두고 환대하지 못할망정 홀로 귀인과 머물며 말을 하면서,
奈何令長者久露立?”
어찌하여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세워놓는단 말인가.”
余謝不敏, 聖彥囊出五十錢沽酒.
나는 불민했음을 사과하니, 성언은 주머니에서 50전【닷 냥이면 꽤 큰 돈이다. 주량이 대단했던 연암까지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나 됐으니, 술을 취하도록 마시려면 이 정도의 돈은 필요했을 터이다】을 내어 술을 사오도록 했다.
少醉, 因出雲從衢, 步月鍾閣下,
조금 취기가 오르자, 운종가【지금의 종로 2가 일대인데, 육의전이 있었으며 당시 한양의 다운타운이라 할 수 있던 곳이다】로 나가 달 뜬 종각 아래를 걸었으니,
時夜鼓已下三更四點.
시간은 이미 3경 4점【삼경사점(三更四點): ‘3경’은 밤 11시에서 1시 사이를 가리킨다. ‘경(更)’은 다섯 점(點)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3경 4점은 밤 12시 30분께다. ‘경’을 알릴 때는 북을 쳤고, ‘점’을 알릴 때는 꽹과리를 쳤다. 당시 서울 시민들은 때에 맞춰 울리는 이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를 듣고 시각을 알았다. 한편 당시 한양에는 통금 제도가 있었으니, 매일 밤 2경에 종을 28번 쳐 통행금지를 알렸으며, 5경 3점, 즉 새벽 4시 경에 종을 33번 쳐 통금 해제를 알렸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인정’이라 하고, 통금 해제를 알리는 종을 파루라고 했다. 통금이 시작되면 성문이 닫혀 도성 출입이 일체 금지되고, 공무 외에는 도성 안에 행인이 다닐 수 없었으며, 순라군이 순찰을 돌았다】을 친 야밤이었다.
月益明, 人影長皆十丈,
달은 더욱 밝아졌고 사람의 그림자는 십장 정도로 길어져
自顧凜然可怖.
스스로 돌아봄에 두려워 할만 했다.
▲ 이날 축객 당한 서유린의 선정비다. 공주시에 있다.
남 같지 않은, 아니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 호백이
街上群狗亂嘷,
길가에 무리진 개들이 어지럽게 짖었고
有獒東來, 白色而瘦.
오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는데 흰색에 야위었다.
衆環而撫之, 喜搖其尾,
우리들이 둘러서서 어루만지니 좋아하며 꼬리를 흔들었고
俛首久立.
고개를 숙여 오래도록 가만히 있었다.
甞聞獒出蒙古, 大如馬,
예전에 들으니 오는 몽고에서 왔으며 몸집이 큰 것은 말 같아
桀悍難制.
포악하고 사나워 다루기 힘들다고 한다.
入中國者, 特其小者, 易馴.
중국에 들어온 것은 그 중 작은 것으로 다루기 쉽단다.
出東方者, 尤其小者,
조선으로 들어온 것은 더욱 작은 것인데
而比國犬絶大, 見恠不吠,
우리의 토종개와 비교하면 크며, 기이한 것을 봐도 짖지 않으나
然一怒則狺狺示威.
한 번 성질이 나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보인다고 한다.
俗號‘胡白’, 其絶小者, 俗號‘犮犮’,
속칭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 중 작은 것은 속칭 ‘발발이’로 불리는데
種出雲南.
운남에서 종이 나왔다고 한다.
皆嗜胾, 雖甚飢, 不食不潔.
다 고기를 즐기는데 비록 매우 굶주렸으나 불결한 것은 먹지 않는단다.
嗾能曉人意, 項繫赫蹄書,
길들이면 사람의 뜻을 밝게 알아 목에 편지를 묶어주면
雖遠必傳,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전하고
或不逢主人, 必啣主家物而還,
간혹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반드시 주인집의 물건을 물고 돌아와
以爲信云.
신험으로 삼는다고 한단다.
歲常隨使者至國, 然率多餓死,
해마다 사신을 따라 조선에 오지만 거의 대부분 아사하며,
常獨行不得意.
항상 홀로 다니며 어울리지 못한다.
懋官醉而字之曰: ‘豪伯’
무관이 취하여 개에게 으뜸 호인이라는 뜻으로 ‘호백(豪伯)’【胡白→豪伯: ① 자기들의 존재감에 대한 투사 ② 청조 문화에 대한 연암 일파의 열린 마음】이란 자를 붙여줬다.
須臾失其所在,
잠깐 후에 오가 있던 곳에서 사라졌고,
懋官悵然東向立, 字呼豪伯,
무관은 슬픈 표정으로 동쪽을 향해 호백의 자를 부르길
如知舊者三, 衆皆大笑.
마치 옛 친구를 부르듯 세 번 부르니, 모두 다 크게 웃었다.
鬨街群狗,
무관의 부르는 소리에 거리의 모든 개들이 시끄럽게 했고,
亂走益吠.
어지러이 달리며 더욱 짖어댔다.
▲ 호백이는 티벳 마스티프로 불린다. 이날 만났던 호백이도 이와 비슷하게 생겼을 거다. 매우 야윈 하얀색의 외로운 방랑자.
※ 연암의 글에서 호백이는 수척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 사진의 개는 호백이와는 다른 종류의
개이며, 호백이로 추측할 수 있는 수척한 몽골개는 몽골 세구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구가 존재했으며
중국황제에서 선물하였다는 기록과 세구를 여러 종류로 세분하고 있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몽골 세구 | 만주 세구
|
이희영의 세구도
| 사도세자의 세구도
|
과거의 너는 여기에 없고 개구리와 매미와 닭의 소리만 들리네
遂歷叩玄玄, 益飮大醉,
마침내 현현의 집을 두드려 들어가 더 술을 마셔 크게 취했고
踏雲從橋, 倚闌干語.
운종교를 밟아 난간에 기대어 말했다.
曩時上元夜蓮玉舞此橋上, 飮茗白石家.
접때 정월 밤엔 연옥【유연(柳璉, 1741~1788)의 자다. 유연의 다른 자는 탄소(彈素)이고, 호는 기하(幾何)이며, 후일 유금(柳琴)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기하’라는 호는 기하학에 밝다고 해서 스스로 붙인 것이다. 서얼 출신으로, 유득공의 숙부다】이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췄고 백석【이홍유(李弘儒, 1734~1812)의 호다. 젊은 시절 석실서원(石室書院)의 김원행(金元行, 1702~1772)에게서 수학했으며, 저서로 『백석유고(白石遺稿)』가 있다】의 집에 가서 차를 마셨었다.
惠風戱曳鵝頸數匝,
그 집에서 혜풍은 기러기목을 잡고 몇 바퀴 돌며
分付如僕隷狀, 以爲笑樂.
분부하는 게 마치 종을 대하는 모습이라 우스꽝스러웠다.
今已六年, 惠風南遊錦江,
지금은 이미 6년이 흘러 혜풍은 남쪽으로 금강에서 놀고 있고
蓮玉西出關西, 俱能無恙否?
연옥은 서쪽 관서로 나갔으니, 모두 무탈하신가?
又至水標橋, 列坐橋上,
또 수표교【지금의 수표동(水標洞)과 관수동(觀水洞) 사이의 청계천에 있던 다리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달구경을 운치 있게 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에 이르러 다리 위에 나란히 앉으니
月方西隨正紅.
달은 서쪽으로 가며 더욱 붉어졌다.
▲ 청계천의 수표교. 지금은 인공 청계천이 만들어져 장충단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星光益搖搖圓大, 當面欲滴.
별빛은 더욱 반짝여 둥그런 모양으로 더욱 커져 마땅히 얼굴에 쏟아질 듯했다.
露重衣笠盡濕, 白雲東起橫曳,
이슬은 무거워 옷과 삿갓을 다 적셨고, 흰 구름은 동쪽에서 나와 가로 질러
冉冉北去, 城東蒼翠益重.
느릿느릿 북쪽으로 갔으며 성 동쪽의 푸른 비취빛은 더욱 짙어졌다.
蛙聲如明府昏聵,
개구리 울음소리는 관청의 우매한 사또에게
亂民聚訟;
마음이 어수선한 백성들이 모여 소송하는 것만 같았고,
蟬聲如黌堂嚴課, 及日講誦;
매미 울음소리는 엄히 가르치는 향교의 강 바치는 날에 이른 것만 같았으며,
鷄聲如一士矯矯,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굳센 자세로
以諍論爲己任. 『燕巖集』 卷之十
쟁론함을 자신의 소임을 삼은 것만 같았다.
▲ 이 날 연암은 친구들과 이 루트를 따라 밤새 움직였다. (사진 출처 - [연암을 읽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소화시평 상권46 감상
1. 연암을 애타게 기다리던 친구들
2. 취기에 밤거릴 헤매다 만난 호백이
3. 호백이 같은 친구들아
4. 밤거릴 헤매야만 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4-1. 총평